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단상들] 음식과 예술 - 보마

2013. 2. 26. 23:55Feature

 

음식과 예술

 

글_보마

 

최근 효자동에 위치한 한 설렁탕집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 한우만 사용한다던 그들의 자존심은 한 TV 프로그램의 취재 앞에 무너졌다. 40년의 전통을 자랑하던 뽀얀 국물은 미국산 소의 유물인 것으로 드러났다. 월등히 비싼 가격이었지만 한우만을 고집한다는 그들을 믿고 찾았던 소비자들은 보기 좋게 배신당했고, 실망감을 넘어서 분노를 느꼈다. 한편 크라잉넛과 씨앤블루 얘기도 시끌시끌하다. 크라잉넛 측에서 본인들의 음원 위에 핸드씽크로 연주하고 노래한 씨앤블루에 음악적 지적 재산권 침해로 소송을 건 것이다. 이 영상으로 DVD를 제작해 판매 수익을 본 CJ E&M과 크라잉넛은 그로 인한 수익에 대해 이미 합의한 바 있다. 크라잉넛은 본인들의 연주와 노래를 자신의 것인양 무대에서 펼친 씨앤블루에게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위의 두 사건에서 돈냄새가 난다. 한우가 아닌 육우나 젖소, 나아가 미국산 소를 사용하는 것은 재료비를 절감하여 이윤을 많이 남기기 위해서일테고, 크라잉넛과 씨앤블루 사이에는 인디밴드와 대형 기획사 소속의 아이돌이라는 자본의 격차가 보인다. 우리의 입이 즐기는 음식, 우리의 귀가 즐기는 음악에 돈이 묻어 있다. 다른듯 닮은 요리와 예술을 주제로 오늘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명동예술극장에서 상연된 연극 <키친>의 한 장면, 출처 : 연합뉴스(사진=강일중)

 

최근 먹거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맛집을 찾아 다니는 사람도 많아졌고 건강에 좋은 음식에 대한 인식도 높아진 게 사실이다. 요리 서바이벌 프로그램과 제대로 된 음식을 만들어 파는 착한 식당을 찾아다니는 프로그램이 인기를 끄는 것도 맥을 같이 한다. 먹고 사는 것에서 좀 나아가 잘 먹고 사는 것이 사람들의 관심사가 된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패스트푸드점의 버거로 한 끼를 때우기 일쑤인데다 번화가에는 프랜차이즈 음식점, 카페들이 빽빽하다. 유명하다는 음식점도 심심찮게 뒷통수를 때리고, 소비자 고발 프로그램을 보면 볼수록 세상에 믿고 먹을만 한 게 없는 것 같다.

배타고 온 재료로 재료값을 낮추고, 조금 신선하지 못한 맛도 조미료로 감춘다. 기계화된 대량생산 시스템에선 인간과 기계의 합작으로 음식을 만든다기보다 조립해낸다. 이렇게 바람직하지 않은 환경에서 만들어진 음식일지라도, 현실적으로 시간에 쫓겨 얼른 끼니를 때워야 한다면 뾰족한 수가 없다. 음식이 빨리 나오고 맛은 썩 나쁘지는 않고, 가격이 적당하다면 어느 정도의 손님이 확보되는 것이다. 자꾸 그런 음식을 먹다보면 조금씩 입맛이 길들여지거나 더 나은 음식을 굳이 찾지 않게 된다. 집에서 만든 떡볶이나 짜장면의 맛이 밋밋하게 느껴지고 딱히 먹을 게 안 떠오르면 그냥 햄버거나 먹으러 가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여기서 악순환이 시작된다.

음식 장사도 장사이니, 사람들이 좋아하고 잘 팔리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수익을 고려한다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수요와 공급이 모두 한 쪽으로 치중될 때, 사람들이 새로운 음식에 관심을 전혀 가지지 않을 때 우리는 어떤 결과와 당면하게 될까. 예상되는 결과 중 하나는 하향 평준화다. 많은 사람들의 혀를 만족시키는, 손님이 보장되는 음식만 만들어낼 뿐 새로운 시도가 사라지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결국엔 다양성도 배부른 소리가 될 것이다. 획일화되는 것이다. 좀 다른 음식을 만들어보려고 노력해도 인정받지 못하는데 그 방법을 고수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최악의 상황에 우리는 거기서 거기인 음식으로 배를 불리는 신세가 될 것이다.

 

▲맛집소개를 둘러싼 공중파 방송사의 조작의혹을 다룬 영화 <트루맛쇼> 포스터

 

이와 유사한 모습이 예술계에서도 등장한다. 수익성을 목적으로 하는 문화 컨텐츠의 경우 많은 사람들의 수요를 만족시킬 수 있는, 돈이 되는 컨텐츠가 자꾸 만들어진다. 하나의 유행코드가 있을 때, 그것의 변주가 시장을 장악하기도 한다. 대중음악 시장에서 어느 순간 폭증한 아이돌은 이제 그 수를 헤아리기도 어려운 수준이다. 걸그룹의 음악과 퍼포먼스에 섹시컨셉이 유행하자, 너도 나도 야한 옷을 입고 방송 가능한 수위에서 아슬아슬한 모습을 선보인다. 음원차트와 음반판매 상위권을 아이돌이 모두 차지하고 있다면, 사람들이 아이돌의 후크송만 찾는다면 다른 음악들이 장려될 수 있을까?

대중들이 열광하는 컨텐츠만 생산되고, 유행이 바뀌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른 것들만 만들어진다면 여러 문화컨텐츠가 공존하질 못하고 유사한 것들이 나열될 것이다. 다양한 모양과 색깔의 조각들이 아니라 비슷비슷한 것들의 뭉치가 여기저기 생기는 것이다. 이렇게 가다간 직관적으로 사람들의 반응을 끌어내는, 쉽게 소비할 수 있는 컨텐츠만 범람할 것이다. 대중의 입맛을 자극하지 못하는 다른 예술은 이런 세상에서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이 역시 하향 평준화와 획일화를 불러올 위험성이 있다.

자신이 만들고자 하는 음식을, 새로운 음식을 만들어내려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있어줬으면 좋겠다. 아침 일찍부터 직접 빵을 굽는 동네의 조그마한 베이커리가 더 손님으로 북적대길 바라고, 유기농 채소를 사용하는 식당의 고집을 지지하고, 직접 볶은 커피나 공정무역 커피를 파는 카페를 응원한다. 임대료와 재료비를 계산하며 한숨쉬는 한이 있더라도, 만들고자 하는 음식을 만드는 그들을 계속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같이 돈 없고 힘 없는 사람이 해줄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자주 찾아주는 것 뿐이지만, 그들의 음식을 맛있게 먹을 때마다 오래 오래 있어주세요란 마음을 담아 값을 지불한다. 하지만 나같은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조금은 더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해볼 수 있지 않을까.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조금씩이나마 수입이 늘테고, 좋은 음식을 만드는 가게들이 자리를 지킬 수 있을 수도 있으니까.

 

▲친환경 마을식당 성미산밥상의 내부, 출처 : http://cafe.daum.net/sungmisanorganic

 

예술도 마찬가지다. 유행과 수익성에 초점을 맞춘 컨텐츠 외에 다양한 예술활동이 공존할 수 있으려면 예술을 소비하는 사람들의 관심의 폭이 넓어져야 한다. 대중 문화는 저급하고, 새로운 시도를 하는 모든 예술만이 존중받아야한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조금 걱정되는 것은, 예술의 소비가 편중됨에 따라 초래될 예술의 하향평준화와 획일화인 것이다. 우리는 한국 영화의 배경이었던 단성사가 쓸쓸하게 역사를 마무리하는 것을 보았다. 매년 여성영화제를 열었던 신촌의 아트레온이 곧 있으면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바뀐다. 홍대에서 30년간 같은 자리를 지켰던 리치몬드 제과점이 높은 임대료의 벽에 부딪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프렌차이즈 카페가 들어섰다. 이 현상은 누구 하나를 탓하기 어렵지만 곱씹을수록 쓴맛이 난다. 결국 소비자의 선택이 큰 힘을 갖는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장에 흐름을 바꾸기는 어려울지라도, 사람들이 이런 상황에 서서히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면 다양한 예술 컨텐츠가 생산될 수 있는 환경이 되지 않을까. 그렇게 된다면 우리도 지속 가능한 예술을 천천히 현실화할 수 있지 않을까.

객관식엔 하나의 답이 존재한다. 정답인 하나의 답안이 선택되고 나머지는 잊혀질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객관식 시험 문제와는 다르다. 다수가 선호하는 답안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고르지 않는 답안까지도 유지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문제에 정답과 오답은 없으니까 말이다.

 

 필자_보마

 소개_남다른 보통 사람을 꿈꾸는 스물 몇 살. 여러 가지 의미에서 ‘뭐 먹고 살지’ 고민 중입니다. 트위터(@boramoo)에 자주 출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