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죽음의 사랑 상사화로 피고 지고 - 극단 여행자 「상사몽」

2011. 3. 24. 16:02Review

죽음의 사랑 상사화로 피고 지고
- 극단 여행자 「상사몽」


글_ 앨리스

 

 


작자미상의 한국 고전소설 ‘운영전’이 연출가 양정웅을 만나 ‘상사몽’으로 각색되어 관객과 만났다. ‘상사몽’으로 무대에 오른 것은 이번이 네 번째로 2007년 극단 여행자가 이미지 극으로 첫 선을 보인 바 있다.

특히 이번 공연은 대학로 우수작품 인큐베이팅 프로젝트로 기획되었으며 기존의 실험적 작가주의와 달리 원작소설의 서사구조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원작 운영전은 주제가 권선징악인 여타 고전소설과 달리 조선시대 궁녀 운영과 김 진사 간의 신분을 뛰어넘는 지고지순한 비극적인 사랑을 다룬다.

유영이라는 선비가 꿈에서 운영과 김진사에게 직접 들은 사랑의 이야기를 전하는 서사구조여서 운영전은 수성궁몽유록 또는 유영전이라고도 불린다. 유영이라는 선비를 내세워 운영과 김진사의 사랑을 전하는 두 겹 서술 구조의 액자 형 구성이 특이한 우리 고전소설을 양정웅은 극단 여행자와 함께 충실하게 무대에 되살려놓았다.

액자형의 사각형 무대와 수직으로 서있는 거대한 벽은 외부세계와 단절된 수성 궁의 세계를 상징하고 무대 앞에 덧붙여 놓은 모래상자 단과 무대 위의 직사각형 모래밭은 시를 쓰는 화선지이기도 하고 운명적인 사랑의 시발점이 되는 먹물로도 쓰이고 동시에 역사와 인생의 무상함을 심상하게 드러내는 매체가 되기도 한다.


무대에 조명이 켜지면 객석에서 선비 유영이 술병을 들고 나타나 모래상자 단에 오른다.


메인무대에 운영과 김 진사가 등장하고 관객은 유영과 함께 그들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든다. 시로 풀어가는 이들의 사랑 이야기는 궁녀 열 명을 데리고 수성 궁에 시의 왕국을 건설하려했던 안평대군으로부터 시작된다.


    ‘하늘이 재주를 내리시매 어찌 남자에게만 넉넉하고 여자에게는 인색하게 하셨을 리 있겠느냐?’

세종의 셋째 아들로 학문을 좋아하고 시문·서·화에 두루 능했던 안평대군은 이같이 말하며 궁녀 중 나이 어리고 용모가 아름다운 열 사람을 뽑아 외부세계와의 접촉을 차단하고 불철주야 문장 공부에만 매진하게 한다. 궁 밖으로 나가거나 외부 사람을 만나는 것은 바로 죽음을 의미했다. 안평대군은 궁녀들로 하여금 오직 시만을 위해 정진할 것을 맹세하게 한다.


궁녀들은 과연 안평대군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으며 당대 이름 꽤나 알려진 문장가들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시의 세계가 고매하고 격조가 높았다. 그러나 열 사람의 넘치는 재주는 안평대군이 세우려는 순수시라는 왕국의 제단에 쓰일 제물일 뿐이었다.


 

깊디깊은 궁궐 안에 갇힌 푸른 젊음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을 저당 잡힌다. 한편 운영이 수성 궁을 찾아 온 소년 유생 김 진사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고 우여곡절 끝에 다른 궁녀들의 이해와 절대적인 도움을 받아 김 진사와 목숨을 건 사랑을 나누면서 안평대군의 순수시를 향한 탐미적 열망은 부서져 내린다.
 

    ‘시는 진정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서 가리고 숨길 수가 없는 법이다’


푸른 연기를 주제로 시를 지어보라는 대군의 명에 따라 지은 운영의 시에는 그의 말처럼 연인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 나왔고 수성 궁에 와서 지은 김 진사의 시에도 연정이 우러나와 결국 운영과 김 진사의 사랑은 더 이상 비밀이 될 수 없었다.




 

두 사람의 사랑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대군의 노여움이 극에 달해 운영의 목숨이 위태로워진 순간, 아홉 명의 궁녀들은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운영의 목숨을 살려주길 간청한다. 궁녀들의 심미적 현실 인식이 실천적 이성으로 나아가며 빼앗긴 인간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특히 지란은 당당하게 말한다. 하늘을 나는 새도 제 짝이 있는 법인데 우리 궁녀들은 산인도 아니고 중도 아니면서 이 깊은 궁에 갇혀 세상을 멀리하고 지내야 하는 가련한 신세이며 김 진사를 궁 안으로 불러들인 사람은 대군이니 운영에게만 그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단호하게 자신의 뜻을 대군에게 밝힌다.

   ‘시는 자유로운 성정에서 나오는 것이라 하였는데
    운영을 잃고 어찌 우리 궁녀들이 다시
시를 쓸 수 있겠는가? ‘


대관절 시가 성과 속을 가르고 여자와 남자를 가르고 귀천을 따지고 진자리 마른자리를
고르겠으며 사랑에 또한 경계와 조건이 있을 텐가?


운영은 결국 자결을 택하고 얼마 뒤 김 진사도 운영의 뒤를 따른다.
천상의 세계에서 부부의 연을 이룬 두 사람은 폐허가 된 수성 궁에 내려 와 지난날을 돌아보다 유영을 만나 자신들의 이야기를 후세 사람들에게 잘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그 뜻을 정중히 받들어 무대 위 모래밭에 유영이 이야기책을 묻으며 양정웅의 네 번째 상사몽의 막이 내린다.

상사몽. 누가 무엇이 있어 꿈에도 서로 그리는가.
설령 그토록 꿈에 그려 얻어진 것이라도 시간을 버텨낼 수 있는 것이 과연 있는가.




원작을 능가하는 공연은 드물다고 한다. 원작 운영전은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와 인간의 기본적 욕구가 거세된 궁녀들의 억눌린 삶의 이야기, 궁녀들의 호방하고 두터운 우정이야기, 안평대군의 시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다양한 상사몽이 나올 수 있는 여지가 그만큼 많다.

극단 여행자의 네 번째 공연으로 ‘상사몽’을 처음 접한 관객은 기존에 공연된 상사몽 공연에 대해 호기심이 자못 클 것 같다. 관객 입장에서 동일 작품에 대한 다른 해석과 상상력, 연출 포인트를 감상하는 재미가 신선한 자극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각기 다른 색깔의 ‘상사몽’은 연출가가 밝혔듯, 공연 팀에게도, 극단의 레퍼토리가 풍성해지는 계기로 작용하는 인큐베이팅 작업이 된다.

상사몽은 원작에 나오는 인물들 중에서 표백되지 않은 욕망의 인물로, 김 진사와 운영이 사랑을 얻도록 돕는 김 진사의 하인 특과 무녀를 무대 위에 생동감 있게 살려냈다. 무대 벽면을 스크린으로 활용해 시를 시각화 시킨 점도 좋았다.




다만 궐에 들어오기 전 운영의 행복한 어린 시절을 묘사하는 대목에 마임 적 성격을 도입하여 운영이 몸짓과 표정으로 전달하는 코믹한 연기가 극의 전반적인 흐름에 비추어 엉뚱하게 튀는 점이 부자연스러웠다.

작품에 등장하는 여러 한시를 자연스러운 무대언어로 옮기는 작업에도 궁금증이 일었다. 시가 작품을 견인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기 때문에 오백년의 시공간을 뛰어 넘어 오늘날의 관객의 시심을 자극하고 극에 몰입할 수 있게 하려면 한시번역 영역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나눈 사랑 정녕 꿈이든가.
   화려한 봄날에 얼마나 자주 마음 상했던고. 
   지난 일은 이미 먼지 되어 사라졌건만
   지금도 공연히 눈물로 적시네.

   고궁의 꽃 버드나무 봄빛을 새로 띠고
   천 년의 호화로운 꿈속에 찾아오네 
   오늘 밤 놀러 오서 옛 자취를 찾으니
   그칠 줄 모르는 구슬눈물이 수건을 적시네

 

끝으로 꽃말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상사화를 소개한다. (네이버 검색 참고)

상사화 (相思花)
외떡잎식물 백합목 수선화과의 여러해살이풀.
학명 Lycoris squamigera
분류 수선화과
원산지 한국
크기 꽃줄기 높이 50∼70cm

잎이 있을 때는 꽃이 없고 꽃이 필 때는 잎이 없으므로 잎은 꽃을 생각하고 꽃은 잎을 생각한다고 하여 상사화라는 이름이 붙었다.

사람의 경우에는, 단지 서로 보고 싶은 마음을 표현하는 정도의 의미이지만 식물은 다르다. 식물의 잎은 살아가는 동안 자신보다는 나중에 자랄 꽃눈을 위해 일생을 바친다. 이 잎의 숭고한 노력 덕분에 꽃은 화려하게 피어 나와 자태를 뽐내게 된다.

 

극단 여행자 - 상사몽
2011 0312 - 0320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한국 고전 소설 <운영전>의 비극적 사랑이야기를 극단 <여행자>의 감성으로 무대화한 작업이다. 2007년 이미지극으로 무대에 올랐던 극단 <여행자>의 상사몽은 대학로 우수작품 인큐베이팅 프로젝트에 선정되어 이전 공연과는 전혀 다른 포맷으로, 원작에 충실히 접근하여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와 시구를 충분히 담아냄으로 드라마 미학을 강화하여 2011년 남산예술센터에서 새롭게 선보여졌다.

 


필자소개 _ 앨리스

2010년 9월 우연처럼 시작된 인연으로,  자기 삶을 새로 기획하고 만들어가는 좌충우돌 모험가. 현재 함께 문화마케터 공부 마친 이들과 커뮤니티 만들어 자가성장을 도모하며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