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 31. 15:50ㆍReview
제 7회 아시테지 겨울축제
어린이 연극, 이게 최선입니까?
글_ 정진삼
극단 외치는 소리 「미술관은 살아있다 - 렘브란트 편」
극단 외치는 소리 - 미술관은 살아있다
매년 여름과 겨울, 아시테지 연극축제를 찾습니다. 올해도 역시 많은 아이들이 극장 로비를 메우고 있었습니다. 추운 날씨는 괜한 걱정이었나요. 아르코 소극장의 로비를 돌아다니는 로봇인형은 아이들의 눈길을 잡아끕니다. 이번에 선택하여 관람한 공연은 <미술관은 살아있다 - 렘브란트 편>이었습니다.
“OO는 살아있다” 시리즈는 고정되고 박제된 전시 공간으로서 미술관, 박물관, 음악회가 아니라, 살아 숨쉬는 예술품, 문화재의 동시대적 체험을 의도한 기획이겠지요. 다른 예술 장르를 쉽게 끌어들일 수 있는 연극의 속성을 살리고, 아이들의 교육적인 면까지 고려한, 한국형 어린이 연극 같았습니다.
공연은 극중 극의 형태로 진행됩니다. 미술관(?)에 도둑이 들어 렘브란트의 그림을 훔쳐서 달아나고, 곧이어 렘브란트 선생님에게 그림을 배우러 온 학생이 렘브란트 선생에게 도난당한 그림의 사연을 듣는다는 내용이었지요. 그 사연은 성경에서 나오는 “탕자” 이야기였습니다. 그 이야기가 극 속의 극, ‘그림자극’ 으로 펼쳐지는 것이지요. 즉, 작품의 핵심은 렘브란트의 그림을 어린이들에게 들려주는 것이었습니다. 연극 무대에서 보기에는 다소 단순하고 짤막한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이 들었지요. 집을 나가 방탕하게 살다가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아버지의 이야기는 한국의 어린이들이 듣기에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져서 더 그런가요. 성경에서도 ‘비유’ 로써 제시되는 그 스토리는 ‘지금, 여기’에서 너무도 뻔한 소리로 들려옵니다. 기성의 도덕률인 ‘효(孝)’ 의 가치가 포장만 달리 한 채 무대화된 셈이지요. 어린이 연극인데 너무 따지냐구요. 따질 것은 그 뿐만은 아닙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강조한 드라마와 그림을 도둑맞은 렘브란트의 스토리 간의 상관관계 없는 극중극 구조는 둘째 치더라도 허술한 드라마를 ‘노래’ 로 정리하고 넘어가려는 진행, 불안한 가창력과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가사, 액자와 비뚤게 맞추어진 조명 등등 무대를 채운 연극의 제반요소들은 조금씩 어긋나 있었습니다. 어린이 연극인데 좀 완벽하지 않으면 안되냐구요. 어린이라서 무시하는 건 아니겠지요. 연극은 무대예술의 속성상, 형식을 연마할수록 효과가 완벽할수록 그 존재의 매력이 더해지고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악역이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면 오히려 그 배역에게 공감하게 되고, 노래를 잘 부르면 무대 위 그 가수에게 빠져들게 되는 것처럼 말이지요. 평범한 의미도 멋지게 바꾸어 놓는 것이 바로 작품의 ‘완성도’입니다.
물론, 세편의 유명한 그림들,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 <모나리자>, <반고흐 자화상>이 무대를 채우고 있었을 때만 해도 기대는 대단했습니다. 소녀의 눈동자가 굴러가고, 모나리자의 손이 움직이고, 연기가 피어오를 때, 말 그대로 미술관이 ‘살아있는’ 느낌도 나름 재미있었습니다. 렘브란트가 빈 스케치북을 마술처럼 그림으로 가득 채웠을 때도 아이들의 탄성도 반가웠지요. 허나, 작품은 미진한 완성도로 어린이들의 부푼 기대에는 응답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렘브란트가 ‘빛과 어둠’ 의 화가라면서, 그 이유 하나도 제시하지 못했으니, 딱히 교육적이지도 못했네요. 다만, 관객들은 자기 자신을 길러준, 그리고 사랑해준 부모님이 고맙고 소중하다는, 정답같은 메시지를 답습하고 맙니다. 어린이 연극인데 메시지가 거기서 거기일 수밖에 없다구요. 디즈니에서 아이들을 겨냥하여 만든 요즘의 상업적 애니메이션도 로봇과 인간의 조화 문제, 노년의 문제, 음식의 낭비 문제 등등 다양한 현대 사회의 가치들을 논합니다. 게다가 가끔 ‘재미있고 감동적’ 이기 까지 하지요. 영상과 테크놀로지 미디어에 익숙해진 요즘의 아이들에게 ‘연극’ 장르가 어필하려면, 마술 같은 시각적 현혹, 뮤지컬을 흉내낸 정서적 고양, 그림자를 이용한 빛의 효과 정도로는 어림없을 것입니다. 교육적인 목적을 앞세워 다양한 볼거리를 안겨준 공연이었지만, 못내 아쉬웠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뒤 늦게 허겁지겁 내려온 극장의 진행요원들도 실망스러웠습니다. 어린이 연극이라 적당히 해도 되는 것은 아닐텐데요.
어린이 연극은 어린이가 직접 연극을 고르거나 입장료를 지불하지는 않습니다.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누군가에 의해 공연과 만나게 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어린이와 함께 하는 부모, 친척, 선생님들은 일종의 큐레이터이자 가이드 혹은 비평가가 되는 셈입니다. 그들의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역시나 한결 같을 것입니다. 재미있었으면 좋겠고, 교육적이었으면 더 좋겠다. 아이들이 만족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는 실망스런 작품을 만났을 때 더욱 처참한 것이 됩니다. 어린이 연극은 ‘재밌는’ 놀이이면서, ‘현명한’ 교육이기까지 했으면 하지만, 한편으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어린이 연극도 엄연한 ‘예술’ 작품이라는 점. 미학적, 연극적 완성도가 결국 교육적 가치를 보장하고, 놀이의 즐거움을 만든다는 사실. 어린이들도 어른과 마찬가지로 세련된 것, 아름다운 것에 반하고, 또한 여기서 품위와 진지함의 가치를 배우기도 하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창작자들, 관계자들 조금은 분발해야 되겠습니다. 어린이 연극을 보고자란 세대가 나중에 한국 연극을 다시금 보게 되고, 또 그들의 아이들을 극장에 데려오기 위해서는 말이지요. 작품에서 말하듯, 어린이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그림”이니까요.
에스토니아 - 극단 피프와투트 「내 친구 피프와 투트」
며칠 지나고 다시 찾은 아르코 소극장. 이번에는 해외작품인 에스토니아의 <내 친구 피프와 투트>입니다. 여전히 소극장의 로비엔 아이들로 북적거리고, 로봇인형이 아장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아르코 소극장 로비 앞 재활용 로봇
연극이 펼쳐지는 공간은 텅 빈 무대. 이번에는 미술관이 아니라 콘서트장, 곧 있으면 시작될 음악회랍니다. 청소부 피프와 투트가 등장합니다. 이들은 청중들과 마찬가지로 음악회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 있습니다. 작품은 무대 위에서 이들이 빠져나가지 못하고 정중앙에 섰을 때 시작됩니다. 관객들이 모두 자기를 보고 있다며 화들짝 놀라는 피프의 말. 그제야 아이들은 웃음이 터지기 시작합니다. 투트와 피프의 우스꽝스런 행동과 바보같은 몸짓이 너무나도 진지하고, 천연덕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이 공연은 피에로 같은 두 명의 배우들이 보여주는 슬랩스틱 액션과 간단한 묘기, 아크로바틱 등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광대들의 놀이’ 였습니다. ‘전형적’ 이라는 말이 이 연극을 조금은 ‘뻔한’ 작품으로 이해하게 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광대들의 묘기는 한번쯤 어디선가 본 듯한 기술이었고, 아크로바틱도 아주 뛰어난 신체적 기예는 아니었으며, 슬랩스틱 연기도 심형래 감독이 <라스트 갓파더>에서 보여주고 있는 그런 정도였으니까요. 허나 이 연극의 매력은 광대들의 모든 연기와 묘기를 관객들과 함께 한다는 점입니다.
맛보기로 보여준 이들의 혀 잡아 빼기 놀이, 날리는 종이 묘기 등등은 관객들에게 소소한 재미와 웃음을 주었습니다. 아이들이 집에 가서 이들을 흉내 낼 상상을 하니까 더욱 유쾌해지더군요. 그 다음에 이어지는 묘기는 물을 쏟아지지 않게 하는 컵 묘기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피프의 머리 위에서만 물이 쏟아지고 말지요. 자꾸만 당하는 피프는 투트에게도 물을 뒤집어쓰게 하려고 복수를 계획하지만 빗나가고, 결국 더 큰 물을 뒤집어쓰게 되지요. 관객들은 투트의 계획의 공모자가 되어 킥킥댑니다. 단순한 내용이라 언어가 달라도 모두가 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서커스를 전공한 두 광대들의 주 종목인 ‘아크로바틱’ 은 아찔한 신체 묘기 대신, 유연한 아이들도 함께 할 수 있는 아크로바틱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두 광대가 먼저 시범을 보인 뒤 무대로 어린이 관객들을 불러들입니다. 어린관객이 어릿광대가 되는 셈이지요. 무대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까불이 남자 어린이 관객에서, 수줍게 인사를 하던 여자 어린이 관객까지 모두 서커스 주자가 되어 멋진 아크로바틱을 선보였습니다. 무대 위에 호명된 것은 아이뿐만이 아닙니다. 어린이의 잔치에서 은근히 소외감을 느낄법한 아빠도 뻣뻣한 몸으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 큰 박수를 받았습니다.
에스토니아 극단 피프와 투트
두 광대들은 결국 객석을 무대로 탈바꿈 시킵니다. 이 공간이 음악회장임을 상기시키고자 투트는 지휘자가 되어, 관객석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즉석에서 합창을 시작합니다. 오히려 이젠 투트가 관객이 되어 광대가 된 우리들을 감상하고 있네요. 잘할 필요도 없고, 열심히 할 필요도 없는, 단지 즐기기만 하면 되는 음악회에서 어린이들은 전혀 스트레스 받을 일 없이 멋지게 음악회를 마무리합니다. 그리고 이제 두 광대들과 작별할 시간, 그들은 끝까지 슬랩스틱의 임무를 완수하고자 좁은 문에 긴 대걸레가 걸려서 통과하지 못하는 ‘몸 개그’를 선보입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간단한 청소 도구와 음악, 그들의 신체 묘기와 광대놀음만으로 빈 무대를 가득 채웠습니다. 그 와중에 아이들에게 무조건 감추려고만 하는 남녀간의 성(性)적인 코드를 절묘하게 풀어낸 점이나, 아이들끼리 사소한 것으로 싸웠을 때 서로 화해하는 방법도 은연중에 전달되었습니다. 직접적인 가르침이나 교훈 없이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무대였지요. 이국에서온 광대들과 적극적으로 통한 당사자들은 거의 어린이들이었습니다. 어린이들은 언어(영어)는 물론이고, 몸짓, 소리, 눈빛 등등으로 광대들과 실시간으로 소통했습니다. 이번 공연에서만큼은 그들의 존재감을 성인 관객들에게 어필했지요. 참으로 근사한 경험이었습니다.
어린이 연극에서 ‘어린이’ 라는 말은 연극에서 누가 주체인가를 나타내는 중요한 용어가 됩니다. 보는 관객층이 누구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린이가 ‘관객’ 주체가 되고 또 연극을 ‘만들어가는’ 주체가 되는 연극이라는 점이 중요하겠지요. 한국 공연은 실망스럽고, 외국 공연은 대단했다는 리뷰가 되어 다소 마음이 아픕니다. 허나, 어린이 관객들을 극장에서 주눅 들게 하지 않고 뛰어놀게 만드는 공연이 더욱 가치 있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창작자로서, 그리고 동반자로서 ‘연극’ 을 어린이 쪽으로 몰아붙이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과 연극을 잘 어울리게 하는 일이 중요하겠지요. 아쉽지만, 저 역시도 정답 같은 뻔한 메시지로 아시테지 겨울 축제의 리뷰를 마칩니다. 좋은 어린이연극 만세.
제 7회 아시테지 겨울축제
2011 0108 - 0116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대학로 스타시티, 예총회관
아시테지 코리아는 온 가족이 다 함께 즐길 수 있는 겨울철 공연문화체험축제로서 여름에 비해 다소 침체되어 있는 국내의 아동극에 활기를 불어넣고자 2004년부터 서울 아시테지 겨울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서울 아시테지 겨울축제는 현재 국내 최대의 겨울철 가족극 축제로, 국내 아동청소년 연극계의 질적 향상과 국내 아동청소년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대외적으로 해외시장에 국내작품 진출의 발판을 마련함과 동시에 국제 아동청소년연극 교류의 터미널 역할을 하고 있다.
www.assitej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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