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문화창작집단 날 「반도체소녀」- '당신들만의 정의(正義)'


문화창작집단 날 「반도체소녀」
- 당신들만의 정의(正義)


글_ 강여사



                               




1. 삼성을 생각한다.

1월 11일, 삼성전자 LCD 사업부 천안공장에서 일하던 김주현(26)씨가 회사 기숙사에서 투신자살했다. 이에 앞서 3일에는 같은 사업부 탕정공장의 박모(23)씨가 투신자살했다. 지난 해 2010년 11월 26일엔 삼성 사내 전산망에 노동조합을 만들자는 글을 올린 박종태 대리가 해고됐다. 그 전 11월 14일엔 삼성반도체에서 엔지니어로 일하였던 주교철씨가 백혈병으로 사망했고, 그보다 이른 봄 3월엔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서 일하던 박지연(23)씨가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주교철씨의 사망으로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사망한 이는 총 10명이 되었으며,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 에 따르면, (2010년 7월을 기준으로) "삼성반도체, 삼성LCD, 삼성전기 등 삼성에서 발생한 많은 백혈병 피해자를 비롯한 직업병 피해노동자들의 제보는 60여명에 이르렀다.” (관련기사 링크)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죽은 이들의 사연은 뉴스에 희미하게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들의 죽음을 둘러싸고 유가족과 삼성 사측 사이에 여러 공방이 있었지만 이 역시 언론의 수면 위로 또렷이 드러나지 못하고 다시 가라앉았다. 이러한 논란들 속에서 네티즌들의 마음을 자극한 건 ‘스무살 꽃띠에 백혈병에 걸려 죽음을 맞이한 어린 여성들’의 사연이다. 이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그들 죽음의 본질을 가려버리고, 그저 하나의 안타까움으로 죽음을 애도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렇게 애도하기엔 이들의 죽음은 뭔가 석연찮은 부분이 있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삼성’ 반도체에서 일하다 죽었지만, 그들의 죽음은 산업재해로 인정받지 못했고, 유가족은 회사로부터 끊임없는 회유와 협박을 당해야만 했다.

‘삼성’은 대한민국 20대 청년들이 취업하고 싶어하는 대기업 중 하나이며, 삼성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도는 매우 높다. 여러 부분에서 분명 ‘삼성’은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이다. 2010년, 김용철 변호사가 쓴 『삼성을 생각한다』가 출간되고, 삼성불매운동이 일어났다. 삼성에 대한 사회의 비판적 시각이 확장되기 시작했고, 그 해 말 『굿바이 삼성』이 출판되었다. 이 책은 오늘날 삼성이라는 대기업이 행하는 부정부패에 대해 일차적으로 분노하고 비판하는 것을 넘어, 대한민국 사회에서 삼성을 비판하고 생각하는 것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한 성찰적 자세를 보여준다.

그러나 여전히 대한민국 대부분의 사람들은 삼성의 ‘또 하나의 가족’이 되길 희망한다. 삼성 역시 ‘우리에게’ 말한다. ‘삼성’은 ‘또 하나의 가족’이라고. 그렇게 삼성은 ‘가족’의 모습으로 도둑처럼 다가와 우리를 착취하고 비인간적인 일을 저지른다.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삼성의 말 속엔 아이러니한 폭력이 숨어있다.

 




2. 유령이 되어 떠도는 무대 위, 죽은 언어, 죽은 갈등

연극 이야기에 앞서, 삼성을 생각하게 된 이유는 본 연극 <반도체소녀>가 삼성 반도체의 첫 피해자 고(故) 황유미씨에게서 모티브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연극 무대는 새하얗게 질려있다. 그곳에 하얀 옷을 입은 소녀가 유령처럼 걸어 다닌다. 소녀의 독백과 호스피스, 둘의 대화는 마주하지 않고 엇나간다. 소녀는 무대 위에 홀로 존재하지 않지만, 소녀의 말을 받아주는 이는 없다. 죽은 소녀가 저승에 가지 못하고 이승에 유령처럼 떠돌 듯, 소녀의 말은 극 중 누구의 대사와도 함께 하지 못하고 극에서 자꾸 엇나가고 떠돈다. 작가는 이를 ‘시적 운율’로 풀려고 하였으나, 현실의 구체성과 맞닿지 못한 말은 무대 위에 붕 뜬 채로 관객에게 닿지 못하고 사라진다. 소녀 자신이 죽었듯 그의 독백도 무대 위에서 ‘죽은 말’이 된다.

두 커플이 있다. 그들의 삶은 평범해 보인다. 병원에서 죽어 가는 이들을 돌보는 호스피스 정민과 현재 비정규직으로 정규직을 꿈꾸는 공장 노동자 동용의 커플. 그리고 대기업에 들어가고자 염원하는 대학원생 세운과 부당해고를 당해 복직 투쟁을 하는 여자친구 혜영. 세운이 들어가고자 하는 대기업은 그의 누나 호스피스 정민이 간호했던 죽은 소녀가 일한 곳으로 현실 속에서의 ‘삼성’을 가리킨다. 또한 끝내 과로사하는 공장 노동자 동용이 일하는 곳은 (기아차 모닝을 만드는 사내하청업체) 동희오토를 상징하며, 복직 투쟁을 하는 혜영의 직장은 재능교육을 상징한다. 이 연극은 재능교육, 동희오토, 삼성 등 비정규직 문제로 불거지고 있는 사회의 이면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극 속 이 곳 저 곳에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등장하는 ‘멀티맨’은 사회 한 곳에 오래 적을 두고 살아가는 삶이 아닌, 일시적이고 비정규적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네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 연극은 혜영이 복직투쟁을 위해 외롭게 들고 나오는 투쟁 피켓처럼 어떠한 은유도 없이 직설적으로 하고 싶은 말들을 뱉어낸다. 그런데 왜일까. 어두운 객석에 앉아 연극을 보는 내내 나는 불편했다. 극장 밖 현실을 극장 속에서 마주 대함이 불편한 것도, 그 불편한 현실에 소극적인 내 자신이 부끄러워서 불편한 것도 아니었다. 이것은 다른 종류의 불편함이었다.

애초에 이 연극은 하나의 답을 가지고 있었고 연극의 러닝타임은 그 결과로 귀속해 들어가는 시간이었다. 이 연극은 정의(正義)는 무엇이고 부정의(不正義)는 무엇인지에 대해서 묻지 않는다. 이미 정의의 내용은 정해져 있다. 이 연극은 사회 현상을 보여주고 이것이 과연 옳은지 관객에게 물어보고 그에 대한 사유를 하게끔 하지 않는다. 그들이 결정해놓은 사회적 정의를 관객들에게 ‘의식화’시킬 뿐이다. 분명 이로 인해 연극은 뚜렷한 주제 의식과 목적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 연극이라는 문화예술의 형식을 취해 관객에게 다가갔을 때 가질 수 있는 심리적 공감의 보편성은 얻기 힘들어졌다.

이 연극에는 그들이 정의라 생각하는 것에 반(反)하는 안티테제의 인물이 없다. 안티테제처럼 ‘보이는’ 인물(세운)은 있지만, 그는 자신의 생각을 가진 주체적 인물이라기보다 공연 내내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이는 인물이며, 심지어 마지막에 가서는 너무나도 쉽게 자신의 입장을 접는 인물이다. 이 인물은 연극이 말하는 ‘정의’에 반하는 인물로써 그려졌다기보다 그들이 말하는 정의를 더더욱 굳건히 긍정하기 위해, 증명하기 위해 필요한 인물이었다. 이는 마지막에 그가 이제까지 부정하고 혼란스럽게 여겼던 것들을 너무 쉽게 긍정함으로써 다시 한 번 증명된다. 이 연극이 불편한 이유는 이것이다. 연극 속에는 여러 명의 인물이 등장하지만, 이 인물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 그들은 겉으로는 서로 다른 얼굴을 지녔지만 똑같은 목소리로 작가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마치 작가의 마리오네트처럼, 작가의 대변인처럼. 어떻게 모두가 동일한 이야기만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이따금씩 어색하다. 배우 자신의 입에 맞지 않는 대사가 연기의 어색함으로 무대 위에서 쏟아진다. 작가가 의도했을 대사의 엇박자를 통한 시적운율도 연극에 리듬감을 더하기보다 어색함을 더할 뿐이었다.

안티테제의 인물로 ‘보이는’ 이, 세운은 연극 속에서 애초에 낯선 인물로 상정이 되어 있다. 정해져 있는 ‘정의’에 동의하지 않는 그는 높은 학력을 지녔지만 비겁하고 정의에 눈뜨지 못한 무지한 인물이다. 그에게 ‘자유로운 인간에 대해 생각해보라’며 마르크스의 『자본』과 『공산당 선언』을 이야기하는 교수는 이 시대의 행동하는 ‘지식인’을 대표하는데(실제 오세철 교수를 모델로 했다), 이 둘은 분명 갈등관계에 놓여있는 듯 보이나, 무대 위 그들은 동등한 갈등의 입장을 가지지 못한다. 교수는 이미 진리를 체득한 듯 보이고, 세운은 그러한 입장에 서 있는 교수의 말과 이미 투쟁의 현장에 가 있는 여자친구 혜영이 하는 말에 불편해하고 그 불편함 속에서 혼란스러워할 뿐이다. 이렇게 보면 이 연극은 ‘갈등’조차도 주제의 직설적 드러냄을 위해 ‘도구화’시킨 느낌이다.

연극은 테제와 안티테제가 치열한 갈등을 통해 진행되는 과정이어야 한다. 하나의 주제의식이 있다고 해도, 모두가 그 주제의식에 동참하여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그 자체로 연극적인 자세가 아니다. 연극 속 인물들이 모두 하나의 목소리를 낸다면, 그것은 결국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선전 ․ 선동하는 도구일 뿐, 예술도 심지어는 (작가가 드러내고자 했던)정치적 자세도 될 수 없다.

 



3. 관객의 사유를 마비시키는 연극

연극 <반도체 소녀>는 이 사회는 부조리하고 부정의하지만 나만은(이 연극 속에 나오는 ‘그들’) 정의롭게 싸워나가고 있다는 극단의 순결을 보여주고, 당신도 이에 동참하여야만 한다고 강요하는 것 같다. 잡티 하나 묻어있지 않을 것 같은, 조명을 받아 더욱 새하얗게 보이는 무대 공간이 그것을 시각화한다. 공연 팜플렛 사진에서 등장인물 모두가 걸치고 있는 새하얀 옷들처럼, 무대 위 그들은 순결하다. 그들은 사회적 정의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으며, 이를 객석에 앉아 있는 관객들에게 가르친다. 관객들은 자기 생각을 가진 주체적 시민이 되기는 커녕, 그들에게 계몽당하는 하나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이 연극은 사유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렇게 이 연극은 관객의 사유를 마비시킨다. 사유하는 이들은 ‘그들’이며, 그들로 인해 ‘정의’는 구축되어지고, 관객은 그들이 말하는 정의에 이제 ‘동참’하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이 연극은 위험하다. 거칠게 말하자면, 이 연극은 기존 운동권의 보수성과 한계성을 드러낸 작품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분명했으나 스스로의 정의에 대한 명료함과 감정 호소에 도취되어 이것이 관객과 함께하는 ‘연극’이라는 것을 망각했다.

오늘 날 문화예술은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선포하는 도구가 아니다. 그러한 문화예술은 폭력일 뿐이다. 작품은 무대 위 배우를 통해 관객에게 전달되는 그 순간, 관객과 공유해야 하는 과정 속에 놓여있는 또 하나의 과정이 된다. 창작자들의 손에서 떠난 작품을 해석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오늘 날, 관객은 무대 위 작품을 보고 카타르시스만을 느끼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다. 관객은, 우리는 연극을 보고 ‘사유’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연극을 통해 연극만을 사유하지 않는다. 극장 밖을 나갔을 때, 연극의 거울이었을 이 세계를 사유하며 비판할 수 있는 권리를 관객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연극은 관객을 그러한 자유로운 존재로 두지 않는다. 그리하여 객석에 앉아있던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난 이 연극이 매우 불편했노라 이야기 하겠다.

이 연극이 진지한 연극인가? 그렇다. 삶에 대한 가벼움이 대학로 극장을 채우고 있는 현실에서 이 연극은 분명 ‘소중한 연극’이라 답하겠다. 그러나 누군가가 “이 연극이 관객에게 ‘좋은’ 연극인가?”라고 내게 묻는다면, 난 “아니다”라고 답하겠다. 난 관객들에게 이 연극은 위험하다고 말할 것이며, 이 연극을 만든 이들에게는 자신들만의 독단에 빠지지 말아달라고 부탁할 것이다.





* 인디언밥에서 반도체소녀의 초대이벤트를 진행중입니다. 많은 참여 부탁드려요.


문화창작집단 날 - 반도체소녀
2010 1211 - 0130 연극실험실 혜화동 1번지

정민과 세운은 자신의 미래를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남매다. 정민은 동영과의 관계에서 임신3개월을 맞이하고 결혼을 준비하고 있으며, 대기업에 취직하고 싶은 세운은 대학원을 다니며 연인인 혜영의 격려 속에서 취업을 준비하고 있다. 그들의 일상은 힘겹지만 작은 희망을 품고 하루를 산다.

 

그런 정민이 호스피스로 일하고 있는 병원에서 백혈병 말기로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젊은 여자를 담당하게 된다. 정민에게 그녀는 단지 환자이며 일일 뿐이다. 그러나 그녀가 죽음을 맞이하면서 정민도 내적으로 변화를 겪게 된다.

 

세운은 혜영의 조언으로 평소 자신이 듣던 수업과는 성격이 다른 강의를 듣게 되지만 담당 교수에 대해 비판적이다. 그런 교수가 그에게 던지는 본질적인 질문들에 세운 또한 진정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정민과 세운에게 그들의 일상을 무너트리는 일이 벌어진다. 작은 일상의 안락함을 꿈꾸던 정민과 세운은 이 과정 속에서 각자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정민의 환자였던 반도체 소녀는 정민의 자화상이었고, 세운 자신이 비판했던 교수의 말이 사실 자신에게 가장 필요하다는 사실을, 그리고......




문화창장집단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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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_ 강여사
연극이 좋아 시작한 연극에 대해 '무엇을 위해, 왜,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와 늘 부딪힌다.
연극과 문화예술로 사회와 만나기 위해 천천히 움직이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