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빨간 버스> 빨갛고 노랗다, 죽어가면서 돌아보는 얼굴

2012. 12. 23. 23:40Review

 

빨갛고 노랗다, 죽어가면서 돌아보는 얼굴

<빨간 버스>

박근형 작·연출 / 제작 (재)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

 

글_김해진

 

 

무대는 사거리 횡단보도의 한복판이다. 장면이 바뀔 때마다 흰색으로 빗금이 그어진 횡단보도 위에 교실이, 공터가, 술집이 겹쳐진다. <빨간 버스>를 탄 고등학교 2학년 아이들은 그 어느 곳에서도 편하지가 않다. 그래서 아무리 다른 장소가 겹쳐져도 결국엔 찬바람이 쌩쌩 부는 사거리 횡단보도다. 게다가 건널 수가 없다. 신호등이 달려있지만 좀처럼 초록불은 켜지지 않는다. 빨간불과 노란색 불만이 번갈아 깜빡인다. 건너갈 수 없다는 신호 앞에서 아이들은 살아간다. 여기에는 나무 의자 몇 개만 있다. 나무의자 여러 개를 연이어 호프집 테이블이나 공터의 벤치를 만들고 따로 떨어뜨려서 교실이나 교무실의 분위기를 내기도 한다. 무대 안쪽에는 회색빛 칠판이 두 개 서 있다. 공연의 후반에 칠판은 딱 한번 문이 되어 열린다. 그 딱 한번이 리틀맘 세진의 미래를 결정짓는다.

연극은 배우들의 노래로 시작한다. ‘차들이 쌩쌩 달리’는 추운 밤에 고양이들이 ‘엄마를 찾아다니’며 운다. ‘무섭게 눈을 뜬’ 차들을 보면서 고양이들은 그리고 아이들은 얼마나 무서울까. 그런데 ‘불안은 친구’란다. <빨간 버스>는 불안을 친구로 삼은 아이들의 이야기다. 아이들은 빗을 휴대하고 다니며 머리를 빗거나, 아무렇지도 않게 교복치마 속으로 바지를 끌어올려 옷을 갈아입고 거친 말로 우정을 확인한다. 그러다가도 자기의 비밀이 거론될라치면 정색한다. ‘네가 나에 대해 뭘 알아.’ 횡단보도가 더 길고 멀어지는 것만 같다. 세진이 동원에게 던진 이 말은 아이들이 저마다 마음속에 품고 있는 핵폭탄이다. 세진이는 강원도에서 만난 남자와 연애한 후 아이를 낳았고 인터넷에서 혼자 아이 낳는 법을 찾아 정말 그렇게 했다. 그 사실을 숨기고 있다.

 

 

<빨간 버스>는 어른이 되지 못해 비겁해져버린 어른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세진의 엄마는 세진에게 아이 아빠가 누구냐고 묻는다. 다들 힘들다고, 어른도 힘들다고, 너만 힘든 거 아니라면서. 또 고2는 어리다고,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엄마는 세진의 곁에 있어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기를 낳으며 엄마를 간절하게 생각했다는 세진의 독백은 절절해진다. 세진이 세진 앞에서 세진을 이야기한다.(엄마, 딸, 아기의 이름이 같다) 같은 이름이라는 건, 마치 같은 운명이라는 걸 말하는 것 같아 섬뜩하다. 이럴 때 작가 박근형은 얄궂다. 세진과 엄마의 장면이 다소 길게 느껴졌지만 그만큼 극장이 세진에게 말할 기회를 충분히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빛으로 구획 지어진 사각형 안에서 세진이 교복 조끼를 벗어 그것을 아기로 삼아 안는다. 아기를 향한 애정의 반대편엔 자신의 엄마 얼굴을 피범벅으로 만드는 상상이 있다. 애증의 관계 아래 마음의 상처가 깊다. <빨간 버스> 그리고 빨간 엄마의 얼굴이다.

선생님들은 또 어떤가. 회색빛 칠판에 수학공식이나 윤리 명제를 적으며 수업을 하는 것 같지만 그 안에서 자기 딸을 향한 관심만 피력하거나, 자신들과는 상관없다는 듯 교육현장의 부조리함을 꼬집고, 학생들에게 관심있는 척 하지만 무기력하다. 이 모든 것에 그들 스스로 별표를 친다. 합창반을 담당하는 음악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관심이 많은 것 같지만 세진에게 폭력적인 사랑 고백을 하는 스토커다. 선생님들을 연기한 강지은, 이은희 배우의 화법에 경쾌한 리듬이 배어 있어 관객들은 여러 번 웃는다.

두 배우뿐만이 아니다. 전반적으로 배우들은 경쾌한 리듬으로 속도감 있게 말한다. 사실 말의 내용은 무거운데 발화하는 방식은 무심한 듯 또 경쾌해서 그 간극이 묘한 울림을 준다. 그것은 <빨간 버스>의 파도 혹은 파동이다. 보는 이도 그 리듬을 탄다. 길 위에서 아이들은 오로지 말로만 자신을 표현할 수가 있고 그 말들엔 일상에서 듣지 못했던 그들의 영혼이 담겨있다. 어두운 그림자 안에 머물던 목소리들이 극장에서 몸을 얻은 것만 같다. 막간마다 애잔한 정서의 음악이 흘러나와 공연 전체의 분위기와 리듬을 잡기도 한다. 운동으로 대학을 가려고 여러 종목을 전전하는 동원이 농구공을 튀기거나 자전거를 타고 원을 그리는 움직임도 공연에 리듬을 만든다. 공부 잘 하는 형과 오토바이를 타다가 일부러 형을 떨어뜨렸다고 고백하는 동원. <빨간 버스>는 인물들 내면의 죄책감이나 상처를 공연의 리듬으로 외면화한다. 동원의 죄책감이 농구공이 되어 바닥을 치는 식이다. 

 

 

공연을 보기 전에는 ‘박근형이 청소년극을?’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박근형은 어둡고 청소년극은 밝을 거라고 생각했었던 거다. <빨간 버스>는 어둡고 동시에 솔직한, 신랄한 청소년극이다. 우선 이런 질문부터 꺼내들게 한다. 아이를 가지거나 낳으면 학교에선 자퇴밖에 길이 없는 걸까? 옆자리에 앉은 관객들은 ‘학교가 저러면 안 되는 거 아냐?’ 라며 속삭인다. 세진은 엄마에게 마지막 부탁이라며 고등학교는 마칠 수 있게 학교에 잘 말해달라고 하지만 세진의 엄마는 그마저도 들어주지 못한다. 학교도 엄마도 길바닥의 찬 바람과 다를 바가 없다.

세진은 어렸을 때의 기억을 떠올린다. 유치원에 가기 위해 탔던 노란 버스에서 아직도 못 내리고 있는 거 아니냐고, 자신이 과연 내릴 수 있을지 자문하는 세진의 그 이야기에 아이 울음소리가 겹쳐 들린다. 아이는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리니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곧이어 교실문이 열리고 세진이 걸어나간다. 왠지 자유로워 보인다. 그런데 차가 끼익 서는 소리가 크게 들린다. 소름이 끼치고 불쾌하기까지 하다. 그제야 아이 울음소리가 불길한 전조였다고, 마치 꿈에서 아기가 울면 우환이 생긴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세진의 죽음을 암시하는 소리였다고 머릿속에서 몇 초 전을 복귀시켰다. 세진의 현실이 그리고 미래가 꿈처럼 휘발되어버리는 순간이다. 작가 박근형은 이래서 또 얄궂다. 왜 세진을 죽게 해야만 했을까. 세진은 ‘죽어가면서’ 관객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미소 어린 그 얼굴이 관객들의 시야에 들어옴으로써 학교의 안과 밖을 구분 짓는 그 틈은 불편한 질문이 된다. 교통사고는 비유. 교실 밖의 세상은 돌연 세진에게 사회적 죽음의 문턱을 밟게 한다.

 

 

<빨간 버스>는 만들어지는 과정 속에서도 여러 질문과 대답 사이를 탐험했다. 공연팀은 ‘빨간 버스 승객단’이 된 실제 고등학생들과 대화를 나누고 진솔한 반응을 공연에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팸플릿에는 세진의 일기를 완성시켜달라는 질문에 고등학생이 자필로 적은 페이지가 수록되어 있다. 눈에 띄는 부분을 옮겨본다.

‘사실, 버스를 타고 학교를 갈 때의 기분은, 그리 상쾌하지 않았어. 다만 유치원 버스를 타고 갈 때면 집에서 떠난다는 해방감에 상쾌하다고 느꼈던 것 같아. 누구나 그렇듯 어렸을 땐 더 멀리 더 높이 가는 것을 원하니까.’

연극 <빨간 버스>는 유치원 노란버스가 우리를 가두고 미친 버스가 돼버리는 것은 아니냐고 반문한다. 극중의 고등학교 이름도 노란 고등학교였다. 노란버스는 관객들의 머릿속에서 빨간 버스로 깜빡인다. 무대 위 신호등처럼. 횡단보도는 중간에 끊기고 선생님도 학생들도 서로에게 건너갈 수 없다. 세진의 영정사진이 길 한복판에 멈춰 있다. 우리는 그곳을 건너온 걸까. 영영 횡단보도에서 살고 있는 건 아닐까.

마지막 공연, 박수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사진출처 : (재)국립극단 공연기획팀

 

 

  >>>  출연진 소개

 강지은 [강 선생 역]

<불 좀 꺼주세요><오!맙소사!><남에서 오신 손님><크루서블><피그말리온><여관집 여주인><말괄량이 길들이기><달아달아 밝은 달아><마라사드> 외 다수

* 1997 대한민국연극제 신인연기상 / 2001 서울공연예술제 연기상

 곽성은 [세진 엄마 역]

<산불><인간의 시간><침향><미망인들><20세기 소년소녀 창가집><레옹세와 레나><트레비스티스><취리히1917><칼맨> 외 다수

 이은희 [이 선생 역]

<연상의 여자><유리로 만들어진 세상><번지없는 주막(악극)><기생비생 춘향전><마르고 닳도록><돼지와 오토바이><태><집><어느 계단 이야기><울고 넘는 박달재(악극)><파몽><황색 여관><통닭><맹진사댁 경사><인생차압><오레스 테스><서울은 탱고로 흐른다> 외 30 여편

* 1997 충북연극제 우수 여자 연기상 / 2010 충북연극제 최우수 연기상 / 2012 충북 예술인상

 이봉련 [삼총사 봉련 역]

연극 <꿈><전명출 평전><벌><백년, 바람의 동료들><올모스트, 메인> <로베르토 쥬코> <술집-돌아오지 않는 햄릿><내가 가장 예뻤을 때>뮤지컬 <식구를 찾아서><빨래> <로미오와 베르나뎃><사랑에 관한 다섯 개의 소묘>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광해, 왕이 된 남자><내가 살인범이다>

* 2011 공연과 리뷰 선정 PAF 여자연기상

 김정민 [삼총사 정민 역]

뮤지컬 <화성에서 꿈꾸다><굿모닝학교> / 연극 <이름><7인의기억><맛도둑들><모퉁이가게><덫><유브갓메일> * 2007 서울연극제 신인연기상 / 2011 2인극 페스티벌 연기상

 신사랑 [세진 역] <어디든 맨발로><<우투리1.1><전명출 평전><유령소나타>

 안준형 [음악 선생 역]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주인이 오셨다><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훔볼트의 정원><그래도 축제><인간의 시간><로맨틱한 인생> 외 다수

 김동원 [남학생 동원 역]

연극 <뜨거운 바다><단막극 연작 - 방문><느릅나무 밑의 욕망><한 사람을 위한 이중주><햄릿><벽장속의 아이> / 영화 <December><태풍태양>

 

 >>> 작, 연출의 글

 “아이들도 이미 오래전에 어른의 세상을 눈치 챘다”

 // 아수라 세상

 어른, 아이,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살기 힘들단다.

 매일 일하고 노력해도 삶은 언제나 고통의 세월

 언제나 제자리다

 아니, 점점 바닥으로 추락하며 마지못해 산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일어설 길이 없다

 한 시간 시급 알바를 하여도

 한 끼를 해결 못하는 게 현실이다

 더럽고 치사하고 아니꼽다

 꽉 막힌 인생의 해결 방법이 없다

 우선 크게 한탕 해 쳐 먹으면 그만이다

 법은 이미 공평하지 못한지 오래다

 돈이 최고다

 돈만 있으면 법과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

 사실이다 현실이다

 삼척동자,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다

 그러니 어른들의 삶은 건강하지 못하다

 어른들의 인생이 그러 할진데 그 자식들의 인생 역시 뻔하지 않은가

 양반 상놈의 계급은 학벌과 가문의 계급으로 나뉘어

 이 첨단의 세상 밑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사람을 갈라 나누어 놓았다

 삼성을 욕하면서도 삼성에 취직하고 싶어한다

 아이들도 이미 오래전에 어른의 세상을 눈치 챘다

 아이들은 어른의 세상에서 배운다

 너무 많이 배워 이젠 배울 것이 없다

 그래서 아이들도 병들었다

 아이들이 불쌍하다

 학교는 이미 오래전부터 장사꾼들이 접수했다

 세상에 흠모 할 선생이 사라졌는데

 월급쟁이 학교에 선생다운 선생이 남아 있을 리 있겠는가

 성공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눈치껏 안 걸리고 잘 먹고 잘사는 방법 밖에는 없다

 부디 바라는 건

 우리 아이들이 하루 빨리

 이 지긋지긋한 땅, 이 무지몽매 불구자 같은 어른들 곁 떠나

 사람의 세상 만들어 사람처럼 살기를 꿈 꿀 뿐이다 //

 2012年 10月, 박근형

 

 >>> (재)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

 “아시아 최초의 국립어린이청소년극단을 꿈꾸다”

 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소장 최영애)는 어린이청소년극 분야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와 작품개발을 수행할 국립 연구소로, (재)국립어린이청소년극단을 설립하는 것을 목표로 해서, 2011년 5월에 출범하였다. 우선, 상대적으로 취약한 청소년 관객층을 대상으로 한 연구와 공연을 통해, 청소년 연극의 올바른 방향성과 모델을 제시하고자 한다. 2011년 국립극단 첫 번째 청소년극 <소년이그랬다>를 시작으로, 2012년 <레슬링 시즌>, <예술가청소년창작벨트> 등 우수 청소년극의 작품개발을 진행하고 있으며, 올해 상반기에는 국립 어린이청소년극단 해외사례연구, 국제심포지엄, 청소년극 현장 순회공연 등을 활발히 진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