[리뷰]유실된 그 모든 가능 세계: 안티무민클럽AMC<한 방울의 내가>

2024. 7. 16. 15:33Review

 

유실된 그 모든 가능 세계

 안티무민클럽AMC 〈한 방울의 내가〉

글_박주현

 

 

 

영화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는 다음 대사로 시작한다.

 

“당신 삶을 이야기로 만들긴 쉽죠. 하지만 그보다 어려운 건 실제 기억을 견디는 거예요. 현실은 냄새 나고 더럽죠. 그리고 단순한 결말로 끝나지도 않아요. 지금 내게 영향을 미치는 건 실제 기억이죠.” 1)

 

〈한 방울의 내가〉는 물방울의 위태로운 표면 장력과도 같이 기억을 견디는 이야기다. 그것은 관계에 빚진 기억이고, 더는 만나거나 만지지 못하는 몸에 관한 기억이다. 비밀과 약속으로 들어찬 하나의 몸이 유실된 가운데, 그의 몸과 나의 몸이 빚어낸 눈부신 기억은 어떻게 견뎌야 하는가?

 

사진: 김태리 제공: 안티무민클럽

 

극장은 본래의 쓰임을 다한 (구)대사관저 건물이었다. 두 개의 거실, 한 개의 주방, 일곱 개의 방, 테라스와 정원, 지하 차고 등으로 이루어진 100평 규모의 2층 단독 주택2). 공연 20분 전, 극장 구석구석을 돌아보았다. 마치 미로 같았고, 방 속의 방으로 들어가니 하얀 연미복을 입은 피아니스트가 휴식 중이었다. 하얀 건물에, 하얀 방에, 하얀 연미복을 입은 피아니스트와 하얀 사물들.

 

욕조 안에 떨어진 바싹 마른 낙엽 한 장과 먼지 쌓인 유아용 양변기가 시선 끝에 걸렸다. 그것들은 전부 물로 흥건해야 마땅하나, 이미 오래전에 건조된 사물들이었다. 어둠에 잠기기 시작한 빈 응접실도 보였다. 극장은 올지 안 올지 모르는 손님을 기다리는, 혹은 이미 손님을 한 차례 떠나보낸 연회장 같았고, 여전히 누군가를 잊지 못해 시간 안에 갇혀버린 몸 그 자체 같았다.

 

사진: 김태리 ❘ 제공: 안티무민클럽AMC

 

‘나’는 메이의 눈물로 태어났다. 물에게 동화(同化)란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작은 물의 기억은 큰 물로 동화되면 사라진다. ‘나’는 메이를 잊지 않기 위해 운명을 거스른다. 동화가 작은 물의 죽음을 의미하고, 작은 물의 죽음이 이전 생의 망각을 의미한다면, 기억을 품은 작은 물의 고통은 어떻게 다루어야 하나?

“가장 예쁜 꽃잎들을 재료로 시름을 발명해 내는”3) 5월을 자신의 이름 삼은 메이. 메이는 ‘나’를 부른 그해 봄 자주 울었다. 메이의 내일이, 메이의 생일이 오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메이의 삶에 기입되기 위한 조건이라면, “가장 좋은 눈물은 가장 작은 눈물”이라면, ‘나’는 메이를 위해 메이의 존재를 바라는 일을 그만두어야 하나?

동화의 법칙은 다음과 같다: 더 작은 물이 더 큰 물에 동화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더 약한 온이 더 강한 온에 동화된다4). 바다의 깊이와 너비와 무게와 힘을 갖게 된 메이의 눈물은 통제력을 잃고 상실감에 잠식되어 해일을 일으킨다. 그는 이제 눈물로 이루어진 바다이므로,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는다.

‘나’에게 메이를 잃는다는 것은 단지 더 이상 메이를 만나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닐 것이다. 이미 ‘나’의 일부가 되어버린 메이를, 달리 말해 메이로 이루어진 ‘나’의 일부를, 메이가 거주하는 ‘나’의 가능 세계 전부를 잃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연극은 이 아포리아에 어떻게 대처하는가?5) 메이에 대한 그리움은 인물들 간의 극적인 화해로 봉합되지 않고, 메이의 자살 기도를 목도하는 장면으로 향한다.

 

사진: 김태리 제공: 안티무민클럽AMC

 

  ‘나’는 한겨울에 붉은 끈을 들고 산을 오르는 여자를 발견한다. 이 계절에, 저런 차림에, 저런 걸음걸이와 저런 속도로 걷는 여자라면 눈물인 그가 이미 아는 이일지도 몰랐다. ‘나’는 여자의 얼굴을 응시한다. 메이…… 메이의 얼굴이다. 메이는 붉은 끈 한쪽을 나뭇가지에 단단히 감고, 나머지 한쪽을 자신의 목에 감는다. 끝내 메이의 생에 무관심하던 달력의 붉은 동그라미를. 알려지지 않은 그 모든 기념일들을.

  메이의 목덜미에 붉은 동그라미가 내려앉자 ‘나’는 메이의 눈물이 마르지 않는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가 필요해진다. 눈물이 아닌, 눈송이로 다시 태어난다면……. 그리하여 폭설을 견디지 못한 나뭇가지가 부러져 메이가 다시 살아나기도 하는 세계가 태어난다면. 메이의 몸이 폭설 아래 파묻혀 봄이 오는 동안 거기 가만히 살아남기도 하는 세계가 태어난다면.

  ‘나’는 아래로, 아래로, 하강하며 메이의 눈동자를 끌어안는다. 눈송이들은 기억의 무게를 견디며 천천히 공중으로 흩날린다. 그것 하나하나의 가능 세계를 품고. 정지된 시간이 녹아내린다. 그것 하나하나의 아포리아를 딛고.

 

“한 방울의 내가

수렴하는 바다
얼어붙는 현재
내리는 가능성들과
증발하는 생

한 방울의 내가

끓는 고백
흐르는 기억
고이는 추억
흩어지는 과거

한 방울의 내가
가라앉는 결정
떠오르는 진심
터지는 물음

한 방울의 내가

흡수되는 고통
쏟아지는 약속
솟구치는 허기
젖어드는 한숨
밀려드는 비밀
쓸려가는 대화
굽이치는 피로
갈라지는 예감
파고드는 용서
쓰다듬는 절망

한 방울의 내가

맺히는 대답
톡톡
소리를 내며 튀어오르는
결말
비로소 잠기는 이해
깊이 소용돌이 치는
우리.” 6)

 

1) “낸 골딘, 사라짐에 저항하는 사람”, BAZAAR, https://www.harpersbazaar.co.kr/article/1865624(게재일: 2024년 6월 2일, 접속일: 2024년 6월 26일)

2) LDK 공간 소개, LDK Notion, https://ldkroomservice.notion.site/ldk-roomservice-8f3142f1850d4a53b9d5ac43b4129019 (접속일: 2024년 7월 16일)

3) ‘나’의 대사. 이하 큰따옴표 인용 출처 동일.

4) ‘온’은 물의 기억과 감정이 모여 뭉친 것으로, 이따금 물에 일어나는 비정상적인 움직임의 근원이다. 동화는 온들 간의 힘의 논리로 작동하는데, 이때 강함과 약함은 순전히 강도 차원의 의미다.

5) ‘아포리아(aporia)’란, 그리스어 부정사 ‘a’와 길을 의미하는 ‘poria’의 합성어로 난제를 의미한다.

6) 현호정 작, 〈한 방울의 내가〉 극본, pp. 14-­15. AMC 제공.

 

 

 

필자 소개

박주현

일기에도 맞춤법 검사기를 돌리고, 청탁 지면에 편지를 쓰는 사람. 「구멍에 빠진 자신을 들여다보는 여자: 배선희, 〈구멍난 밤 바느질〉」, 「도그 플레이와 동물화에 관한 소고: 비건 지향 퀴어 페미니스트의 BDSM 실천기」, 「동물 취급과 인간 대우의 경계에서: 서울우유 광고의 여성 동물 은유 읽기」, 「결국, 폴리아모리」 등을 썼다. bahkjoohyeon@gmail.com  

 

작품 소개


[한 방울의 내가]




출연 | 경지은 
작 | 현호정 
연출 | 우지안
안무 | 하은빈 
음악·연주 | 오정웅 
미술·의상 | 윤이람 
PM | 박종주
영상 촬영 | 김예솔비 박정연 
사진 | 전인 
‘작은 모래알’ 원안 | 하은빈
그래픽 디자인 | 정소영 
포스터 서체 | Velvetyne BianZhiDai
주최·주관 | 현호정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작·공동창작 | 안티무민클럽AM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