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9. 29. 11:07ㆍReview
제 12언어 연극스튜디오 <미인>
그 때 그 말이 다시 피어날 때
글_김송요
가끔씩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어요. 반말로 하는 대화에 익숙해졌을 때, 불쑥 비밀스러운 속마음을 말하게 되었을 때, 걸으면서 손을 잡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질 때, 바로 그 때 불쑥 다른 기억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오면 어김없이 소스라치게 놀라게 돼요. 그 다른 기억은 언제나 같은 기억이에요.
첫 만남의 기억,
누군가와의 첫 만남을 생각하는 때엔 항상 그래요. 항상 그렇게나 잔뜩 놀라곤 해요.
<미인>은 추억의 화분에 물을 주는 연극이에요. 연극이라기보다는 기억의 재생이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어요. <미인>은 소중한 날 받은 꽃다발마냥 말려두었던 기억, 혹은 일상에 치여 내버려두었던 기억을 ‘말’로 적시는 소생(蘇生)의 현장이며, 우습게도 그 소생은 이별의 순간들을 통해 재현됩니다.
연극은 연인이 겪는 이별의 순간들을 반복해 보여줍니다. 무대가 표현하는 실제 공간은 할머니가 된 여자의 방입니다. 그녀는 노환으로 앓아누워 자리보전을 하는 남편을 돌보면서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그런 그녀가 가장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란 과거의 좋았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지요. 반추의 순간 할머니의 집 마당에는 환영이라기엔 참으로 사실 같은, 젊은 남녀 한 쌍이 등장합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와의 이별을 준비하는 느리디느린 시간 동안, 젊은 남녀는 아쉬우리만치 빠른 속도로 여러 차례의 이별을 맞이합니다. 남자가 군대에 갈 때, 여자가 유학을 갈 때, 남자와 여자의 마음이 각자 제 갈 길을 갈 때 총 세 번. 이별의 이상적 구도를 따질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참으로 완벽한 삼각형이죠.
이 기억의 재현에서 이별의 배경이 되는 장소는 항상 여자의 집 앞으로 같습니다만, 내면의 풍경만큼은 상황에 따라 꾸준히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이 무르익었을 무렵 맞이한 이별은 불안할지언정 세상의 종말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지요. 연인은 눈이 마주쳤을 때마다 씩 웃고, 서로를 끌어안고, 상대에게 입을 맞추었습니다. 끝을 모른다는 듯, 막차 시간 앞에 오들오들 떨면서도, 잔뜩 떠들었습니다. 두 번째 이별은 조금 더 심각한 분위기였습니다. 유학이라는 이별의 사유 자체가 둘의 코앞에 스스로 감당해야 할 미래가 바짝 다가와 있다는 뜻이었으니까요. 둘은 몸과 마음 모두 전보다 가까워져 있었지만 미래에 대한 확신은 더 줄어든 채였습니다. 남자는 대화 중 제스처로 감정을 표현하려는 시도를 거의 하지 않게 되었으며, 여자는 그런 남자에게 익숙한 듯 조잘거립니다. 소통의 불균형이 희미하게나마 감지됩니다. 마침내 찾아온 마지막 이별, 그리고 마지막 만남에서 남자는 여자와의 대화 자체를 거부하고, 여자는 애써 평소처럼 남자에게 말을 붙입니다. 당연하게도 두 사람의 사이엔 접촉이 사라지게 되었고, 말 역시 까슬하게 혀 표면을 겉돌 뿐 서로를 향한 감정의 기폭제가 되어주지 못합니다. 결국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말, 연인이 주고받았던 말 뿐이지요.
마지막 순간까지도 둘은 구구절절하게 감정을 부연하는 대신 언제나 나누던 말들을 똑같이 주고받지요. 헤어지는 순간이 사소한 말들의 반복으로 재현된다는 것은 당연한 것 같으면서도 기묘한 일입니다. 사실은 태도며 표정이며 그 무엇 하나 의연할 수가 없는 상황인데, 흘러가는 말 그 자체는 말이에요, 그저 매끈하니까요. 설령 ‘망설이다’ ‘주저하다’ ‘사이’ 같은 지문을 앞뒤로 두고 있을지라도, 오롯한 말만을 놓고 보면 도무지 이들이 밤이 되어 각자 집에 들어가는 중인 건지 기약 없는 이별을 맞이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지거든요. 둘이 입에 즐겨 올리는 이야깃거리 역시 범상한 것뿐입니다. 매번 화제 삼는 ‘면도기 할아버지’ 이야기 역시 그렇지요. 남자의 이웃집에 사는 할아버지가 매일 같은 시간 거실에 나와, 옛 연인을 그리워하며 그이가 사주었던 면도기로 면도를 한다는 이야기예요. 그 시간 동안 할머니는 가만히 TV를 보고 있고요. 세 번의 이별 내내 연인은 어쩌면 자신들의 미래를 암시할, 과거에 매여 있는, 현재진행형의 이 사건에 대해 종알거립니다. 눈치가 둔한 누군가가 지나가다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게 되면, 둘이 당장 내일 이 시간엔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할 지도 몰라요…….
하지만 이 점은 역설적으로 연인의 말이 생명력을 가진 까닭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반복. 연인이 나누는 대화의 핵심은 실상 ‘반복’입니다. ‘잠은 잘 잤어?’나 ‘밥 먹었어?’ 같은 말이 두 번 세 번 한다고 식상해지는 것이 아니듯, 이 대화 또한 결국엔 일상의 일부이기에 태연하게 반복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둘은 화제뿐만이 아니라 문장 자체를 그대로 재연(再演)해내기도 합니다. 극중에서 세 번씩이나 반복하는,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라는 대사 말입니다.
두 주인공은 한 달에 한 번 있는 과모임 첫날, 첫눈에 서로에게 반했습니다. 모임이 끝날 무렵 여자는 남자와의 두 번째 만남이 오지 않을까봐 발을 동동 굴렀지만 남자는 ‘다음 모임은 그 때 가서’라며 의연하게 작별을 하지요. 그래놓고 일주일 뒤 남자는 모임 구성원 중 오로지 여자에게만 전화를 겁니다. “아… 우리 모임은 통상적으로 한 달에 한 번 열리지만… 특별 모임이 생겼습니다…….” 그 얼토당토않은 뜸들임이 담아내는 귀여움, 그 어색함, 그 훤히 보이는 속, 그 떨림 그 설렘.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 한 문장에 박제된 감정들이 그 말을 다시금 입에 담는 순간 주술에서 풀린 것처럼 되살아남을 느꼈을 때,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그때 그 사람이 여기에 있네? 이렇게 집에도 바래다주고?” 무르익은 관계에 대한 감회를 말하는 여자의 얼굴, 사랑스러운 그 얼굴은 그 얼마나 각별하면서도 보편적인 모습인지요.
만남과 이별은 하나의 거대한 역사이자 조그마한 일상의 사건으로 언제나 삶의 근처에 존재합니다. <미인>은 그 영롱한 순간을 심상(尋常)한 말들에 담아냅니다. 덕분에 할머니의 마당 앞에 되살아났던 연인은 관객 누군가가 그리운 사람과 한 쪽씩 나누어 끼던 이어폰 안에서도 튀어나올 수 있고, 실연 후 내내 앉아 울던 버스 뒷자리에서도 튀어나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니 사실, 이 이야기를 굳이 추억으로만 여길 이유가 있나요. 지금도 우리는 끊임없이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고, 마주앉은 사람과 처음으로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놀라워하고, 비슷한 날들을 변주하며 살아내고 있는 걸요. 그러니 참 재미있는 일입니다. 시간이란 어쩌면 그렇게 숨 돌릴 틈도 없이 흘러가는 걸까요, 기억이란 어쩌면 그렇게 대수롭지 않은 듯 영영 아름다운 것일까요, 또 나날이란 어쩌면 그렇게 자꾸만 반복되는 것인지,
마지막까지도,
마지막까지도……. ■
*****사진출처 : 서울프린지페스티벌 2012
필자_김송요 소개_느낄 수 있는 모든 것에 호기심도 애정도 욕심도 많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에 혹해 대학에서 미술이론을 공부했습니다. 꾸준히 감각의 그릇을 키워서 넉넉한 감정을, 이야기를 고봉으로 담아내고 싶습니다. |
2012 서울프린지페스티벌 참가작 (일시 2012-08-31, 09-01 / 장소 소극장 산울림) 제 12언어 연극스튜디오 <미인> 출연_이강욱 작.연출_윤성호 / 드라마터그_전진모 / 기획_박다솔
기획의도 - 인간 행동이란 끊임없는 반복의 과정이다. 각자의 개성과 특성에 따라 특정한 사건에 반응하게 되고, 이후 비슷한 상황이 나타났을 때, 이전의 경험에 따라 반응이 달라지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비슷한 대처양상의 띄게 된다. 이러한 행동들은 반복해서 나타나게 되고, 훗날 돌아보았을 때 알기 힘든 묘한 정서를 남기게 된다. 인간 행동이란 끊임없는 미완의 과정이다. 때로 심중의 말을 하더라도 전해지지 않고, 혹은 어떠한 이유로 심중의 말을 꺼내지 못하고 전혀 다른 말, 행동을 보여주고 이 역시 전해지지 않거나 왜곡되기 십상이다. 그런 후에 후회, 반성이라는 말로 당시와 현재를 화해시키려하나 좀처럼 쉽지가 않다. <미인>은 서로 사랑하지만 헤어지는 어느 남녀의 이별,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여자의 회상을 통해 이 끊임없는 반복과 미완의 초상을 그려본다. 시놉시스 - <미인>은 서로 사랑하는 ‘남녀‘의 이야기, 그리고 많은 세월이 지난 후 ‘녀‘의 이야기가 서로 교차되며 진행된다. 남녀는 서로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같은 장소에서 각기 다른 사정에 의해 세 번 이별하지만 정말로 마음 속에 있는 이야기들은 꺼내지 못한 채 헤어진다. 할머니는 이 날들을 때로는 쓰라리게, 때로는 아련하게, 그리고 묵묵하게 회상한다. 극단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 (12th Tongue Theatre Studio)는 연극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창작과 표현을 찾아나가는 젊은 예술가들의 집단입니다. “제12언어”라는 이름은 지구상의 수많은 언어 중에서 한국어를 사용하는 인구 수가 대략 12번째로 많다는 통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는 모국어인 한국어에 대한 감각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문학성과 연극성 사이에서 새로운 수사학을 탐구합니다. 또, 문학 텍스트의 공연화, 일련의 과학연극 시리즈, 외국 연극인과의 합작공연 등 다른 장르, 다른 분야, 다른 문화권과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제12언어 연극스튜디오 트위터 바로가기 >>> http://twitter.com/12thTongues 제12언어 연극스튜디오 클럽 바로가기 >>> http://club.cyworld.com/12thtongue
----------------------------------------------------------------------------------------------------------- ※ 본 <미인> 공연은 가톨릭청년회관 다리에서 주관하는 정기공연시리즈4 에서 다시 볼수 있습니다.
*** 이미지출처 >>>> 다톨릭 청년회관 다리 홈페이지 http://www.scy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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