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뷰] 예술가의 몫, 소리

2012. 11. 19. 16:22Feature

 

▲영화 <말하는 건축가>, 중년의 건축가 정기용

 

예술가의 몫, 소리  

 

글_정진삼

 

1. 화

지원금 신청의 계절이 돌아옵니다. 젊은 예술가/기획자의 육체와 정신은 바빠 혹은 나빠질테지요. 일견 자율/자발적이고, 선택하면 그만! 인 모양새지만, 신청서를 쓰는 예술가들은 뭔가에 길들여지고 있다는 마음을 떨쳐내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되면 다행인데, 되도 안하면 그 굴욕감과 화는 더해지지요.

좀 더 윤리적인 예술가와 기획자들은 아마 이런 순간을 지나왔을지도 모릅니다. 기금신청 데드라인을 앞두고 예술가들은 그동안 그들의 (작은) 성공과 (여전한) 실패와 착취와 자위와 뻘짓 등등의 시간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원치 않은 순간에 자기를 돌아보며 맞닥뜨리게 되는 기억들. 값진 경험들이 그 ‘몫’ 을 하기 위해 이렇게 사용될 줄이야. 경험한 모든 것이 성과로 변하는 둔갑술. 재작년 혹은 작년 기획서의 내용이 좀 더 예쁜 모습으로 나타나는 성형술. 이러한 마술로 예술은 몇 줄로 요약/정리되어 제출버튼을 기다리는 서류가 됩니다.

문제는 이러한 윤리적 피로를 가중시키는 제도의 수행과정에 있겠지요. 나도 잘 모르는 내 모습을 ‘구미에 맞게’ 치장하고, 관객이나 대중이 아니라 소수의 평가자들 앞에 나서는 수행과정. 이런 게 진정 악의 퍼포먼스고 피로사회의 캐릭터입니다. 잘 들여다 보면 이것은 자율과 독립을 점점 멀어지게하는, 거대한 타율화의 일면이겠지요. 예술가/기획자가 마감과 서버 용량과 속도에 쫓기며 제출하는 지원시스템은 정녕 예술가가 자기 자신을 자율적으로 억압하게 되는 자기 착취적 제도라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2. 흥

재능기부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또한 젊은 예술가들에게 피로를 가중시키는 말이지요. 결단코 재능기부는 이들의 육체를 소진시키는 일입니다. 물론, 그 말은 예술가들의 입장에서 쓰일 때, 그들이 가진 재능, 재화, 생산기반을 ‘기부’ 라는 아름다운 행위에 동참시키고자 하는 의미로 사용될 것입니다. 기부야 뭐, 좋은(?) 것이니까요. 그러나 그 말이 국가나 기업 등 사회에서 무책임하게 사용될 때는 ‘착취’ 의 다른 말이 됩니다. 생산기반을 갖지못한, 혹은 생산기반이 몸, 이거나 그저 애플맥북 정도인 예술가에게 재능기부는 자신의 생업을 잠시 접어두고 행하는 소득없는 투잡이며, 매번 알고 당하는 착취의 연장선이지요.

잘 보면, 예술가의 재능은 거저 얻어진 것은 아닙니다. 예술작품 또한 얻어 걸린 것이 아니겠지요. 게다가 기부가 ‘불가능’ 한 예술가 계층도 있습니다. 기부라는 것은 뭔가가 조금이라도 쌓여있고, 최소한 마음의 여유라도 있을 때 가능한 행위이지만 - 젊은 예술가의 가난한 예술 곳간이나 혹은 피폐한 마음상태에서 도대체 뭔가를 더 빼앗아 갈수 있단 말입니까. 몰인정한 소리라고 할 수도 있으나, 실상 '재능기부' 는 젊은 예술가를 난감하게 하는 착취적 관습 혹은 심리적 압박수단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아예 말을 막하면, 정당한 대가없이 일하는 젊은 예술가들은 그들이 생존하고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다양성 없는 한국사회에 큰 기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흥! 

 

3. 훅

'자기 조직화' 라는 말은 참 매력적으로 들립니다. '자기' 를 일종의 미학적/정치적 개체 혹은 조직으로 보는 것이지요. 개체는 스스로 자기를 진(보)화시킴으로써, 주체적인 담론을 생산해냅니다. 이 말을 괜히 뒤집어 경제적인 관점을 도입해보면, 개인은 1인 기업이 되고, 1인 공장이 되고, 1인 사업장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개체는 자기의 생산성을 극대화시킴으로써, 고부가가치의 재화를 생산할지도 모르지요.

예술가에게 '생계형' 이라는 수식어가 달리는 순간, 자기조직화의 혁명적 기운은 일순 주춤하고 ‘세일즈맨의 죽음’ 스러운 유령이 기웃거립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은 아닐까요. 예술가는 자기조직화를 통해서 스스로 정치/미학의 장에 참여하는! 것 처럼 보일는지도 모르지만... 실상 ‘미학 시장’ 이라는 아트마켓에 나가는! 것...  

비단, 우리가 그런 의도를 갖지 않더라도, 자기조직화를 통해 보여준 사회적 액션을 누군가/자본가들은 상품가치를 지닌 퍼포먼스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브로커나 떳다방도 뭐 그런 식이겠지요. 그들은 예술가에게 작품을 빼앗는 대신 바이러스를 투입시키거나, 혹은 심리적 최면을 걸어 자발적으로 조공하는 방식을 사용하겠지요. 자기조직화의 약점은 결정적으로 개체내부에서 저항력/면역력을 갖추지 못할 때 한방에 훅, 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늘상 ‘정신’ 차리고 있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4. 헐

모바일과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젊은 예술가의 몸은 어디든지 존재해야 할 것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어디에서나 대답해야 하는 병정(‘갑’ 을 지키는 병정)인 예술가들은 더욱 피로해지고, 그들의 집중없는 멀티태스킹은 삶을 더더욱 피폐하게 만들게 되겠지요.

항시 예민한 대기를 타고 있으면서도, 마치 자율적인 것처럼 이루어지는 자기착취적 예술활동은 결국 기획자와 예술가의 육체를 쓰러뜨리게 될 것입니다. 잘해야 한다는 강박에 쫓기면서(그래야 지원금을 받으니까), 갑과 을이 제시한 마감의 추격을 받으며, 핫 식스나 레드불을 벌컥벌컥 섭취하면서, 자신의 육체를 하릴없이 쓰게 되는 것이지요.

아무래도 예술이라는 새로운 피를 끊임없이 주입받아야 하는 사회의 입장에서 보면, 히스테릭한 몸, 병든 몸에서 나온 '피' 는 신선도가 떨어지니, 의식적으로/점점 젊은 육체를 탐하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그것은 아직 열정과 건강을 담지하고 있는 새 몸이기 때문에. 아직은 착취당할 간이 남아있기 때문에. 다중작업에 능한 뇌이기 때문에. 헐...

예술가들의 몸이 홧병/골병날 지경에 이른 것은 아마도 정당한 대가를 받아내지 못해서겠지요. 엄밀하게 말하면 그 대가를 ‘주지’ 않아서겠지요. 예술가들이 제도나 시장으로부터 받아내는 것은 늘 한계와 실패가 뒤따르니까요. 다 아는 얘기지만, 또 다시 주먹이 불끈 쥐어집니다. 

 

5. 흠

자, 남탓 했으니, 내 탓도 해야겠지요. 인디언밥은 어떨까 반성해봅니다. 글쎄요, 웹진도 누군가를 억압한다면, 그 대상은 아마도 ‘필자’ 겠지요. 그들을 피로하게 만드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이를테면 필자들을 강요하고, 채근하고, 늦게주고, 적게주는 방식... 흠. 앞의 두개는 가급적 안하는데, 뒤에 두개는 맘에 걸립니다. 흠. 밥 먹는 사람은 커졌는데, 밥솥의 성능이나 혹은 숟가락의 크기는 여전하니 '어쩔 수 없이' 적게 물리고 씹히고 삼키게 하는 수밖에... 

그런 연유로 인디언밥이 가까운 훗날 필자들을 지치게 하지는 않을까, 또 그런 이유가 저런 이유가 되어 예술가들의 피로를 ‘나몰라라’ 하지는 않을까, 괜히/심히 고민됩니다. 그러니까 이글은 인디언밥의 미래를 프리뷰하고 있는 것인가/일까요.

대가의 정당함을 말하는 자는 스스로 가장 정당한 대가를 계산해야하겠지요. 재능기부로 허기를 달래는 것이 아닌, 내면화와 자기조직화를 혼동하는 것이 아닌, 상호평등으로 위장하여 갑을병정(계약을) 무기갱신(하면서) 임계(치를 시험하는) 관계가 아닌, 정당한 밥이 되었으면 합니다. 과연 미래는 어떠할런지요. 흡.

 

▲영화 <말하는 건축가> 중 

 

6. 휴

‘예술가의 육체’ 에 이어 ‘예술가의 목소리’ 라는 덜/지난 주제를 오락가락하며 찾아낸 작품은 바로 다큐영화 <말하는 건축가> 입니다. 정재은 감독이 故 정기용 건축가의 말년을 추적한 작품으로 올해 초 상영되었던 영화입니다.

노년에 목소리를 크게 낼 수 없었던 건축가 정기용 선생은 휴대용 마이크 장비를 차고 다니며 말을 이어갑니다. 말을 해야만 하는 건축가, 침묵할 수 없는 예술가. 속수무책으로 다가오는 노화를 감당할수 없었던 그가 선택한 건, 바로 목소리를 키우는 마이크였습니다. 탁하긴 하지만, 크게 쉬어버렸지만 그 덕분에 소리를 들을수 있게 되었지요. 

영화에서 인상적인 순간은 물론 건축가가 사람들을 상대로 '말하는' 장면입니다. 정기용 선생은 ‘무주 등나무 운동장’ 에서 지방 공무원들을 상대로 공공건축을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동선을 따라 거닐던 중에 그는 자신의 건축물 뒤에 더해진 ‘요상한’ 펜스를 발견하게 됩니다. 등나무가 햇빛을 받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 속상해진 나머지 그는 “신경질이 나서 더 이상 못하겠어” 라며 가이드를 중단하지요. 영화는 황당함과 실망함에 돌아서는 건축가의 뒷모습을 잡아냅니다. 인간과 자연을 섬기려했던 자신의 설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건물이 관(官)의 위용을 담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을 때, 예술가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다시 이야기로 돌아옵니다. 예술가의 목소리는 바로 정기용 건축가처럼 - 낮아지고 쉬어져 버렸지만 - 대중들에게 가닿는 것이며, 한편으론 “못 해먹겠다!” 라고 화를 내고, 탄식하고, 한숨을 내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7. 휙

마감에 쫓기고, 입금에 쫓기고, 결정에 쫓기고, 용량에 쫓기고... 결정적으로 자신에게 쫓기는 지금은, “헐!” 한 시대입니다. 인디언밥의 10월 그리고 11월 주제는 예술가의 육체, 예술가의 몸, 예술가의 목소리 입니다/였습니다. 예술가의 ‘예술하는’ 몸이 주제였으면 참 아름다웠겠으나, 예술가의 노동하는 몸, 착취당하는 몸, 기(氣) 빨리는 몸 등등등 고통과 슬픔을 담고 있는 몸이라서 안타깝습니다.

아마도 그렇다면, 예술가의 목소리는, 그러한 일그러진 몸에서 가까스로 비집고 나온 ‘신음’ 이 되겠지요. 정확한 의미도 갖지 않고, 저항하는 파열음도 아니고, 인정하는 대답도 아닌... 몸에서 새어나온 말과 숨, 그리고 바람이 살짝 일어나며 그랬거니, 흔적만 남기는 말... 그 목소리야 말로 ‘핫’ 한 것으로 위장하였지만, 속내는 ‘헛’ 한 세계를 바라보는 예술가들의 자조어린 코멘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휴.

결론을 낼 수 없는 글이기에, 그냥 '휙' 사라지고자 합니다. 예술가의 몸, 에서 나온 예술가의 목소리, 라는 주제로 쓴 이번 프리뷰는 마감/입금/결정/용량에 쫓겨 그 심정을 대변하고 변명하는 한음절의 단말마들로 정리되고야 말았습니다. 뜬금없지만, 이 밤에 뜬눈으로 지새우고 있을지도 모르는 여러분, 예술가들, 필자들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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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말하는 건축가>, 노년의 건축가 정기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