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5. 2. 17:51ㆍReview
구멍에 빠진 자신을 들여다보는 여자
배선희<구멍 난 밤 바느질>
글_박주현
1. 집이라는 극장
〈구멍 난 밤 바느질〉은 배선희가 사전 제공한 수기 약도를 따라 배선희의 집을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나는 약도의 존재를 완전히 잊고 관성적으로 카카오맵을 따라가다 불현듯 멈춰 섰다. 확대도 되지 않고 건물명을 속속들이 알려주지도 않는 구멍 난 약도에 의지해 걷다 보면, 지리라는 것에 대해 잠시 생각하게 된다. 배선희가 어떤 얼굴로, 어떤 속도로, 어떤 상태로, 어떤 생각에 잠겨 이 길을 걷고 또 걸었는지 지도는 말해주지 않는다. 반면, 배선희의 수기 약도는 시공간을 압축하여 최적의 지름길로 등 떠미는 대신 여러 경우의 수를 펼쳐 보인다. 지친 배선희, 슬픈 배선희, 기쁜 배선희, 풀 죽은 배선희, 죽고 싶은 배선희, 도망치고 싶은 배선희, 살고 싶은 배선희의 등 뒤를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배우의 집에 다다른다.
“빵 사러 나갔다 왔다. 계속 집에서 연극만 준비해서 힘든 것 같다. 일상과 연극을 분리시키지 않고 연극을 일상에 겹쳐보고 싶었는데, 종일 연극만 하고 있는 기분이다. 기분이 아니라 실제로, 집에만 있을 뿐이지 계속 연극을 하고 있는 것이다. […] 연습해도 연습대로 되지 않는 것을 준비하고, 준비해도 실패하는 것을 준비하고, 마음먹는 순간 후회로 돌아오고 마는 연극을 하고 있다.” 1)
배선희는 집과 극장, 일상과 연극을 가르는 대신 “누수로 얼룩진 벽지와 늙고 시끄러운 사물들 위에 극장을 포2)”갠다. 이는 배선희의 말대로 “연습해도 연습대로 되지 않는 것”이자 “준비해도 실패하는 것”이다. 최대 수용 인원이 다섯 명이라 열흘간 공연을 올려도 예매에 실패하는 사람이 생기고, 초행길을 헤매는 관객을 기다리느라 연극이 지연되고, 관객은 객석의 일부로 용해되지 못하고, 으레 침묵이 유지되어야 할 극장에 고양이가 찹찹찹 물을 마신다.
나는 배선희의 대사 톤이 세질 때마다 ‘시간이 늦었는데 이웃들은 괜찮나?’ 따위의 걱정을 늘어놓으며 연극배우를 이웃으로 둔 낡은 빌라 주민들의 호기심과 피로감을 상상하느라 진을 뺐다. 심장을 조여 오는 저릿함이 아니었다면, 속수무책으로 흘러내리는 눈물 콧물이 배선희의 연기 때문인지 배선희의 고양이 때문인지 영영 헷갈렸을 것이다. 3)고양이 이야기를 들려주며 고양이 털과 타액을 흘려 넣기. 물질과 이야기로 곤죽 만들기. 그것은 언제나 배선희가 만드는 연극의 일부였다.4)
2. 나빠지기만 하는 세계
배선희의 연극에는 ‘죽임’과 ‘죽음’ 사이를 진동하며 지금 여기에 살아 돌아오는 여성(적) 인물이 등장한다. 이들은 페미니즘적으로 주목할 만한 생존자 서사가 아닌, 불가역적인 ‘죽임/죽음’이라는 사건을 통과한 인물이다. 5)이 여성(적) 인물은 남겨진 사람의 사후적 회고를 통해 잠재적으로 복원되는 것이 아닌, 현재라는 시공간을 점유하는 물질로서 존재한다. 때로는 배선희의 몸을 빌려, 배선희와 마주한 관객의 몸을 빌려, 혹은 그 몸들 사이를 빌려.
물론 배선희의 여성(적) 인물이 모두 귀신도 아니고, 배선희가 괴담을 적극적으로 다루지도 않지만, 배선희의 연극은 어딘지 괴담적이다. 박상아는 일제 시대 괴담을 다루는 글에 “식민지 시대에 만들어진 괴담은 지배자가 스스로 밀어내고 회피하던 식민지 논리의 불합리가 회귀하는 존재들과의 대면이기도” 하였으며 “괴담이 된 식민지 타자들은 망각되지 않은 채 오히려 애써 외면하기 어려운 존재가 되어 그들의 기억의 사이를 끊임없이 비집고 들어”갔다고 썼다.6)
배선희는 남성 작가에 의해 토막 살해와 신체 재생을 반복하는 여자, 그런 자신을 빨리 죽여달라고 간청하는 여자, 살려달라고 비는 여자, 길을 잃은 늙은 여자를 연기하는가 하면, 여자가 바라는 방식으로 여자를 살리기 위해 여자를 죽이는 여자, 여자에게 도망치라고 소리치지 못해 죄책감에 시달리는 여자, 여자를 살리기 위해 노래를 부르고 시금치 커리를 끓이는 여자를 연기한다.
이 여자들은 모두 이 세계의 불합리와 불화하는 존재들이다. 세계가 점점 나빠진다면 나빠지는 세계를 지연시키기 위해 연극을 만든다는 배선희를 추동한 그 세계7) ─ 배선희의 여성(적) 인물은 바로 그 세계의 일면을 비춘다. 나빠지고 나빠져도 끝장나지 않기. 곤란한 만남에 구원을 걸기. 배선희는 그 과정에 관객을 연루시킨다.
3. 기억나지 않는 기억8)
소문이었는지, 꿈이었는지, 실제였는지 전혀 분간이 되지 않는 밤. 〈구멍 난 밤 바느질〉은 뚝뚝 끊긴 기억들을 기워내듯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나’는 동생이 택배 상자에 고양이를 넣어 온 어느 어린 날을 떠올린다. ‘나’는 울기 시작하는 고양이를 어떻게 달래야 할지 몰라 곤혹스러워한다. “바닥에 묶인 것처럼 전혀 움직일 수가 없어. 시간이 굳으면서 점점 더 딱딱해지고 있어. 곧 모든 게 우리를 때릴 거야.”
고양이의 울음소리는 ─ 갓난아기의 울음소리를 닮았다 ─ 정지된 사물 같은 세계를 할퀴고 상처 입힌다. 아빠가 한밤중 옥상에 올라 집어던진 것은 고양이의 육신만이 아니다. 자신의 거의 유일한 저항 수단이었을 울음소리가 멎을 때, 어린아이는 아빠라는 세계의 규율을 익힌다. 그러나, 그 세계의 규율을 냉소하며 구멍 난 밤을 꿰어 온 여자아이는 안다. 고양이는 반드시 복수하러 돌아온다는 사실을.
창문이 열리고, 창틈으로 바람이 든다. 방안의 사물들이 조금씩 구겨지거나 흐트러진다. 9) 고양이는 복수할 대상을 찾아 헤매는가 싶더니, 그대로 ‘나’의 다리에 몸을 부빈다. 고양이의 무게와 체온… 그것이 고양이의 복수인가? 현호정의 문장을 떠올린다. “당신은 저에게 벌을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에게 반드시 용서할 것입니다. 그게 제가 당신에게 주는 죄입니다. 복수는 쉽지 않을 겁니다.” 10) 복수만이 자신의 존재 증명이었을 이들의 구멍 난 밤이 지상을 내려다본다.
1) 배선희, “읽기를 중단하는 것”, 〈구멍 난 밤 바느질〉 비하인드 다이어리.
2)배선희 트위터, https://x.com/poeongeemom/status/1759405721157071089 (게재일: 2024년 2월 19일, 접속일: 2024년 4월 26일)
3)나는 고양이 알러지 때문에 공연 전 배선희에게 지르텍을 받아 먹었다.
4) 〈조금 쓸쓸한 독백과 언제나 다정한 노래들〉에서 배선희는 하나를 위해 만든 시금치 커리를 다회용기에 담아 주었다. 극장을 나서는 누구도 손에 들린 시금치 커리를 낯설게 먹었을 테다. 언니가 장을 보고, 야채를 손질하고, 볶고, 끓이고, 식히는 과정을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시금치 커리를 삼키는 동안 배선희의 이야기가 나의 내장 기관을 타고 흘러 내려가는 것을 알았다.
5) 〈조금 쓸쓸한 독백과 언제나 다정한 노래들〉은 자살 고위험군인 하나를 살리기 위해 언니가 분투하는 이야기로 읽히는가 하면(진송, 「너를 살려도 될까?」) 언니가 하나를 살리기 위해 시도하고 싶었던 ─ 그러나 차마 조심스러워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던 ─ 모든 행위를 하나가 떠난 다음에야 비로소 실행에 옮겨 보는 이야기로도 읽혔다. 머릿속으로는 수천수만 번 실행해 보았던 모든 것. 그렇다고 그 자리에 하나가 없었느냐 하면, 바람이 불지 않음에도 제힘으로 흔들리는 빈 종이, 메모가 적힌 책, 끓는 물과 수증기, 노랫소리, 침묵, 카레 냄새… 그 모든 것이 하나를 이루는 일부 같았다. 나는 배선희를 바라보는 나 자신이 하나인 것도 같았다. 언니의 노력이 슬프고, 고맙고, 가엾고, 사랑스럽고, 안쓰러운 동시에 그 모든 행위가 언니 자신을 살리기 위한 행위라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6) 박상아, “‘괴담(怪談)’을 이야기하기”,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https://kugnews.tistory.com/496(게재일: 2023년 4월 15일, 접속일: 2024년 4월 23일)
7) 정혜린, “깊게 듣는 연습 배선희”, 한국예술종합학교 웹진 48호, https://art.karts.ac.kr/magazine/48/artist-2.html(게재일: 2023년 12월 27일, 접속일: 2024년 4월 30일)
8) 〈구멍 난 밤 바느질〉 대본집, 쪽수 미상.
9) 위와 같음.
10) “[2024 여성의 날] 죄를 빌고 용서를 짓네 벌하고 사라지는 이 있네 - 현호정 소설가”, 채널예스, https://ch.yes24.com/Article/View/55272(게재일: 2024년 3월 8일, 접속일: 2024년 4월 29일)
필자 소개
박주현
프리랜서 무용수 및 안무자. 무용 전공자가 아닌 아마추어 무용수들과 비/무용수의 경계를 탐구 중이다. 콜렉티브 매듭의 〈몸 풀기〉를 공동 기획하였으며, 『Without Frame! Vol.2: Trash Can 나의 힘은 쓰레기통이다』, 『물결 2022.봄호 : 교차성X비거니즘』을 공동 저술하였다. bahkjoohyeon@gmail.com
작품 소개
[구멍 난 밤 바느질] 일시 : 2024.03.01 ~ 03.10. 20:00 (03.06수요일 공연 없음)
장소 : 종로구 창신 골목 시장과 봉제 공장 골목을 지나 배우의 집에서 낙산까지 기획,작,출연 : 배선희 기록 사진,영상: 장태구 주최, 주관 : 배선희 |
본 리뷰는 2024년 거리예술·서커스 창작지원사업 선정작-2024년 서울문화재단 거리예술·서커스창작지원사업 선정 프로젝트 <일상공간예술비평:잇몸 잘 쓰기>-의 일환으로, 서울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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