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7. 12. 09:31ㆍReview
살아있는 몸들의 시간
<벽난로가에서의 꿈>
- 제9회 피지컬씨어터페스티벌
글_김유진
“대리석은 조각이야. 차원이 다르지.
형태를 붙여가면서 만드는 게 아니니까.
참 까다로운 작업이지. 수정이 불가능하니까.”
- <벽난로가에서의 꿈> 중 까미유의 마지막 대사
인생에도 수정이 가능하다면 사람들은 어떤 순간으로 되돌아가 다시 살려고 할까? 가끔 그런 꿈을 꾼다. 만약 그 때 그것을 선택했더라면(선택하지 않았더라면), 만약 그 때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머릿속에서 ‘리셋’ 버튼을 누르고 새로운 삶을 상상해보지만, 시간을 결코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한번 깎아내면 다시 붙일 수 없는 조각처럼, 삶은 그렇게 흘러간다.
다시 붙일 수 없는 조각 같은 생을 살다간 예술가가 있다. 까미유 끌로델(1864–1943). 그녀의 이름 앞에는 언제나 ‘천재’, ‘비운의’, ‘여류’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여성의 사회활동이 죄악시되던 19세기 누구보다 뛰어난 재능과 열정을 지니고 태어나 사랑과 예술에 모든 것을 바쳤던, 그러나 그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받고 30년 동안 정신병원에 갇혀 비참하게 죽어간 한 인간, 여성, 예술가. 로댕의 조수이자 연인으로 알려져 있는 까미유 끌로델은 굳이 로댕의 이름을 빌지 않더라도 그 스스로 천재적인 조각가였다. 그러나 이제 막 세상으로 나와 자신의 예술 세계를 펼치려 하는 열아홉의 나이에 로댕이라는 ‘거대한’ 인물을 만난 그녀는 평생을 한 사람의 예술가가 아닌 로댕의 연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가게 된다. 로댕의 예술세계에 영감을 불어 넣고, 그의 작품을 함께 조각하고, 때로는 모델로, 때로는 조언자로, 또 연인으로 행복한 순간들을 함께 했지만, 헤어진 후 그녀에게 돌아온 건 배신과 냉대, 가난, 그리고 로댕으로 대변되는 예술계 전체로부터의 철저한 외면이었다. 결국 미치는 것 외에는 탈출구가 없었던 천재 조각가 까미유 끌로델. 그녀에게 조각이란, 혹은 삶이란 무엇이었을까?
로댕과 헤어지고 나서 약 5년 후에 만든 까미유 끌로델의 작품 중 하나이다. 대리석과 청동으로 제작되었다가 3년 뒤 대리석으로 다시 만들어진 이 작품은 한 여인이 벽난로 앞에 머리를 기대고 앉아 잠시 꿈을 꾸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공연은 이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 정신병원을 서성이며 중얼거리던 한 여인이 지친듯 벽에 기대 앉으면 그녀의 생각 속 인물들 - 아버지, 로댕, 폴 - 이 다른 배우의 몸으로 무대 위에 나타난다. 정신병원이라는 현실에서 여자의 상상 속으로, 그리고 이야기는 다시 까미유 끌로델의 어린 시절로 향하며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의 페이지들을 한장 한장 펼쳐나간다. 조각에서 가져온 공연 제목과 첫 장면에서 엿볼 수 있듯이, 공연 <벽난로가에서의 꿈>은 까미유 끌로델의 조각들을 모티브로 하여 그녀의 예술과 사랑, 삶의 여정을 되짚는다.
검은 무대 위, 흰 옷을 입은 여자배우(박미영)와 남자배우(김도완). 두 사람은 말과 몸, 움직임을 통해 까미유 끌로델과 남동생 폴 끌로델, 아버지와 어머니, 로댕과 다른 인물들, 그리고 ‘조각상’들을 무대 위로 소환한다. ‘움직임’과 ‘신체’ 표현 방식에 집중하여 무대 예술의 재발견을 꾀하고자 하는 이번 피지컬 씨어터 페스티벌의 취지에 걸맞게 공연은 마임, 무용, 춤, 제스쳐 등 다양한 방식으로 움직임을 시도하고 이를 언어와 결합하여 드라마를 구성해 나간다.
‘조각’은 공연 전체의 컨셉을 결정짓는 중요한 키워드이다. 3차원의 입체 형상, 정지된 몸, 물성(物性)등 조각의 특성이 배우의 움직임과 신체 표현을 유발하고 확장시키는 모티브가 될 뿐만 아니라, 각 시기의 조각상이 까미유 끌로델의 삶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기에 공연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역할도 한다. <벽난로가에서의 꿈> 조각상을 모티브로 시작된 이야기는 그녀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재능 있고 발랄한 까미유와 <13세의 폴> 조각상을 보여주고, 이후 파리로 진출하여 로댕을 만나 제작한 <사쿤탈라> 조각상으로, 사랑이 절정에 달했을 때의 <왈츠>로, 그리고 떠나가는 연인을 그린 <중년>으로 이어진다. 관객의 눈 앞에 물체가 아닌 배우의 몸으로 만든 조각상이 나타나고, 사라진다. 배우의 몸은 조각상이 되었다가 다시 인물이 되기를 반복하면서, 움직임에 시간과 공간을 담아낸다. 보이지 않던 조각상을 발견하는 기쁨, 그리고 그 조각상을 구현하는 배우의 신체 언어를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었고, 무엇보다 배우의 몸을 통해 인물의 정서가 강화되는 부분들이 돋보였다.
몸의 시간 – 정지, 연장, 균열
호기심과 재능이 넘치는 까미유의 어린 시절. 동생 폴과 함께 숲 속에서 놀던 까미유는 진흙으로 동생의 얼굴을 만들기 시작한다. 섬세한 마임 동작으로 눈, 코, 입을 만들고 머리카락을 다듬을 때 동생 폴로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자배우는 조각이 완성되는 순간 누나의 손동작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13세의 폴>(1881) 조각상이 된다. 까미유 끌로델은 자신이 만든 조각상(배우)을 가리키며 흥분해서 외친다. “정말 살아있는 것 같지 않아? 나는 흙덩이를 살아 숨쉬게 하는 조각가가 될 거야!”
돌로 된 조각상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느 순간 그것이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죽은 돌이 아닌 살아있는 인간처럼 그 사람의 성격, 습관, 그를 둘러싼 배경과 이야기가 들려오는 듯하다. 살아있는 몸이 조각상이 될 때 배우의 몸은 조각의 잠재적 생명력을 무대 위에 가시화하는 효과적인 매체가 된다.
가족회의를 거쳐 파리로 가게 된 까미유. 그곳에서 로댕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장면은 두 사람이 공동으로 조각하는 행위로 표현된다. 상상의 조각상을 가운데에 두고 두 사람은 주변을 돌면서 망치질을 한다. 얼굴은 환희에 차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고 슬로모션에 가까운 과장된 몸짓으로 망치를 내려치며 기쁨의 탄성을 지른다. 사실적이지 않은 과장된 표현과 성적인 암시로 관객의 웃음을 유발했던 이 장면은 거리를 두고 서로를 탐색하며 은밀한 쾌감을 맛보는 두 사람의 심리를 형상화한다. 이러한 ‘조각의 춤’을 거쳐 탄생한 것은 조각상 <사쿤탈라>(1888). 두 사람은 무대 중앙의 스포트라이트 아래에서 조각상의 모습 그대로, 여자는 한 손을 가슴에 얹고 고개를 숙여 남자를, 남자는 무릎을 꿇고 여자의 허리를 지그시 감싸 안는다.
공연은 <13세의 폴>과 <사쿤탈라>처럼 인물로 살아 움직이던 배우가 조각상이 되어 멈추는 움직임을 반복해서 사용한다. 여기에서 질문을 하나 던져 본다. 이 때 관객이 보는 것은 무엇인가? 인물인가, 아니면 조각인가? 혹자는 멈춰 있는 인물을 볼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살아있는 조각을 볼 것이다. 여기에는 또 한 가지, 정지되어 있는 그 순간, 즉 ‘시간성’이 보인다.
인간의 시간은 끊임없이 흘러간다. 공연에서 인물의 시간 역시 계속 흐르고 있다. 하지만 실제 삶과 달리 극장 안에서의 시간은 배우와 관객의 공모 하에 멈출 수도 있고, 늘릴 수도 있다. 시간을 멈추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무대 위에서, 모두의 동의하에, 정당하게 실현된다. 결코 영원하지는 않지만 정지된 순간만큼의 영원(永遠)이 획득되는 순간. <13세의 폴>과 <사쿤탈라>는 까미유가 붙잡고 싶었던 영원의 순간이었다면, 배우들은 그녀의 욕망을 무대 위에 구현해낸다. 정지된 몸을 통해서.
시간은 이내 다시 흘러간다. 그것도 아주 빠르게. 탐색과 환희를 거쳐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로댕과 까미유는 이제 몸을 밀착시키고 아름다운 왈츠를 춘다. 맞잡은 손, 발의 스텝과 동선, 시선 하나 하나가 어긋남이 없이 조화를 이루며 공간을 가로지른다. 까미유 끌로델의 조각상 <왈츠>(1895)는 한 면에 치우침이 없이 어느 각도에서 보더라도 역동적인 움직임을 느낄 수 있는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정지된 조각상이 되었던 배우들은 이제 조각상의 율동성을 무대 위로 가져와 역동적인 사랑의 춤을 춘다.
비극은 춤의 마지막에서 시작된다. 남자는 여자의 허리를 감싸 안고 몸을 숙이고 있고, 여자는 몸을 뒤로 젖힌 채 남자의 목에 팔을 걸고 있는, 여느 커플댄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마지막 포즈이다. 그러나 춤이 끝나자 남자는 여자를 천천히 바닥에 내려 놓는다. 여자는 남자의 목을 잡고 있던 팔 그대로, 춤추던 다리 그대로, 등이 바닥에 닿은 채 팔다리가 공중에 들어올려진 모습이 된다. 여자는 아주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하고, 남자는 서서히 여자로부터 멀어진다. 아름답고 경쾌한 춤을 추던 여자의 몸은 이제 뒤집힌 한 마리의 벌레마냥 꼼짝 못하고 허우적대고 있다. 즐거웠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고 고통의 시간이 느리게 연장된다. 살아 숨쉬던 몸이 벌레처럼 굳어질 때, 그 늘어진 시간을 고스란히 견디는 관객 역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여자의 비참함과 고통을 함께 체험한다.
인물 내면의 심리가 몸으로 표현되고 관객에게 몸으로 전달될 때, 말과는 전혀 다른 파급력을 지닌다. 몸으로 심리를 표현하는 방법은 수만가지가 있겠지만, 문제는 ‘어떻게’일 것이다. <벽난로가에서의 꿈>에서 시도하는 방법은 시간성을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조각상이 되어 시간을 정지시키는 몸, 속도의 대비를 통해 고통을 연장시키는 몸, 그리고 마지막으로 배우의 몸은 시간에 균열을 낸다. 동생 폴이 먼 곳으로 떠나기 전 까미유를 찾아와 인사하는 장면은 시간을 멈추고 그 틈에 균열을 내어 인물의 정서적 파급력을 몸의 언어로 강화하고 있다.
배신의 고통으로 몸부림치던 까미유 앞에 떠날 채비를 한 폴이 찾아온다. 두 남매는 기뻐하며 서로를 끌어안는다. 그 순간 극장 안의 모든 것이 정지한다. 양팔로 힘껏 동생을 껴안은 뒷모습의 까미유, 그리고 까미유를 안고 있는 폴. 얼마간 정적이 흐르고, 폴 혼자 아주 천천히 몸을 뒤로 빼기 시작한다. 누나를 따뜻하게 감싸 안고 있던 손은 굳어있는 그녀의 몸을 힘껏 붙잡고, 긁고, 때리고, 뿌리치고, 쓰다듬는다. 동작은 거칠고 힘이 들어가 있으며 얼굴은 고통스러운 듯 일그러진다. 멈춰 있는 시간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거칠게 찢어내는 듯한 배우의 움직임은 만신창이가 된 누나에 대한 동생의 안타까움, 분노, 사랑, 비통함을 표현한다. 밖으로 드러낼 수 없는 폴의 내면이 거대한 침묵의 절규가 되어 울려 퍼진다.
폴은 정지된 까미유의 몸 뒤쪽에서 움직이고 있다. 객석을 향해서 손을 뻗어보고 앞으로 빠져나오려고도 해보지만 움직이지 않는 까미유의 몸은 마치 거대한 벽처럼 폴을 가로막고 있다. 아무리 때려도 부서지지 않고 빠져나오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는 벽. 정지된 까미유와 그 뒤에서 몸부림치는 폴의 대비는 인물의 심연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고통과 분노, 답답함과 좌절감을 말이 아닌 몸으로 표현해 냈다. 관객은 그 침묵 속에 숨죽이며 폴의 고통에 동참한다.
조각과 무용은 서로 다른 듯 닮아 있다. 전자가 정지된 입체 형상이라면, 후자는 입체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몸이다. 그런데 움직이던 몸이 굳어져 시간을 정지시키거나, 정지된 몸이 마치 살아있는 듯한 생명력을 얻을 때, 배우의 몸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관객을 다른 차원의 세계로 이끈다. 조각을 움직임의 모티브로 사용한 <벽난로가에서의 꿈>은 이처럼 조각과 무용 안에서 몸이라는 공통점을 포착해내고 시간성에 변화를 줌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까미유 끌로델의 삶의 순간들을 함께 살아내도록 초대한다.
이 외에도 여자배우의 몸이 여러 조각상이 되어 로댕의 시선에 노출되는 장면, 남자배우가 작업실의 모델들이 되어 잘 훈련된 몸과 무용 동작을 뽐내면서 로댕의 여성 편력에 대해 뒷담화를 하는 장면, 두 배우가 주변 사람들의 ‘입’이 되어 수많은 루머들을 쏟아내면서 뒷모습을 보인 채 관객에게 점점 다가오는 장면 등… 공연이 시도하고 있는 움직임은 다양했고, 장면 전환의 속도도 빨랐다. 이러한 시도들이 효과적으로 빛을 발하는 순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연은 미처 한 장면이 다 쌓이기도 전에 다른 장면이 시작되고, 하나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전에 다른 움직임으로 전환되어 전체적인 맥이 흐려지는 느낌이 있었다. 특히 극의 초반에는 많은 이야기를 전달하느라 장면들이 빠르게 흘렀다. 한 장면에서 목표하는 것을 좀 더 확실히 보여주고 그 다음으로 넘어가거나, 하나의 움직임을 더욱 정교하고 치밀하게 표현한다면 작품의 추구하는 움직임의 컨셉과 주제가 더 명확하게 전달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극장 안, 살아있는 몸들
작품의 후반부에서 까미유 끌로델은 점점 세상과 고립되어 혼자가 되어간다. 작업실에 쳐박혀서 자신의 조각상을 모두 부수고 다시 만들기를 반복하던 그녀는 무언가에 홀린듯 조각을 하기 시작한다.
무대 중앙에 남자배우가 상체를 깊이 숙이고 있다. 그는 형체를 갖기 전의 돌덩어리이다. 까미유가 미친듯이 망치질을 할 때마다 돌덩어리는 조금씩 형상을 갖춰가기 시작한다. 남자배우의 미세하고 정교한 움직임이 망치질과 대비되어 죽은 물체에 조금씩 영혼이 스며드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광기에 찬 여자의 손 끝에서 점차 석상의 형체가 드러나고 돌덩어리였던 배우의 몸은 작품 <중년>(1894-1903) 속 남성의 형상이 된다. 남자는 한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한 팔은 반대쪽으로 뻗고 있다. 조각을 마친 까미유는 조각상을 뒤에서 살며시 껴안고는 무릎을 꿇고 애원하듯 남자를 향해 두 팔을 뻗는다. 까미유가 조각 속 여자의 형상이 되면서 작품 <중년>이 완성된다. 잠시 후 남자는 조각이 된 여자를 남겨둔 채 반대쪽으로 천천히 멀어진다.
여자의 행위가 돌을 깎아 조각상을 만들고 그것에 숨을 불어 넣었지만, 완성된 조각은 결국 자기 스스로 존재하다 떠나가 버린다. 다른 사람의 손에서 태어난 작품은 결국 스스로 떠나가고, 만든 자는 돌이 되어 굳어지는 아이러니. 주체는 객체가 되고, 객체는 주체가 된다. 이것은 비단 로댕에게 버림 받은 까미유만을 은유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예술이라는 행위, 삶이라는 것 자체가 본래 그러한 것이 아닐까. 나의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하고 행동하고 창조하지만 결국에는 내 것이 아닌, 붙잡을 수 없는 어떤 것.
할머니가 된 까미유 끌로델이 조각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마지막 독백에서는 한평생을 치열하게 살았고, 모든 것을 잃어본 적이 있는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쓸쓸함과 연륜, 그리고 여유가 묻어났다.
제9회 피지컬씨어터페스티벌의 창작개발프로그램으로 기획된 <벽난로가에서의 꿈>은 조각이라는 예술을 토대로 움직임과 신체의 언어를 찾아나갔다. 다양한 시도들이 아직은 실험의 단계에 그치고 있는 경우가 많아 공연의 일관성 측면에서 아쉬운 점이 있었고, 인물의 관계에 있어서는 까미유 끌로델과 로댕의 관계가, 동생이나 아버지와의 관계에 비해 잘 드러나지 않아 아쉬움이 남았다. 젊은 시절 로댕과의 불꽃같은 (관능적인 혹은 치명적인) 관계가 몸을 통해 더욱 강조되었더라면 이후에 까미유가 느끼는 배신감, 고통, 광기의 표현들이 더욱 효과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배우가 순간순간 포착해낸 삶의 순간들은 까미유 끌로델의 삶과 예술을 관객들에게 전달해주었다.
조각 같은 삶을 살다 간 천재 예술가 까미유 끌로델. 혹자는 시대를 잘못 태어났다고도 하고, 혹자는 로댕의 그늘 하에서 평생을 불행하게 살았다고도 한다. 그런데 과연 그녀의 삶을 불행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후세의 사람들은 그렇게 평가할 수 있겠지만, 그녀는 가장 치열하게, 매순간을 살아있었을 거라고 감히 말해 본다. 조각을 할 때, 사랑을 할 때, 그리고 광기에 차 있었을 때조차… <벽난로가에서의 꿈>의 두 배우는 까미유 끌로델이 살아있었던 그 순간을 자신들의 몸으로 살아냈고, 관객은 배우의 몸을 통해 까미유의 삶과 마주했다. 한 평생을 불태우고 간 까미유 끌로델과 그녀의 삶을 살고 있는 배우들, 그것을 지켜보는 관객의 삶이 한 공간 안에서 살아 숨쉬고 있었다. 그렇게 과거와 현재가 만난다. 몸을 통해서, 예술을 통해서.
** 홈페이지_http://www.physicaltheater.co.kr
필자_김유진
소개_연극보는 것을 아주 좋아하고 좋은 연극을 만들고 싶어합니다. 이제 본 것에 대해 이야기도 나누고 글도 써보려고 합니다.
<벽난로가에서의 꿈> 2014 제9회 피지컬 씨어터 페스티벌 Approach Program(창작개발프로그램) 공연일시_2014년 6월 12일(목)-14일(토) 평일 8시/ 토요일 4시 공연장소_서강대 메리홀 소극장 공동창작_권영호, 김도완, 박미영 출연_김도완, 박미영 / 구성작가_이수진 / 드라마터그_채민 / 음악감독_유태선 조명디자인_정진철 / 무대감독_이은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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