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연극 <배수의 고도> 막다른 곳에서 던지는 불편한 질문

2014. 6. 27. 23:27Review

 

막다른 곳에서 던지는 불편한 질문

연극 <배수의 고도>

작 나카츠루 아키히토/ 연출 김재엽

 

글_유혜영

 

하나.

연극은 2011년 3월 11일에 일어난 대지진 이후 일본을 다룬다. 1막에서는 쓰나미로 당장 피해를 입은 이재민들의 절망적인 삶을 재현한다. 이후 10년의 세월이 흐른 것으로 설정된 2막에서는 후쿠시마 원전폭발이 초래한 사회문제들로 진통하는 일본의 미래를 그린다. 그리고 현재 우리나라의 원전개발 현황을 조용히 자막으로 경고하며 막을 내린다. 무대의 침묵만큼이나 객석의 공기 또한 무거워진다. 우리는 경제논리에 따른 원자력 개발이 몰고 온 이 시대의 혼란과 종말의 디스토피아를 본다.

그러나 연극이 현실에서 건져 올린 것은 단지 해답 없는 미래에 그치지 않는다. 무대에는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실로 다양한, 그리고 분명한 입장의 사람들이 있다. 작가는 그들의 팽팽한 대립이 만들어낸 사회를 ‘배수(背水)의 고도(孤島)’ 라 명명한다. 연출가는 각 인물의 ‘입장정리’ 에 초점을 맞추고 그 대립의 각을 세운다. 그리고 묻는다.

 

 

둘.

무대에는 국회의원과 기업인, 외신기자 그리고 어딘지 불편해 보이는 모습이 우리와 비슷한 도쿄 보도국 기자 코모토(이윤재)가 있다. 국회의원 오다기리(오대석)는 피해자들의 배상금을 조작하더라도 국가의 위신과 재정의 안정을 복구하는 일이 급급하다. 기업가 토오루(김승언)는 본토의 전력문제로 인해 추진되고 있는 공장들의 해외 이전과 이윤 추구에 대해 설명한다. 외신기자 알렉스(이정수)는 정부와 짜고 보도하는 일본의 언론은 이미 국민들에게 신뢰를 잃었다며 비웃는다. 짧은 시간 동안 엮어진 그들의 대화는 얼마 전 일어난 일본의 대지진과 쓰나미, 원전사태를 그려내며 각각의 입장에 분명한 방점을 찍는다. 정부, 기업, 언론. 그들이 말하는 ‘정의’의 논리 정연하고 거리낌 없음에 심히 당혹스럽다. 현재 대한민국이 앓고 있는 거대한 불신의 쟁점들이 조그만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까발려진다. 현실에서도, 극 중에서도 그들에게 거는 나의 ‘정당한’ 기대는 길을 잃는다. 코모토는 그래서, 다큐멘터리 제작부로 부서를 옮기고 쓰나미 피해현장으로 간다.

화자는 코모토다. 그는 본인의 일기를 읽듯이 당시 상황과 자신의 입장을 설명한다. 그 기록은 막과 막 사이를 이어주고, 무대에는 실제 사건의 경과를 보여주는 영상들이 송출되어 우리의 이해를 돕는다. 피해 현장 중에서도 가장 열악하다는 타이요(김시유) 가정의 이야기도 코모토의 기록의 한 부분이다. 이러한 메타연극적 장치는 현실과 연극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무너뜨린다. 재해 현장의 사람들은 지난 4월부터 우리가 실제 봐왔던 재난 관계자들과 겹쳐진다. 인물들의 대사와 행동, 그들의 입장은 바로 지금 우리 사회의 은유인 것 같아 객석에서 느끼는 현실감은 더욱 강하다.

   

 

셋.

쓰나미 피해 현장에는 피해자가 있다. 재해 첫날, 이시즈카 선생님은 어쩔 수 없이 통조림을 훔쳐 아이들을 먹였고, 통조림 공장 사장은 어쩔 수 없이 눈감아야 했다. 두려움으로 어쩔 수 없었던 노자키 아저씨는 유우의 몸에 아기를 만들었고 유우는 수술을 위해 돈이 필요했다. 누나를 위해 타이요는 어쩔 수 없이 통조림을 훔쳐 팔았다. 이제 어쩔 수 없어진 공장사장은 도난당한 통조림을 찾아다녀야 했고, 돈이 필요했다. 자신의 어쩔 수 없음을 변명했듯, 유우의 어쩔 수 없었음을 그녀의 남자친구인 선생님은 인정해야 했다. ‘어쩔 수 없었다’는 상황들로 물려가는 그들 각자의 이야기는 눈물의 신파극에 이른다. 연출은 상식과 도덕, 정의가 무엇인지 알 수 없어진 혼돈의 현장에 관객들을 몰입시키는가 싶지만, 오히려 그럴 수 없는 우리를 발견하게 한다.

정부의 구호물품은 등록되지 않은 지역민들에게는 배포되지 않는다. 방송국은 더 비참한 현장을 담기 위해 타이요 식구들이 세탁기를 사용하는 것을 거부한다. 자원봉사자 쇼코(이진희)는 성과발표를 위해 타이요의 아버지 다이고(선종남)에게 자료사진 확인을 재촉한다. 모두 한 무대에 있지만, 그들 사이에는 뚜렷이 다른 삶과 죽음이 있다. 객석에서 눈물을 훔쳐내는 우리 또한 국가적 재난 앞에 우리 각자의 입장을 경험했다. 세월호 뉴스를 보면서도 밥 먹고 과제 하던 최근의 ‘멘붕사태’가 떠올랐다. 당시 연극보다 더 연극 같았던 그들의 아픔에 나는 온전히 몰입할 수 없었다. 고전적이다 싶을 만큼 현실의 재현에 충실한 1막은, 그 자체로 부조리해진 우리 사회를 비춘다.

 

 

넷.

무대의 영리한 변용과 10년 세월을 연결하는 인물 설정의 치밀함에도 불구하고 2막은 전반적으로 어수선하게 흘러간다. 연출은 블록버스터급 규모의 테러 극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자 했지만, 고정된 공간과 제한된 영상만으로 긴박한 속도감을 끌어내기는 쉽지 않았다. 아쉽지만 나는 일촉즉발의 방사능 테러예고와 권총 협박의 심리적 압박감을 배우들의 대사로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1막에 비해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원자력 개발과 관련한 이해관계자들의 대립은 그야말로 첨예하다. 배우들의 호연은 1막과 다름없이 각자의 입장을 뚜렷하게 객석에 전달한다. 모두가 본인의 견해에 확신을 가지고 발화한다. 분명하게 구별된 캐릭터들은 무대의 긴장감을 더욱 고조시킨다. 그들이 모여있는 경호회사 사무실은 서로 다른 입장들의 전시장이 된다. 원전개발을 추진하는 오다기리, 원전반대 데모를 진행 중인 노자키와 카이하라, 피폭자 쇼코, 방사능이 신체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한 유우, 기업유치에 열을 올리는 지방의원 미츠루, 상관인 오다기리에 대항하여 협박극을 벌이는 타이요, 그리고 이러한 상황이 불편하고 혼란스러운 코모토…

날카로운 말싸움은 물론, 몸싸움과 권총위협도 불사하지 않고 이들이 외쳐대는 것은 생존이다. 죽느냐, 사느냐의 절박함 앞에서 본인들이 지켜내야 할 정의를 부르짖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모두를 납득시킬만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한 채 소외되고 고립된다. 그래서 타이요는 극단적 테러를 감행하고, 유우는 해외로 망명한다. 정말 옳은 일을 하고 있는 거냐고 묻는 유우의 질문은 날카롭다. 타이요를 연행하다 도중에 풀어주고 돌아온 코모토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행동을 의심한다. 공연의 시작부터 어느 쪽으로도 확신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그의 모습에서 지금의 나를 본다. 타이요의 시도는 성공한 듯 보이지만 미츠루가 일하는 지역의 실업자가 더욱 늘어날 것을 생각하면 마냥 승리했다고만은 할 수 없기에, 혼란스럽다.

 

다섯.

연출은 극을 닫으며 현재 한국에 건설되어있는 원전의 개수와 이후 개발 계획 등을 자막으로 띄운다. 일상과는 조금 먼 원자력 개발이라는 담론을 객석과 더 직접적으로 연결하고자 하는 시도다. 우리는 연극에서 빠져나와 현실을 자각한다. 나는 자막을 보며 더 이상의 개발이 옳은 것인 것 하는 각성과 동시에 문득 최근 박근혜 대통령의 UAE방문을 떠올렸다. 우리는 그곳에 원전 건설을 진행 중이고, 이후 운영권을 확보하면 막대한 수익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대통령까지 나서는 어마어마한 국가사업이다. 치열한 생존갈등, 거대한 모순은 한 나라를 넘어, 이미 전 세계를 무대로 하고 있다. 압도적인 스케일의 답답함이 몰려왔다.

연극은 제목부터 사면초가의 절망감에서 시작한다. 뒤쪽에 물이 있어 전진밖에 할 수 없는데, 알고 보니 이곳은 섬이라 앞이고 옆이고 전혀 나아갈 방법이 없다. 당장에 벌어진 생사의 절박함 앞에서도, 눈에 보이지 않아 불확실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재앙 앞에서도, 사방으로 당겨진 입장차이는 느슨해질 줄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는 무력한 배수의 고도에 서는 것이다.

현실에 대한 작가의 통찰은 연극을 통해 아주 구체적으로 관객들의 눈앞에 펼쳐졌다. 사실적으로 재현된 인물들은 현실의 적나라한 은유가 되어 실감하지 못했던 사회의 모순과 생명의 위태로움을 감각하게 했다. 작가는 모든 등장인물에 정확한 이름을 주었다. 그들은 한 집단을 대변하는 것 같지만 본질적으로 한 개인이다. 연극은 관객 한 명, 한 명을 겨냥한다. 그리고 진지하게 질문한다. 너는 이제 어느 입장에 서겠느냐고. <배수의 고도>는 그렇게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이 시대 연극의 입장을 드러냈다.

   

 

에필로그.

공연장을 나오면서 여느 때와 다르게 마음보다 머릿속에 남은 것들을 반추해야 했다. 쉽지도 즐겁지도 않았다. 나는 정말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 걸까? 시위가 역사를 바꾸지 못했다고 해서 해외 망명 또는 총기 테러를 선택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그런 극단적인 방법들만이 정부와 기업의 자본논리를 조금이라도 저지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저지된 결과를 우리는 과연 감당할 수 있는가. 현재 내가 아닌 미래세대를 위하여, 치솟을 세금과 가중되는 취업난을 함께 버텨 낼 용기가 있는가. 당장 국내외에 파견되어 원전을 건설 중인 내 친구들이 직장을 잃고, 우리 집 전기세가 천정부지로 올라갈 판에 나는 침묵하지 않을 수 있는가.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치열한 무력’을 경험한다.

연극의 질문은 나를 ‘고도(孤島)’에 세우지만, 결국 해답은 그 질문부터 시작이다. 그리고 이 방법뿐이다. 

 

▲세계 5위의 원자력 발전소(23기) 보유국인 한국과 세계 3위의 원자력 발전소(50기) 보유국 일본.

 

*사진제공_두산아트센터

**두산아트센터 홈페이지 바로가기 >>> http://www.doosanartcenter.com/

 

 필자_유혜영

 소개_연극을 공부하기 시작한 새내기입니다. 공연장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