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김구림 개인전 <사라진 아름다움>, 플레이스막 (4. 19-5. 31)

2014. 5. 20. 02:46Review

 

연남동에서 김구림을 보다

김구림 개인전 <사라진 아름다움>, 플레이스막 (4. 19-5. 31)

 

글_김솔지

 

1. 들어가며

한국 아방가르드 미술의 선구자 김구림의 개인전 <사라진 아름다움>이 열렸다. 작년 하반기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초대전 <잘 알지도 못하면서>를 내린지 반 년 만이다. 2009년 홍상수 감독 영화제목을 따 스스로를 자평할 만큼 김구림은 외국에서보다 국내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작가다. 그런 그는 제 2의 전성기를 보내며,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이지만 늘 해왔던 것처럼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전시가 열린 곳은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과는 사뭇 다른 연남동의 ‘플레이스막’이다. 이곳은 유기태 디렉터가 2010년 개관한 독립예술공간으로, 그 당시만 해도 한적하고 오래된 주택가였다. ‘막’이 자리한 이후로는 하나둘 생겨난 ‘문화적 공간들’과 함께 주거와 예술이 공존하는 골목을 형성하면서 “예술 불모지에서 부족한 예술 향유를 해소”하겠다는 설립 취지에 맞게 그 지역 분위기를 바꿔가고 있다. 최근에 홍대 바깥으로 넓어진 문화적 공간들과 겹쳐지며 의도치 않게 더욱 많은 변화가 일고 있지만 말이다. 전시는 ‘막’과 ‘막사’라는 좁은 두 개의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2. 막 (placeMAK) : 음과양 (YinandYang) 설치 공간

 

투명한 유리문을 열고 ‘막(placeMAK)’으로 들어간다. 공기(atmosphere) 중에 이상하고 독한 냄새가 가득하다. 눈앞에는 보트 한 대가 놓여있다. 보트에는 썩은 물이 채워져 있고 그 물에는 모형사과, 마네킹의 얼굴, 한쪽 팔, 장난감 뱀 등이 던져져있다. 낯설고, 낡고 지저분하다. 불편해서 작품을 관조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미 전시서문에서 “당신이 전시장에 발을 디딘 순간, 이곳에서 풍기는 모든 분위기들은 어느새 당신을 불편하게 만들 것이다.” 등의 구절을 읽으며 ‘낯설음’과 ‘불편함’이라는 예방접종을 맞고 온지라 전시에서 느낄 수 있는 낯섦, 불편함, 불쾌를 어느 정도 준비하고 있던 차였다. 또한 현대예술 전시를 보러 다니면서 낯설고 불쾌한 순간을 접한 것도 여러 번이었다. 꼭 ‘보면서’ 낯설지 않더라도, 이를테면 몇 년 전 광주비엔날레에서 해외노동자들의 땀을 채집해 마치 향수를 시향 해보듯 냄새를 맡도록 한 작품과 같이 후각적으로 감상자를 불편하게 하는 작품도 더러 만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에서 감각을 통해 느껴진 것들은 단지 불편하다거나 불쾌하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강한 것이었다. 시각적으로는 쉬이 짜 맞춰지지 않고 후각적으로는 건강이 염려되는 이 상황에서 열고 들어온 유리문을 다시 열어 환기를 하는 것으로 불편함의 강도를 누그러트리려 해볼 뿐이었다.

 

YinandYang 13-S. 9 (부분), 2014 (좌)/(우) YinandYang 13-S. 10, 혼합재료, 50x50x12cm, 2013

 

두 작품은 형식적으로 닮지 않아서 직관적으로 연작이라고 생각지 못할 수 있다. 김구림은 예술이 완성된 그 형태를 위해, 예술작품의 존재를 위해서 작업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작품을 ‘만든다’라고 얘기하지 않는다. 세계의 한 사람으로서 그 시대를 읽어 보려는 과정이 고스란히 작품에 드러나도록 ‘표현’한다. 고로 이 두 작품은 <사라진 아름다움>이라는 이번 전시 제목과 김구림 작업의 지속적인 바탕이 된 ‘음과 양’이라는 근본적인 자연 원리와의 연결선을 잇는 넓은 공간 속에서 바라봐야 할 것이다.

 

3. 막사 (MAKSA) : 성형외과 퍼포먼스 무대

 

몸에 안 좋을 공기를 그만 들이키고자 또 하나의 공간으로 향하기로 한다. 막의 사무실로 쓰이기 시작해 ‘막사’라 이름 붙여진 곳이다. 맞은편 대우세탁소 뒤로 들어가니 ‘성형외과’라 적힌 간판이 막사를 안내한다. 참으로 성형외과 간판일 것 같지 않은 간판이다. 오픈 며칠 만에 많은 관람자가 다녀가 빈 곳이 없는 방명록 한 쪽에 이름을 끄적이고 안으로 발을 디딘다.

어둡고 기묘하다. 정면에는 천으로 스크린이 만들어져있는데 여기저기서 가져온 이미지가 작가의 뜻대로 조합돼 쉴 새 없이 돌아간다. 왼쪽 벽에는 붕대를 칭칭 감은 마네킹이 세워져 있고 그 뒤로는 성형수술 전문서적을 스캔해서 프린트한 종이가 몇 장 붙어있다. 그 아래에는 성형수술을 받았는지, 받으려는지 알 수 없는 마네킹이 붕대를 감고 누워있다. 붕대를 감았다는 것은 성형수술을 받았다는 말이지만, 그 붕대에는 성형 전에 피부에 수술할 부위를 표시해두듯이 곳곳에 선이 그려져 있기 때문에 마치 ‘비포’와 ‘에프터’가 포개져 있는 것 같았다. 성형전의 아름다움도 가리어지고 성형 후의 아름다움(?)도 드러나지 않아서 어떠한 아름다움도 지니지 못한 모습으로.

 

<성형외과> 전시설치전경, 2014 (플레이스막 제공) (좌)/(우) <성형외과> 전시설치부분, 2014

 

오른편에는 성형수술 도구들과 플라스틱 소재의 눈, 코, 입, 귀가 놓여있다. 이 이목구비들은 거푸집과 같은 틀을 이용해 복제한 것들이다. 작가는 이목구비를 플라스틱 장난감처럼 일률적으로 만들어서 이제는 보편화되어버린 무분별한 성형수술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다. 성형수술이 한시적인 규범(cannon)에 따라 각기 다른 얼굴들을 일률적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방식이다.

사실 이곳 막사는 막이 설치작품 전시공간인 것과 다르게, 성형외과 퍼포먼스를 위한 ‘무대’이다. 퍼포먼스는 오프닝날 한 번 진행됐다. 퍼포먼스에 대해 간략하게 얘기하면, 의사 역할 퍼포머가 환자 역할 퍼포머의 바람대로 이미 만들어진 이목구비를 가지고 성형수술을 해준다. 그러면 수술 받은 이가 ‘나 예쁘지?’라고 말한다. 찍어낸 이목구비를 엉뚱한 곳에 붙이고, 원래 자신의 얼굴은 붕대로 가리고, 그렇게 아름다움이 사라진 후에 역설적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을 향해 예쁘냐고 묻는 것이다. 작가는 아름다움을 위해 선택한 성형수술로 인해서 각자가 가진 고유한 아름다움이 사라지고 결국 얼굴이 같아지고 마는 결과를 퍼포먼스의 형식을 빌려 표현했다.

오프닝 이후에 막사에는 무대만이 남았지만, 그래서 관람객은 이 무대의 요소 하나하나를 작품으로 여길 수도 있지만, 이곳이 퍼포먼스 ‘무대’임을 각인시키려는 듯 무대 한 편에 퍼포먼스를 사진으로 기록해서 보여주고 있었다. 여기서 관람자는 무대 연출을 위한 사물, 영상, 이미지를 작품으로 감상할 필요는 없지만 작가가 성형외과 퍼포먼스 무대를 꾸미기 위해서 어떤 것들을 가져와야 했는지를 살피는 정도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덧붙여, 재밌게도 작가는 퍼포먼스 무대 요소 중에 이, 목, 구, 비를 하나당 3만원에 판매하고 있었다. 그 작은 액자에는 서명과 에디션 번호까지 적혀있다.

 

4. 나가며 : 평상에 앉아

막과 막사에서 만들어낸 낯설고 불편한 분위기는 무엇일까. 왜 올해의 음과 양은 낡고, 아름답지 않고, 더럽고, 마음을 심란하게 하는 거짓된 것들로 꾸며져야 했을까. 왜 작년의 음과 양은 인공적인 마스크를 써서 얼굴을 가린 모양이 되었을까. 퍼포먼스를 위한 성형외과 무대는 왜 그다지도 아날로그적이고 투박할까. 무대는 성형에 따른 일련의 사회적 양상을 비판하는 퍼포먼스를 위한 것이라고 하기에 압구정이나 강남에 깔린 성형외과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데, 왜 다른 걸까. 단지 전위 1세대 작가 김구림이 지금은 원로라서 오래된 아방가르드의 느낌이 나는 걸까. 평상에 앉아서 많은 의문들을 가지고 전시를 돌이켜본다.

그러다 디렉터를 만나 화학냄새의 정체를 물었다. 그 냄새는 썩은 물과 왁스가 만나서 풍기는 것으로 왁스를 애초에 의도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날이 따뜻해지자 벌레가 알을 까고, 자꾸 태어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취한 조치였던 거다. 작가가 일부러 왁스를 탄 것은 아니지만 전시장에 왁스를 푼다는 것에서 이 전시가 용인하는 불편함의 정도를 알 수 있었다.

어느 날, 김구림은 앞에 놓인 성형수술이라는 동전을 주시했다. 환상적이고, 아름답고, 깨끗하고, 매끄러운 것들이 그려진 면이 보였다. 그는 그 면을 한참 바라보다 이윽고 뒤집었다. 그러자 인공적이고, 오염돼 있고, 반복적이고, 획일화된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표현했다. 나는 이번 전시를 이렇게 읽는다.

그의 예술은 그의 말에 따라 “물체도 아니고 관념도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바라봄으로써 표현해보는 일련의 시도들이다. 이번 전시에서도 그는 “현대문명과 필연적인 관계”를 맺으며 매끄러운 표면 아래 감춰진 성형외과 이면의 모습을 표현하고 그럼으로써 끊임없이 스스로를 발견한다. 그런 그의 예술을 제도권 미술계가 애용하는 구역에서 벗어나 연남동이라는 동네에서 산책하듯 만날 수 있도록 해준 플레이스막에 감사한 마음이다. 모든 만들어진 것은 그 자체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을 만들어내려고 하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임을 생각하며, 각자가 다 다른 아름다움을 지녔듯, 각자가 가진 다양한 태도들이 우리가 마지막까지 지녀야할 것은 아닐지 생각하며 일어선다.

 

- 글에 큰따옴표로 표기한 김구림 작가의 인용문 출처는 다음과 같습니다. 김구림, <무명구조로서의 예술>, 『공간』, 1980, 6월호, p.28., 신진, 「김구림의 작업에 있어서의 오브제와 일상의 의미: 시대의 흐름에 따른 변화를 중심으로」, p.11.

 

  필자_김솔지

  소개_ 예술과 미학 사이를 오가며 이 사이에 놓인 것들을 말하고자 합니다

 

<사라진 아름다움> 김구림展

- 설치와 퍼포먼스

April 19 – May 31, 2014

opening reception 4pm, April 19

 

 기묘한 낯설음과 마주하게 될 이름 모를 이에게

당신이 전시장에 발을 디딘 순간, 이곳에서 풍기는 모든 분위기들은 어느새 당신을 불편하게 만들 것이다. 늘 보았던 일상의 사물들은 음습하고 괴상한 기운들과 함께, 어느새 당신의 주위를 에워쌀 것이다. 당신은 아주 작은 발견이 일어나기도 전에, 이미 저 먼 곳으로 발길을 돌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좀 더 인내심을 가지고 천천히 이 분위기 속에서 머물러 주기를 바란다. 이것은 허구가 아닌,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사라진 아름다움>이라는 전시제목이 말해주듯이, 오늘날 아름다움은 사라져 버렸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아름다움의 부재가 아닌, 아름다운 사람의 부재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거리를 걷다 보면 아름다운 사람들은 전보다 더 많이 늘어났다. 도톰한 입술, 높은 코를 가진 8등신 서양미인의 기준으로 본다면 말이다. 가슴을 부풀리는 일,눈을 크게 만드는 일들을 현대인은 인위적으로 가볍게 조작한다. 이렇게 허물어진 본연의 육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개개인이 가진 고유의 ‘아름다움’이 사라져 버렸다고 할 수 있겠다.

작가는 이러한 현대 사회의 현상을 주목했다. 취직을 하는데도 실력이 아닌 외모를 보고, 자기 자신의 외모를 부정하며 결국에는 인위적인 조작도 마다하지 않는 현대인들의 심리. 그 속에는 아름다움을 과하게 추구하다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변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어있었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미학관도 자연스럽게 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것에만 집착하는 집단 망각의 현 세태를, 작가는 설치작품과 퍼포먼스를 통해 구현해 낸다.

가장 처음 느끼는 낯설음의 감정은 설치된 작품을 보는 순간 발생할 것이다. 또한 퍼포머들의 모습과 작가가 만들어낸 공간의 기묘한 분위기가 하나의 장면으로 연출됨에 따라, 이곳을 들어오는 모든 이들은 관찰자가 아닌 입장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거나 일부가 될 수도 있다. 이때 느끼는 모든 낯설음의 감정들을 통해 다시 한 번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낯설음에 눈을 감지 않기를, 본인의 얼굴을 거울처럼 비추는 작품을 바라보며 본연의 모습 그 너머의 가치를 마음에 품고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한수지

본문 내용 참고 >>> http://placemak.com/placemak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