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9. 15. 09:39ㆍReview
옥상과 영상 시즌 3 : 작전명_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개인적인 낭독회 <점점(..) 사라질거야.>
사라지지 말아요 제발
글_정진삼
1
금좌빌딩이었다. 낭독회가 열린 곳은. 인사동에 있는. 옥상과 영상 시즌. 작전명은.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차지량이 있었다. 옥상과 영상전은 한여름 밤의 전시였으나 그때는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길목이었다. 아무것도 디스플레이 되지 않고 사라지는. 것들만이 거기에서 마지막 생(生)을 준엄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각각의 작가는 자신의 하룻밤을 솔로-비주얼-쇼로 진행한다. <옥상과 영상>전(展)의 규칙이다. 옥상의 작가들은 무언가를 없애고, 대신 무언가를 남기는 미션을 부여받았다. 8월이 가던 날 밤, 솔로는 (자신) 을 지우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시스템) 을 남긴다고 했다. 예상한 바 없이 공연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한 시간 남짓 시간이 흘렀다.
주위를 살펴보니. 도시가 진열되어 있었고, 소음이 들려왔고, 행인들의 고함이 간간히 스쳐갔다. 옥상 무대 저편에서는 아래를 깔보는 건물이 원치도 않은 야경을 뽐냈다. 무대 옆 벽면에서는 옥상과 영상전의 로고 영상이 교회 벽돌 벽면에 투사되고 있었다. 그 반대편에는 보름달이 휘영청, 혹은 휘청대며 하늘에 떠 있었다. 안개. 낮의 온도와 밤의 온도차이가 안개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슬펐다.
엄밀히 말하자. 전시회보다는 연주회였고, 낭독보다는 고백이었다. 노래 부르는 차지량. 기타를 치는 차지량. 고백하는 차지량. 낯설고 어색하다. 본인도 선글라스를 끼다가 “이것 참, 안보이네” 하고 다시 내려놓는다. 언제나 늘 그렇듯. 반바지에 마이. 마이 안에는 목 늘어난 티. 여튼, 그런. 꾸미지 않은. 꾸밀 수 없는. 꾸미지 않아도 되는. 그런. 환경 속에서 자신을 지탱해왔다고 그는. 말했다.
시작은 기타 연주였다. 기계의 힘을 빌었다. 작곡과 연주는 그가 했으나 이를 다듬는 것은 기계였다. 마이크와 맥북과 믹서와 앰프와 스피커가 그의 목소리를 증폭시켰고, 그의 기타를 울리게 했다. 그와 기타와 기계는 굳건한 믿음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기계가 그의 표정을 알아챌 리 만무하지만, 그들은 서로 부르고 대답했다. 음악(音樂)이었고, 탁월(卓越)했다. 아마추어의 증폭이 전혀 아니었다. 옥상에서 그는 미성을 지닌 프로 뮤지션이었다.
뒤이어 글을 읽었다. 관객을 호명하는 2인칭이 아니었고, 관찰된 세계 속의 3인칭도 아니었다. ‘나는’ 으로 시작하는 1인칭이었다. 위대한 개인이 사소한 이유를 말하고 있거나, 혹은 소박한 예술가가 거대한 농담을 건네고 있었다. 감정을 증폭하는 게 연주였다면, 감정을 눌러 담는 건 낭독이었다. 예술가가 자신의 축약된 삶을 읽어 내려갔다. 훌륭한 문장들이 모여 있었다. 접속사가 많았다. 그러나,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했기에.... 문장과 문장 사이에는 골이 많았고, 필시 쉼표가 있을 만한 자리에서 그는 호흡을 가다듬고 감정을 추스르며 불안(不安)해하고, 미안(未安)해했다.
그러고 보니 머뭇머뭇도 있었고, 숙연도 있었고, 깔깔도 있었고, 피식도 있었고, 무너짐도 있었다. 속절없음도 있었다. 그것들은 관객들이 미처 채우지 못한 빈자리에 앉아, 숨죽인 관객들을 대신해서 ‘큭큭’ 거리거나 ‘흑흑’ 거렸다. 삼십분을 읽었다. 삼십년이 지나갔다. 물론, 차의 목소리에는 비장한 어조의 순간도 있어서, 혹시 마지막엔 가방에서 레밍턴 샷건을 꺼내지 않을까, 하는 헛한 생각을 품기도 했다. 짠한 순간을 견뎌내는 건 언제나 딴 생각 밖에 없다. 기억나는 문장은 이것이다.
“....늘 시스템을 거부하는 행동을 취해왔고, 작품에서 늘 그것들을 보여주려 했지만, 나는 시스템 내부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했다. 그들은 나의 친구들이었고, 나와 별로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나는 이제, 그들이 있는 이곳을 떠나려고 한다...”
2
낭독을 마치고 다시, 기타 연주가 이어졌다. 현이 떨리면서 그로울링이 발생했다. 사운드가 만들어낸 무한한 입체감은 그의 비좁은 방을 역설적으로 떠올리게 한다. 그가 말하길 이 음악은, 고통의 시간동안, 홀로 웅크리고 앉아, 방안에서 만들어낸 유일한 ‘것들’ 이라고 했다.
주위를 둘러본다. 여긴 옥상이다. 일층 가게에서 삐져나오는 불빛들이 번뜩이고, 일층 가게의 고기냄새가 자리를 못 찾고 올라온다. 전시 공간을 보장받기 어려운 미술작가들이 창안해낸 일시적 장소. 하늘은 흐릿했지만, 상쾌함이 느껴졌고, 서늘한 기운이 더위를 가시게 해서 조금 힘이 난다. 사실, 그 외에는 그리 힘이 나지 않는다. 눈은 감을 수 있지만, 귀는 닫을 수 없으므로. 그의 사연은 우리 모두를 무력하게 만든다. 힘내자고, 하는 파이팅! 따위는 아니었잖은가!
차에게 반년 전에 어떤 일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짐작이 들었다. 짐작과 함께 짐짝과 같은 상상이 이어졌다. 자신이 그전까지 어떻게 살아왔고, 누구와 어울렸으며, 왜 작업을 했는지, 그리고 다시 그는 어떻게 죽어갔는지, 누구와 헤어질 수 밖에 없었고, 왜 작업을 할 수 없었는지, 그리고 누구를 다시 만나게 되었고, 곧 이 곳을 떠난다는 뭐, 그렇고 그런 이유들이 지레 짐작과 짐짝과 같은 무거운 상상을 구성했다.
조금 더 말해야 한다. 이럴 때는 기록으로 남기는 자가 슬픔을 꿀꺽 삼키고, 조금 더 힘을 불끈 내야 한다. 그의 말 속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고,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었다. 도피하지 않고 억압을 견디면, 면역 체계에는 악영향이 온다. 결국 파괴되고 만다. 자기조직화의 문제는 도피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언제나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이다. 자기 조직은 결국 억압을 견디는 자기 면역체계를 발동시키지만, 그 역시 빈틈이 있을 수 밖에 없다. 감염된 자기조직은 결국 치료약 없이 죽어가고 만다. 그래서 나는 나를 격리하고자 한다. 그의 말뜻을 이렇게 이해했다.
누구에겐 변명이고, 누구에겐 해명이고, 누구에겐 설명일 것이다. 어쨌든 그것은 의외의 ‘밝음’ 이 있었다. 어둠이 내리깔린 옥상에서 꺼지지 않는 명백한 사실들의 ‘반짝임’. 우리 모두는 어둠속의 그를 바라보았고, 그는 ‘환한’ 모니터속의 사실들을 보고 있었다. 어둠속에 감추어져있던 사실들이 빛을 내고 있었다. 그는 솔직했고, 너무 솔직해서 우리는 귀를 막고 싶었다. 너무 슬펐으니까.
3
교회 공동체에서는 이럴 때 노래를 불러준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한 사람, 이나 축복송 같은 노래들. 그러나 그 노래는 불러주는 사람들을 위한 노래일 것이다. 슬픔을 견디게 하는 4분동안의 러닝타임. 눈물을 준비 못한 자들의 뒤늦은 자가발전. 그의 이별 통보의 시간동안 머릿속에서 울리던 노래가 있었다. 1차원적이어서, 더, 민망한 디어클라우드의 <사라지지 말아요> 이 노래는 쌍용차 파업을 다룬 영화 <당신과 나의 전쟁>에도 실렸다고 한다. 이명박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아침이슬’ 같은 노래다. 사라지지말아요. 제발. 떠나가지 말아요. 제발. 빈자리에서 누군가 ‘큭큭’ 거리고 ‘흑흑’ 댔다.
꿈꾸는 것 외에는 할 것 없던 청춘이 죄를 짓지 않으려고 꿈만 꾸었던 시절에 자기도 모르는 죄들이 벌을 요구하며 나타난 걸까. 그것을 감당하고자 하는 예술가의 자책이 한스럽게 여겨졌다. 금좌가 급좌절이 되고, 절망이 되고, 망했어, 가 되고, 어차피가 되고, 피할 수 없는 시간이 되고, ‘간’ 이 ‘간신히’ 가 되었다. 간신히 감정을 추스렸을 때,
차는 말했다.
이런 나의 말할 수 없는 사연들을 잘 모르는 분들과 나누고 싶었다고. 내 주변의 가까운 친구와 사랑하는 사람들과 혈육과 동료들과는 나눌 수 없었음을 고한다고.
그의 두툼한 가방에서 나온 것은 ‘레밍턴’ 이 아니라 ‘이유들’ 이었다. 모든 것들이 말미암아진, 태초의 이유들. 그가 했던 <세대독립클럽>과 <미드나잇테러>와 <일시적 기업>과 <뉴홈>들에서 차마 말할 수 없었던, 작가의 속내가 거기에 있었다. 나는 왜 이렇게 작업을 해 왔는가, 그 작업들로도 이겨내지 못한 것은 시스템이었나, 인간의 삶이었나... 하는 회한들. 그리고 내 얘기를 들어줘서 고맙습니다, 하는 그 감사인사들.
연애하는 순간 중에 가장 행복한 순간은 상대의 가려운 등을 사랑하는 사람이 긁어주는 시간일 것이다. 아마도 기타와 맥북은 그가 홀로 방에 처박혔을 때 그의 등을 대신해서 긁어주던 것들이 아니었을까. 그것들은 모두 나름의 예민한 각을 가지고 있다. 골방에서 끙끙대던 존재에게서 배어나오던 울'음' 과 그 소리 없는 발'악'. 외로움이 가려움을 부르지만, 이를 긁어냄으로써 조금은 시원해지는 음악. 차가 마지막으로 불렀던 노래는 기타와 맥북과 그의 목소리로 만들어낸 “철새” 라는 제목의 곡이었다.
최근 작업, 그러니까 <뉴홈>과 축제의 공간디자인에서 그는 열심히 학을 접었다. 축제의 공간, 벽면에 투사된 영상 속에서 그가 학을 가지고 노는 장면이 눈에 아른거린다. 그가 우리에게 전해준, 시스템에 맞서는 최후의 방법, 차-지령이었다.
4
낭독회의 마지막. 세상과 싸울 마지막 무기가 유머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는 듯, 차는 장난스럽게, 끗! 을 말했다. 적막했다. 아직은, 여전히, 지금도 슬픔이 머무르는 5초 정도의 옥상이었기 때문에. 곧이어 작은 박수와 활짝 미소가 오고갔다. 씨익 '웃는' 솔로와 분위기 ‘깨는’ 사회자의 멘트가 있었다. 그 경망스러움이 고마웠다.
조금만 더 이를 악물고 비평스러워지기로 하자. 이번 공연의 성과는 공간의 발견과 자기 진정성을 소재로 한 예술가의 흠과 티 없는 문장, 그리고 골방에서 만들어낸 무언가를 나누는 것이 곧 예술 행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공연예술의 내용을 보면 '아직도' 혹은 '여전히' 잘 다루지 않은 부분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나" 다. 극장이라는 공공성을 전제하고 있기에, 공연예술 창작자들은 "나" 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혹은 못한다. (거장급이 아닌) "나" 의 이야기는 평가절하 되거나 혹은 지양해야할 악덕이 되기 마련이다. 무대에서는 너의 개인적인 사연 따위는 말해서는 안돼, 공적인 얘기만 하자, 라는 지상 명령이 존재하는 곳이 바로 극장인 것이다.
차지량은 그러한 ‘공적인’ 혹은 ‘유용한’, 이라는 제도적 목적 대신, 사적(私的)이고 무용(無用)한 이유들로, 그리고 자신만의 낭독극으로 또 하나의 작품을 완성했다. 그가 지금껏 집요하게 해왔던 시스템을 거부하는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이 공연/전시에서는 차지량을 말하고, 그를 둘러싸고 있던 시스템을 이야기했다. 말은 사라졌고, 이야기는 남았다. 지붕없는 극장에서 그는 환각을 거절하고, 하나의 의미를 거부했다. 대신에 미로를 헤메이다가 금좌로 입성한 관객들에게 얼리나잇 테러를 감행했다. 그래서 우린 조금씩 모두 아프고 즐거웠다.
잘 보면, 그는 연극 세계의 ‘어릿광대’ 를 닮았다. 그는 남들을 탓하지 않으면서 즐겁게 하기 위해 스스로 슬픔의 순간들을 견뎌왔던 것 같다. -같다, 라고 말하는 것은 아직도, 여전히 그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를 알기 위해, 그 자리에 갔었다. 그리고 거기에 그가 있었고, 그가 그랬다고 거기에 없었던, 누군가에게도 알리기 위해서, 그 날의 순간을 기록으로 두고자 한다.
끗.
옥상과 영상 시즌3: 작전명_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2012_0823 ▶ 2012_0902 cafe.naver.com/g309 facebook.com/proj.oksang
『옥상과영상』展은 '프로젝트 옥상'이 주최하는 한여름 밤 전시입니다. '프로젝트 옥상'은 인사동 금좌빌딩 309호에서 작업하는 김홍빈, 심혜정, 이생강으로 이루어진 시각프로젝트 그룹입니다. 『옥상과영상』展은 2009년 후미진 인사동 밤 기운을 빌어, 시각 작가들의 영상 상영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동안 인사동 옥상에는 낮에는 보이지 않았던 독립 영화의 상영, 다큐멘터리 영상 상영, 시각작가들의 작업 상영과 밴드의 공연 및 다양한 예술의 현장으로 존재하였습니다. 올해로 인사동의 금좌빌딩 옥상은『옥상과영상』展의 세 번째 밤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영상작업을 상영하는 것으로 시작한 옥상은 우리의 '밤'을 어떻게 확장시킬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 옥상의 작가들은「 」없애고,「 」을 남긴다. 금좌빌딩 옥상은 미술의 제도권 안에 있으면서, 예술을 소개하는 기능으로서 제도권 바깥을 미묘하게 엮고 있습니다. 이것은 옥상 안의 구성원이 그렇게 생각하기보다는 인사동 옥상의 물리적 속성이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인사동은 말만 문화거리이지 이제 빌딩숲이 된지 오랩니다. '인사동'이라는 어떤 표상만 남아 있습니다. 인사동 옥상 위에서는 도로 위에서 보이지 않는 인사동이 보입니다. 높은 빌딩 숲 사이로 인사동이 기억하는 화신백화점 자리, 서양물감이 처음 들어온 화방자리, 제일 처음 생긴 중고책방 자리, 인사동의 예전 상인들만 기억하고 있는 옥상 위 목욕탕이었던 금좌탕의 굴뚝까지. 진짜 있었고, 인사동이 기억하고, 인사동에 살을 붙였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인사동. 그러나 지금은 물리적으로는 남아있지 않는 무언의 인사동. ● 그 '무언'을 인사동 옥상에 부르고자 합니다. 진짜 있었고, 지금도 실재하지만 물리적으로 보이지 않는 그 것. 표상만 남아있는 모양과 이름 만들기. 지금의 대한민국이 그렇고, 미술의 행정이 그렇다고 생각됩니다. 소문난 행사(혹은 정치)는 핵심은 빠진 채, 장식이 난무합니다. 성과를 위하여 플래시를 터트리고 사진을 찍어 대어, SNS에 올리는 것에만 열을 올리는 모양새에 지쳤습니다. 국가는 이제 예술이 investment라고 합니다. 투자하면 성과를 뽑아내야하는 산업이 되었습니다. 성과가 있는 것에만 지원을 하겠다고 합니다. 왜 예술이 성과를 내야하고, 왜 예술이 사진으로, 기록으로, 수치로, 가격으로,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 합니까? 예술이 그런 것이던가요?
차지량_개인적인 낭독회「 점점(..) 사라질거야. 」 Part 1. Solo Visual Show: 작전명_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쇼가 있는 매일 밤 20:00-, 우천시도 무조건 진행합니다! 김홍빈, 문명기, 박병래, 신제현, 이진영, 차지량은 2012년 옥상에 올라가 미션을 받습니다. 첫째, 하룻밤을 맡을 것. 둘째, 전시장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을 것. 전시장도 아니고 공연장도 아닌 옥상에서 작가들은 자신의 하룻밤을 준비합니다. 홀로, 그리고 시각 쇼를 보여줍니다. 작가들은 옥상의 밤을 어떻게 아름답게 만들까요? Part 2. 신진작가 상영회 8월 29일, 20:00- 상대적으로 자신의 작업을 소개할 기회가 적은 신진작가들에게 자신의 영상, 설치작업을 소개할 자리를 갖습니다. Part 3. 워크숍_물리학과의 만남 8월 22일 성균관 대학교(서울) 경영관_별도의 참가 신청有 작전명: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 작전은 물리적으로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물리적'은 무슨 뜻일까요? 물리학자님과 대화를 진행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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