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단상들] 존재하는 잉여들 - 유햅쌀

2012. 12. 30. 23:26Feature

 

존재하는 잉여들

 

글_유햅쌀

 

실체가 없는 것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참 두렵습니다. 사실 그것은 없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 개념어로 정립되지 않은 것, 그래서 ‘무엇’이라고 말해버리면 그것으로 규정지어질까봐 어색하고 낯선 것, 하지만 그게 나인 것, 바로 ‘잉여’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 씩 되뇌는 이 단어 말입니다. 누군가 “지금 뭐해?”라고 물으면 “나 지금 잉여야”라고 답하는 일상화된 상황에서 잉여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은 굉장히 막막한 일이었습니다. 도대체 ‘잉여’는 무어란 말입니까.

본격적으로 잉여를 말하기 전에 진부하고 고루할지라도 잉여(가 되고 싶었던)인 나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정말 잉여로운 인간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니까 다 쓰고 남아 쓸모없어진 그런 인간 말고 잉여시간, 다시 말하면 놀이시간이 많아 하고 싶은 일을 여유롭게 즐기는 그런 잉여 말입니다. 그런데 일상은 놀이가 될 수 없었습니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쉽사리 잉여가 될 수도, 그렇게 되고 싶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잉여가 되고 싶다 투정에 투정을 옹알옹알 거렸지만 잉여가 되기를 주저하는 삶. 그러다 어느 순간 ‘놂’에 대한 갈구와 조급증은 놀이마저 계획과 규칙에 충실해야 한다는 강박으로 다가오고야 말았습니다. 무질서의 놀이에 대한 어떤 그리움을 잊은 채. 놀기 위해서 어디에 가야 할까를 끊임없이 검색하고, 무엇이 질에 비해 비용이 덜 들지 비교하고, 어디에서 무엇을 봐야 좋을 지에 대해 찾고 또 읽고. 그 집착적인 과정 안에서는 절대 잉여가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졸업을 앞두고 “졸업하면 뭐 하지?”라는 질문이 맴맴 돕니다. 어쩌면 지금 이 시간이 지나면 나에게 잉여는 끝일지도 몰라요. 지금 바라는 대로 슬기로운 잉여, 즐거운 잉여로 살아가기에는 사실 어려움이 많습니다.

갑자기 혼돈이 옵니다. 아무래도 ‘잉여’라는 말이 언제부턴가 전방위적으로 쓰이기 시작하면서 잉여는 부정과 긍정을 내포한 희한한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인터넷 세상에서 말하는 잉여들은 내가 보기에도 생산과 소비의 주체이기는 하나, 보편적이라 말하는 그 가치 측면에서 보자면 좀 쓸데없는 일들을 만들어내는 사람, 혹은 쓸데없는 일 그 자체 인 것 같은데 말입니다.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서 아주 사소한 무엇을 만들고 찾아내는 데 치중하고는 그 사소한 무엇을 커뮤니티에 인증하고 자랑하는 그런 것 말입니다. 잉여라는 그 경제학적 수식이 인간 앞에 붙어있을 때, 그런 인간과 직면했을 때 사람들은 혀를 끌끌 차기도 하고 한심하다 말하기도 했습니다. 문학평론가 김현 선생의 말처럼 ‘문학의 무용이 유용한 것’이라는 이야기는 보편적인 예술의 기준 같은 것이 있을 때의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가치판단이 어려운 시대에 무용한 것들은 진정 무용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자신이 잉여라는 것을 진작 감지하고 인정한 사람들은 좀 더 창의적이고 즐겁고 획기적인 일들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언론고시에 수차례 실패한 취업준비생이 <월간잉여>라는 잡지를 내고 텀블벅에서 후원을 받고 수많은 잉여들의 지지를 얻는 모습을 살펴보며 한편으로는 저런 잉여라면 해볼 만하겠다는 생각도 하게 됐습니다.

 

월간 잉여 표지, 월간잉여 웹페이지 http://monthlyingyeo.com

 

잉여의 사전적 의미는 ‘다 쓰고 남은 것’이라 합니다. 하지만 잉여는 이 경제학적 의미를 넘어서 좀 더 다양하게 분화되고 숱한 파생어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청년의 다른 말인 것 같기도 합니다. ‘삼포세대’나 ‘88만원 세대’라는 동정에 자조하는 청년들이 스스로를 잉여라고 칭하고 있으니까요. 최근 미디어에서 잉여는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캐릭터로 자리한 것이죠. 스스로를 잉여라고 칭하는 김류미 씨의 23가지 아르바이트 체험기 『은근리얼버라이어티 강남소녀』같은 에세이에서, 박민규, 김애란의 소설에서 전석순의 『철수사용설명서』까지 신세대 문학 속에서 잉여는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영화나 드라마는 또 어떤가요. 고달픈 백수, 배짱이 백수는 감초역할을 하기도, 주인공이 되기도 합니다. MBC 시트콤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에서 취업에 번번이 실패하고 집도 절도 없이 남의 집에서 눈칫밥 먹으며 살아가는 ‘진희’ 캐릭터 같은. 그리고 잉여들 스스로가 이런 문화소비의 주체가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청년들의 모든 활동을 ‘잉여’들의 활동이라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들은 무엇일까요.

‘잉여’라는 말에 ‘힘’이 붙은 ‘잉여력’이라는 말은 어찌 보면 두 가지 의미로 쓰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어떤 누리꾼이 오픈백과에 정리해놓은 것처럼 ‘잉여짓이나 뻘짓 같은 Extra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포털에는 하루에도 수백, 수천 건 씩 커뮤니티 유저들이 인증한 잉여력 넘치는 일들을 기사화 시킨 것들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다른 측면으로는 스스로를 ‘잉여’라고 인식하는 이들이 자신들에게 결핍된 무언가를 채우면서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내는 힘을 ‘잉여력’으로 치환해 사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찌됐든 이제 잉여는 눅눅한 방바닥에 앉아 벽지 패턴 개수나 세며 밥이나 축내는 할 일 없는 존재들이라는 낙인을 조금씩 벗고 있는 것 같아요.

 

디지털시대의 잉여

‘잉여짓’과 인터넷은 이제 서로를 분리하고는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디시인사이드를 필두로,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가 범람하면서 잉여짓은 각종 패러디로, 또 정치적으로까지 확장됐습니다. 특히 디지털시대의 잉여들은 다양한 신조어를 생산하고 패러디물, 커뮤니티 언어를 오프라인으로 확장하면서 미디어 흐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디시인사이드는 1999년 디지털카메라에 관한 정보 교류 사이트로 출발했다. 지금은 갤러리(디시인사이드의 주제별 게시판) 숫자만 약 1100개로, 그야말로 ‘세상의 모든 것을 다루는’ 커뮤니티 사이트로 성장했다. 2012년 8월 기준 하루에 평균 60만명 이상이 다녀가고, 일평균 조회수는 700만~800만건에 달한다. 전성기로 평가받던 2007년에는 하루 조회수가 1억건에 달한 적도 있다. ‘솔로부대’, ‘폐인’, ‘안습’, ‘본좌’, ‘낚시’ 등 시대를 풍미한 각종 유행어와 댓글놀이, 신상털이 등의 문화가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박은하 기자, <경향신문>, “디시, 촛불, 좌좀·우꼴…정보교류서 이념논쟁의 장으로 분화”,)

 

이처럼 사회 전반에 침투한 커뮤니티 문화는 최근 그 역할을 좀 더 확고히 하는 듯합니다. 커뮤니티에서 탄생한 커뮤니티 언어의 확장은 특히 이 모든 현상들을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습니다. 새롭게 태어난 언어가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은 엄청납니다. 각종 유행어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생활 속 언어습관에도 침투해 우리 생각을 좌지우지하는 정도니까요. 이런 언어들은 끊임없이 이야기로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대선 토론을 보며 누리꾼들이 만들어 낸 패러디 ‘짤방’들을 tvN 프로그램 <SNL 코리아>에서 이야기 소재로 만들어내고, 그 이전 <무한도전>, <1박 2일> 등 ‘리얼 버라이어티’가 인터넷 문화를 코드로 사용하거나 에피소드화 한 것도 그 예가 될 수 있겠습니다. 이 문화를 소비하는 ‘오타쿠’는 기존 일본의 애니메이션이나 라이트 노벨, 노벨 게임 같은 서브컬처의 열성적인 지지자를 뜻했다면 이제는 그 범위를 점점 넓혀 수많은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지요.

올해 들어 커뮤니티의 영향력은 점점 커졌습니다. 급기야는 ‘SLR클럽’이라는 디지털 카메라 동호회에 올라온 24인용 텐트를 혼자서 칠 수 있다는 (무모해 보이는) 글이 눈덩이처럼 규모가 불어나 남성들이 열광하는 ‘T24 소셜 페스티벌’로 만들어지기도 했고요. 최근에는 또 어떻습니까. 이 세상 모든 솔로들을 크리스마스이브에 여의도 광장에 모아 땡 하면 마음에 드는 이성의 손을 잡고 뛰게 한다는 ‘솔로대첩’이 핫이슈로 떠오르기도 했지요. 커뮤니티 속 논의는 이제 인터넷 세상에만 머물지 않고 세상 밖으로 뛰쳐나오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분석이나 서브컬처 비평 역시 늘어나고 있고요.  

 

▲온라인에서 시작된 사용자 주체적- 유사축제 24텐트

 

서사 장르 곳곳에도 인터넷 커뮤니티, 잉여들의 삶, ‘오타쿠’의 습성이 스며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분석한 일본의 비평가 아즈마 히로키가 『동물하는 포스트모던』,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과 같은 저서에서 말했듯이, 이제 우리시대의 이야기는 선형적 이야기가 아니라 ‘멀티플 리딩 패스’, 즉 읽기경로가 굉장히 다양해진 이야기 형태로 존재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우리 상황-이 책은 일본의 문학, 게임 환경을 토대로 쓰였지만-에 적용시킬 수 있을까 고민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작년과 올해 우리는 드라마와 예능에서 수없이 이 상황을 목격했습니다. 드라마에서는 타임슬립을 소재로 한 <옥탑방 왕세자>, <닥터 진>, <신의> 등이 계속 만들어졌고요. 예능에서는 프로그램을 총괄하는 PD가 등장하는 <1박 2일>, <무한도전>의 인기가 꾸준히 지속되고 있습니다. 특히 만드는 이가 직접 나타나 출연자들에게 상황을 지시하는 구조들이 RPG게임과 맞물려 있다는 것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영화에서도 <트와일라잇> 시리즈나 <늑대소년>이 큰 인기를 끌면서 현실과 환상의 경계 해체는 지속되고 있습니다. 문학계의 새로운 세대들이 경험과 문학이론을 뛰쳐나와 소재를 취사선택하며 창작활동을 하며 생겨나는 고민도 이런 현상과 맞물려 흘러가고 있네요.

 

       웹 환경이 보편화되면서부터는 ‘체험’이나 ‘문학사’가 더 이상 기능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 대신 데이터베이스가 기능을 하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오늘날 시인들은 백석을 깊이 읽음으로써 백석의 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전유하려는 번거로운 작업은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고독이나 이질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마녀’라고 하는 코드를 등장시킨다거나, 가족 내부의 상처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밥상머리에서 어머니와 내레이터가 대화하는 장면을 삽입하고, 예술가 시에는 ‘현금(弦琴)’과 ‘악사’라는 코드를 사용한다. 문학사와 데이터베이스의 차이는 데이터베이스의 이 자동성, 심층(고민) 없음에서 찾을 수 있다. (장이지, 「게임적 불안, 분기형 미로에서의 결단 - 데이터베이스 소비 시대의 시를 사유한다」, 『시인수첩』, 2012년 가을호 中) 

 

일례로 한국국학진흥원에서는 조선시대 일기를 번역하고 시기별, 공간별로 정리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제는 캐릭터가 처한 상황의 배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DB화된 캐릭터를 취사선택할 수 있는 ‘DB소비’ 시대가 성큼 다가왔습니다.

 

타올랐다 사라지는 것의 가치

지금은 보이는 것이 전부인 사회인 것 같습니다. 그런 이 시대에 무용의 것들을 양산하는 잉여라는 존재는 필요할 때마다 바로바로 소비할 수는 있지만, 여전히 쓸모없는 것으로 존재하는 듯합니다. 모든 가치가 교환 가치로 평가되는 시대에, 잉여들이 범람하는 상황을 체감한다는 것은 어떤 사람들에게 굉장한 위기일지도 모릅니다. 예컨대 나꼼수, 안철수, 싸이 같은 어느 한 시기의 코드, 캐릭터들이 빠르게 들끓었다 사라지고 있고, 영향력을 인정받기도 지탄받기도 합니다. 물론 이들을 쉽게 평가할 수는 있지만 너무 빠른 속도 때문에 제대로 된 평가조차 어려울 때도 있기도 하고요. 하지만 경계가 사라지는 시대에 그 경계에 오묘하게도 걸쳐있고, 경계 허물기에 영향을 주고받는 존재들을 쓸데없는 무엇으로 인식해서는 안 될 것 같기도 합니다. 

 

▲잉여인이 테러리스트로 변하는 연극, 극단 드림플레이의 <서바이벌 캘린더>(김재엽 작/연출) 포스터

 

실은 어떻게 끝을 맺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상황을 죽 펼쳐놓기만 하고 정리할 수 없다는 것이, 그러니까 가치판단을 한다는 것이 옳은 것인지 판단이 서지가 않아요. 꼭 모든 것에 가치를 매겨야하나 하는 어쩌면 위험한 생각마저 들었으니까요. 디지털시대에 스쳐지나가는 DB소비가 당연해진 지금, 무엇이든 소비되고 생겨나고 (아카이브의 실체는 알 수 없지만 어디엔가) 축적되는 것들이 흐름이라면 그냥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기도 하고요.

어찌됐든 사람들의 ‘잉여-되기’는 그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것이 놀이가 될 수도, 창의의 산물이 될 수도, 정말 쓸데없는 것이 될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이런 문화를 도대체 무어라 불러야 할지, 앞으로 하나의 장르나 예술이라는 형태로 자리할 수 있을지 내다보기도 애매합니다. 이미 너무 많은 것들이 복잡하게 섞여 시작과 끝을 이야기하기도 힘이 들 테니까요. 참 어렵습니다.

이쯤에서 잉여에 대한 수다를 마치려 합니다. 타올랐다 사라지는 것의 가치를 다시 한 번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는, 그런 진부하고 재미없고 당위적인 언어로, 이렇게 말입니다. 

 

  필자_유햅쌀

  소개_시트콤같은인생살이를위해, 재미진무언가를찾습니다. 인간은유희적동물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