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4. 24. 09:52ㆍFeature
잃어버린 것을 애도하며
글_ 성지은
봄이 오고 있습니다.
살을 에는 긴 겨울을 지나 노오란 개나리, 하아얀 목련, 아련한 벚꽃이 차례대로 피고 집니다. 하나씩 피어나는 새 생명을 보며 마음은 까닭 없이 부풀고 몸은 이유 없이 들썩입니다. 낯설지만 반가운 존재들을 맞이하는 기쁨으로 충만한, 바야흐로 봄입니다.
비어있던 자리를 하루가 다르게 채워나가는 것들을 보며 조금은 다른 것을 생각해봅니다. 채워진다는 것, 가지게 된다는 것,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닌 비어있는 것, 없어진 것, 그리하여 잃어버린 그것입니다. 알토란같은 백목련이 피어난 자리에는 원래 무엇이 있었을까요. 잠에서 깨어난 개구리와 꼼지락거리는 개미떼들이 차지하면서 무엇이 없어져 버렸을까요. 그리고 이 봄날의 풍경을 눈 안에 가득 담기 전에 나는 무엇을 잃어버렸을까요. 무엇을 잃어버렸기에 새로이 나타난 풍경에 가슴 벅차 하는 것일까요.
새까만 하늘에서 혼자 빛을 내는 밤벚꽃을 보며 마치 하늘에서 그 벚꽃이 있는 자리만 오려낸 것 같은 생경함에 놀란 적이 있습니다.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벚꽃은 그곳에 있었다가 사라진 무언가 대신 그 자리를 채우며, 그것이 여기 있었다고 외치는 듯 했습니다. 정체 모를 그것이 그렇게 사라지지 않았다면, 그리고 꽃이 대신 들어서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 아름다움을 만날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밤벚꽃은 그렇게 잃어버림을 채우면서 잃어버림에 대해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종종 잊고 있었던 사실, 나타남 뒤에는 실은 사라짐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 <Project 34> 설치 전경
생경했던 벚꽃의 아름다움처럼, 어떤 예술들은 잃어버린 것들, 사라진 것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추억일 수도 있고 떠나가 버린 연인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되돌릴 수 없는 젊음이나 주워 담을 수 없는 말 한 마디일 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예술은 잃어버림을 대신하며 잃어버림에 대해 노래합니다. 그리고 애도합니다. 원래는 오롯이 나의 것이었던 그것이 더 이상 그 누구의 것도 아니게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씩 잃어가는 건
자연스러운 것
초연한 척 되뇌이지만
내 가슴은 정말이지 바다로
빛 좋은 그곳에 빠진 두 별
- 김일두 <극동의 3리터> 중
그래서 예술은 잃어버린 것을 대체하는 일종의 놀이입니다. 반 고흐의 구두 그림이 품은 흔적이나 곤잘레스-토레스가 연인과 함께 누웠던 침대는 작가의 상실을 대신 나타내 줍니다. ‘하나씩 잃어가는 것’을 노래하는 김일두나 다신 오지 않을 ‘순간을 믿어요’라고 노래하는 언니네이발관은 상실의 아픔을 토닥여 줍니다. 잃어버린 것이 정신분석학이 이야기하듯 인간이 원초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합일의 느낌인지, 또는 살아가면서 억압된 소원들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 빈 자리에 피어나는 것은 바로 예술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나는 애도하는 예술을 품으며 짧은 애도의 순간을 갖습니다. 그림을 보는 일 분, 노래를 듣는 삼 분, 책을 읽는 한 시간, 영화를 보는 두 시간 동안 내가 잃어버렸던 것들은 비어있는 자리로 다가와 마음을 건드립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기억할 수 있다면 마음 아파할 테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면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히겠지요. 그렇게 예술 작품이 주는 가슴 벅찬 감동은 애도 의식의 한 과정이 됩니다. 나는 예술 작품을 보며 그렇게 사라진 것을 기억하며 슬퍼하고, 그리하여 새로운 것을 맞이함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 고승욱 개인전 <삼각의 서> 리플렛 단면
예술 작품은 봄꽃처럼 언제나 반갑고, 슬픕니다. 내가 잃어버린 것을 충분히 슬퍼하고 그 비어있는 자리를 보듬어 주는 예술은 전적으로 나만의 것입니다. 동시에 모습은 다를지라도 함께 슬퍼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예술은 여럿의 것이기도 합니다. 다가온 봄과 함께 이제 곧 여러 예술들이 쏟아져 나오겠지요. 어김없이 상실을 애도하는 시간이 이어질 것입니다. 홀로 또는 여럿이서 행하는 애도의 의식, 그 충만한 시간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우리는 또 다시 잃어버려도 괜찮을 만큼, 빈 자리를 채우게 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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