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2. 13. 14:15ㆍReview
2014 산울림 고전극장
‘분노의 포도’가 시든 뒤에는
극단 걸판 <분노의 포도>
글_유햅쌀
“모르겠다”로 답하면 그만인 요즘
어떤 ‘포도’, 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서울살이’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다. 도대체 고전을 앞에 떡하니 펼쳐놓고 무슨 사는 게 어쩌고저쩌고 넋두리 하려고 그러느냐고 그건 좀 아니라고 말려도 어쩔 수 없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사 부탁한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고 얼굴 마주 보고 쉽게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가 있다. 묻고 싶고, 말하고 싶은데 꾹꾹 눌러 담아 참아왔던, 실은 생각해보면 별일 아닌 그냥저냥 살아가는 그런 이야기다. 누군가 잘사느냐고 안부를 물으면 “모르겠어, 뭐 다 그렇지.”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던 그런. 또 누가 그럼 일종의 ‘분노’에 찬 이야기를 꺼낼 거냐고 질문하신다면 다시 “모르겠어, 뭐 다 그렇지.”라고 답할 수밖에 없을 그런.
캘리포니아 드리밍 VS 서울 드리밍
6년째, 가 되었다. 이 슬픈 욕망의 도시 서울에 온 세월이. 그렇다고 온 나라에 대공황이 찾아와 농촌에 트랙터가 들어오고 지주들의 횡포가 극심해져 떠날 수밖에 없었던, J.E. 스타인벡의 소설 『분노의 포도』에 나오는 오클라호마 소작농 조드 일가처럼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온 것은 아니다.
응? 아니라고? 아, 아니다. 아니지, 다시 생각해보니 맞다, 맞는 것 같아.
조드 일가가 캘리포니아로 털털대는 트럭을 타고 떠나야 했던 것처럼 나도 혼자 철컹대는 기차를 타고 서울에 왔다. 앞으로 인생을 책임져 줄 일자리를 찾으러 왔다. 아주 많은 사람이 먼 미래가 여기 있다고 했으니까. 옛 속담에 ‘말은 태어나면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말도 있지 않나. 아무튼, 왜 그래야 하는지, 그 미래가 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노력한 만큼 얻을 수 있는 어떤 대가가 있을 거라고 모두들 그렇게 말했다. 어찌 됐든 이렇게 훌쩍 시간이 흘러 ‘잉여킹’이 됐다. 거대한 피라미드의 세계에서 나는 어디쯤에 있을까. 다이아몬드로 올라갈 수 있기는 한 걸까. 내가 진짜 다이아몬드가 되고 싶긴 한 걸까.
머리가 지끈댄다. 조드 일가의 ‘캘리포니아 드리밍’이 폭력과 굶주림, 착취, 분열, 절망으로 가득 찼다면 ‘서울 드리밍’은 이뤄질 수 없어 그냥 슬픈 거라고 말하는 편이 낫겠다. 감정을 천진하게 드러내느니 꼭꼭 숨겨 예쁘게 포장하는 편이 훨씬 나아서 밑도 끝도 없이 피곤한 그런 슬픔 말이다. 굶주림은 사라졌지만, 폭력과 분열과 절망은 극심해진 것 같은데 그 정체를 알 수는 없다. 이렇게 도시 서울은 끊임없이 치장 중이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놈이다.
그렇다고 TV에 드라마에 영화에 나오는 88만원 세대의 전형들처럼 나와 내 주위를 둘러싼 공기가 꼭 그렇게 슬픈 것만은 아니다. 글로벌 도시 서울에서 스치는 사람들은 전보다 훨씬 무표정하고 무감각해진 것 같다. ‘힙’하고 ‘쿨’한 것으로 자기를 꾸며서 일종의 패션잡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데 뭐. 어쩌면 나도 그 중에 한 사람인 것 같다. 욕망을 숨긴 채 살아가느니 욕망을 훤히 까놓고 속물이 되는 게 낫다는 생각도 해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조드 일가처럼 가족애로 똘똘 뭉쳐 살아갈 생각도 없다. 그냥 혼자가 편해졌어. 외롭다고 습관처럼 말하는 것도 이제 지겨워진 것 같다니까. 그래서인지 인터넷 세상을 떠나면 딱히 슬퍼하고 공감하고 화내고 분노하는 사람도 없다. ‘좋아요’의 끝에 애처롭게 매달린 진실성이란. 서울은 정말이지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놈이라니까. 생각해보니까 내 속도 잘 모르겠고. 아무튼, 이놈은 『분노의 포도』에 나오는 대놓고 힘겨운 본격 자본주의 태동기의 캘리포니아 농장들보다 훨씬 더 고차원으로 진화한 이상한 생명체다. 이상한 구조에 대한 ‘질문’ 자체가 그다지 없어서 ‘모르겠다’고 언제든 답해도 무방할 만큼 감정이 없다.
그런데 그럼 도대체 화는 누구한테 내야 하지? 나는 무엇을 위해서 서울에 살고 있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습관처럼 “아이 참, 살 수가 없다”고 말하면서 “왜?”냐고 묻지는 않는 이상한 곳이다. 생이 어떻게 이어질지 모르겠다. 다만 결코 가늠할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감각의 영역이 확장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 서울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법을 지킬 수 없을 때”의 이야기
2014년 1월, 산울림 소극장. J.E. 스타인벡의 소설 『분노의 포도』가 ‘정의로운 천하극단 걸판(이하 : 걸판)’의 연극 <분노의 포도>로 재탄생했다. 그리고 저기 무대 위 “굶주린 사람들의 얼굴에서, 분노가 익어간다.” 어쩌면 이 두서없는 글은 지금 이 시대에 갑자기 <분노의 포도>를 왜 읊느냐고, 왜 무대에 올렸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답하는 일종의 이상한 답안 같은 것이다. 물론 ‘걸판’은 연극 ‘프로그램 북’에 이 이야기가 ‘대한민국의 현실’과 관계없는 것이라 못 박았지만 말이다.
무대 위의 사람들이 아스라한 슬픔과 분노로 떨고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법을 지킬 수 없을 때”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연극에는 원작의 기나긴 가족사를 비롯한 수많은 사건들 대신, 살인자가 된 톰 조드가 가족들과 함께 캘리포니아로 떠나는 여정과 그곳에서의 삶을 응축시켜 담았다.
하지만 연극의 여정은 결코 슬프지만도, 아프지만도 않다. 배우들은 무대는 물론 관객석을 누비며 관객들과 여정을 함께한다. 게다가 연극인 줄로만 알았던 공연에는 음악과 노래까지 추가되어 뮤지컬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무대 장치인 나무 트럭은 이들의 사연을 실어 나르는 가장 중요한 소품이기도 하고, 연극 속 인물들의 삶의 터전인 집과 트럭으로 시시때때로 변한다. 핸들과 헤드라이트를 갖춘 움직이는 트럭이었다가, 울타리였다가, 천막촌으로 그 역할을 계속해서 바꿔 지루함을 없앴다. 게다가 이 연극에서 일종의 ‘갑’ 역할-그들의 역할을 포괄적으로 부른다면, 이 방법밖에는 없을 것 같다-을 맡은 브로커, 농장 주인, 식료품 가게 주인, 보안관 등등의 인물은 세 명의 배우가 돌아가면서 맡았다. 일인다역을 맡은 배우들의 재치 있는 연기 덕에 조드 일가가 맞은 심각하고 서러운 상황들이 더욱 두드러진다.
연극의 막이 오르고, 오클라호마의 소작농들은 "왜 이곳을 허무느냐“고 계속해서 질문한다. 그런데 고용된 청년은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고용한 사장 때문이라고 답한다. ”그러면 사장을 데려“오라고 외치자, 다시 답한다. 사장은 잘못이 없다고, 땅을 가진 은행이 잘못한 거라고. ”그렇다면 은행을 데려“오라고 다시 외치자, 청년은 다시 말한다. 작은 은행들은 세계적인 은행에서 투자를 받는다고, 그렇다면 세계적인 은행을 데려와야 오클라호마 농장의 트랙터들을 물리치고 땅을 찾을 수 있을까?
결국, 이들은 풍요로운 일자리를 보장하는 캘리포니아로 떠나기로 결심한다. 갑작스러운 할아버지의 죽음에, 톰 조드의 아버지는 다시는 되찾지 못할 고향 오클라호마에 자신의 아버지를 묻고 길을 떠난다. 그들은 26번 도로를 향해 떠나고, 무대 뒤에는 영상이 흐른다. 하지만 26번 도로를 지나는 게 전혀 쉽지 않다. ‘정당하게 값을 치르는 사람’들은 ‘정당하지 않은 값을 받는 사람’ 때문에 타이어도, 빵도 구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정당하지 않은 값을 받는 사람’이 ‘정당하게 값을 치르는 사람’을 무작정 괴롭히는 것은 아니다. 이 관계가 착취-피착취의 관계처럼, 또는 갑-을 관계처럼 보이지만, 사실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지 분명하지가 않다. 문제는 ‘갑’ 위에는 ‘더 큰 갑’이 있고, ‘더 큰 갑’ 위에는 ‘더욱더 큰 갑’이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꿈과 희망으로 넘쳐흐를 줄로만 알았던 캘리포니아에는 더 큰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이미 조드 일가의 할머니는 사막에서 하늘나라로 떠나고,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넘쳐나 일자리는 이미 포화상태다. 게다가 국영 천막촌은 청렴한 운영으로 인해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다. 보안관은 ‘법’ 위에서 ‘빨갱이 새끼’를 잡아들이려 하고, 노동권을 주장하는 목사는 ‘빨갱이’의 주동자가 되었다. ‘일한 만큼 많이 버는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복숭아 농장에서는 학교도 가지 않은 막내딸까지 생업에 뛰어들어야만 한다. 굶주린 사람들을 돕는 것은 굶주린 사람들뿐, 가진 자들은 오렌지를 기름에 태워 더 큰 부를 누리려 한다. 모순과 착취가 넘치는 곳에서 조드 일가가 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함께 있는 것뿐’이다.
함께하지 않는다는 것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제 사람들은 조드 일가처럼 ‘함께하는 것’을 택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사람들은 <분노의 포도>에 나오는 목사와 캘리포니아의 사람들이 노동의 권리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그리고 우리 이전의 수많은 이들이 그래 왔던 것처럼 더 이상 분노하지 않는다. ‘우리’라고 말할 수 없는 수많은 개인들은 저마다 쏟아지는 피로를 이겨내지 못하고 갑-을 관계를 자신도 모르게 내면화하고 만다. 게다가 갑이 되어도 편치 않은 세상, 변명은 늘어가고 미안한 마음은 커지는데 그것을 행동으로 옮겨내기에는 부담감을 떨쳐낼 수 없다. 그리하여 분열과 파국은 그칠 줄을 모르고 그 세를 확장해나가고 있다.
어쩌면 이 욕망의 서울에서, 모두들 몸과 마음이 편치 않은 것도 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갑이 되고 싶은 욕망 너머에는 연민도, 부끄러움도 없다. <어매이징 그레이스 Amazing Grace>가 나지막이 흐르는 연극 무대를 떠나 현실로 돌아오면,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 줄 대상은 더는 없을뿐더러, ‘내가 죄인’이라는 것도 피로와 멘붕 때문에 잊고 살아가는 게 차라리 편한 일이다. 이렇게 우리들 형편은 자꾸만 답답해져 간다.
그래서 이 도시가 슬프다. 포도처럼 주렁주렁 열린 분노가 영글고, 어느샌가 아무도 모르게, 소리 없이 끝이 났다. 아무도 묻지 않아서 슬프다.
<분노의 포도>는 각성제가 될 수 있을까
무대 위에 서린 결연한 눈빛, 결연한 눈동자 위에는 가난의 광기와 서러움이 가득 차있다. 농장에 트랙터가 들어오고 나서 생긴 ‘어떤 변화’는 실상 ‘어떤’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커지고 커져, 2014년을 맞이했다.
2014년, 지구촌 어느 한쪽에서는 <분노의 포도>에 등장하는 상황이 일어나고 있고, 또 어느 한쪽에서는 농장이 아닌 산업단지로, 혹은 도심 한가운데의 철거촌으로 얼굴을 바꾸고 무대를 옮겨 계속되고 있다. 끝내 그 누구도 ‘무한 자본 신뢰’의 질주에 브레이크를 걸지 못한 것이다.
실은 이 끊임없이 지속되는 지독한 순환에 대한 이야기는 <분노의 포도>를 무대로 옮긴 ‘걸판’의 오세혁 연출이 최근 몇 작품을 통해 반복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이기도 하다. 그는 근작-<무슨일이 있어도 난 널 지켜줄꺼야 친구야>, <레드 채플린> 등-을 비롯한 기존에 선보인 작품에서 계속해서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그 대립 안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본의 아니게 선택의 순간에 놓인 소시민들의 삶을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우스꽝스럽게 그려왔다.
그가 선택한 <분노의 포도> 역시 이 맥락 안에서 살아 숨 쉰다. 이 연극 안에서, 배우들이 ‘분노의 숨’을 내쉴 때와 가족애로 물들 때, 또 아리게 웃을 때의 표정 사이의 간극이 커 보이다가도 한 주제 안에서 상통하는 것은 오세혁 연출이 말하고 싶은 이야기가 결코 이분법으로 나눠 말할 수 없는 삶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분노의 포도>는 ‘걸판’이 선택한 과거이자 현재, 미래이기도 하다. 배우들의 경직된, 하지만 강렬한 표정 너머에는 우리네 삶이 있다. 물론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지나치게 분명하다고 투정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더이상 질문하지 않고, 더이상 분노하지 않는 시대에, 여기, 말 하려는 연극 <분노의 포도>가 있다. 어쩌면 이 연극이 진짜 말하고 싶었던 것은 ‘분노의 포도’가 시든 뒤에 불어 닥친 우리의 무관심에 대한 것이 아니었을까.
*사진제공_극단걸판
**극단걸판 SNS페이지 바로가기 >>> https://www.facebook.com/gulpanzone
***산울림 소극장 웹페이지 바로가기 >>> http://www.sanwoollim.kr/
필자_유햅쌀 소개_시트콤같은인생살이를위해, 재미진무언가를찾습니다. 인간은유희적동물이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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