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청춘과 잉여>전 @커먼센터

2014. 12. 20. 10:47Review

 

지금여기, 잉여의 눈으로  그때거기, 청춘을 보다

<청춘과 잉여>전

@커먼센터

글_정은미

 

▲‹청춘과 잉여> 포스터 , 커먼센터 전시

 

<청춘과 잉여>전은 1990년대 이후 한국의 동시대 미술을 고찰한다는 취지 아래 총 10명의 작가들을 모아 그들의 작품을 전시하였다. 박찬경-이완, 송상희-이자혜, 안규철-김영글, 정연두-백정기, 박미나-이상훈. 두 명이 한 조를 이뤄 다섯 개의 공통분모를 가지고 작품을 내보인다. 작품이 담아내는 ‘아시아’, ‘어떤 세계를 모험하는 어떤 주인공’, ‘현대적 의미에서의 꿈과 소망, 그리고 그 실현이 갖는 의미’, ‘1990년대 주변의 이야기’, ‘매체’라는 세부 주제들을 그러모을 수 있는 것이 ‘청춘과 잉여’ 라는 상위 주제에 명확히 포괄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1990년대부터 한국의 미술에 큰 영향을 주고 있는 기성작가들과 현시대에 좀 더 가까이 접해있는 젊은 작가를 표현하는 상징어로 청춘과 잉여를 사용하였다는 의도에 맞춰 생각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면, 청춘과 잉여가 그 작가들이 경험한 시대적 분위기를 감싸 안을 수 있다는 점, 나아가 작품에는 어쨌거나 작가의 정체성과 경험이 녹아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청춘과 잉여>를 이해해 볼 수 있다. 특히 박찬경, 안규철, 이자혜는 ‘보이지 않는 존재, 유령과 같은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작품을 세심하게 눈으로, 귀로, 사유로 더듬어 가며 그들의 이야기를 주목하겠다.

커먼센터. 건물에 들어서자 바깥의 추위와는 무게감이 다른 묵직한 차가움이 발부터 머리끝까지 타고 오른다. 기온으로는 담기 어려운 스산함이었다. 공간은 어두웠다. 보여야 할 것만 보여준다. 작품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거친 시멘트 벽과 바닥에 작품이 놓여 있었다. 작품 옆에는 캡션조차 없다. 작품이 할애하고 남은 나머지 공간에 무언가가 꽉 차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눈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어떤 것이다.

 

▲‹파경(罷經) 실험 1›(박찬경) / 월 텍스트, 아카이브 자료, 프레젠테이션 영상 (출처_커먼센터 웹페이지)

 

1. 파경罷經 실험 I (박찬경)

인당수에 빠졌던 효녀 심청이 살아돌아 왔다. 눈먼 아비는 “눈을 뜨고 가다 뜨고 오다 뜨고 서서 뜨고 앉어 뜨고 실 없이 뜨고 어이 없이 뜨고 화내다 뜨고 울다 뜨고 웃다 뜨고 떠보느라고 뜨고 시원이 뜨고 일허다 뜨고 눈을 비벼 보다 뜨고 지어비금주수라도 눈먼 짐생까지도 모도다 눈을 떠서 광명천지가 되었구나.”(심청가, 부녀상봉) 심청가가 울린다. 한쪽 벽에는 한국 근현대의 풍경을 담은 흑백 사진과 전통 산수화, 풍속화가 판소리의 속도에 맞춰 스친다. 찰나에 보이는 이미지들의 연속은 하나하나 눈에 박힌다. 이미지는 불안정한 시대의 풍경을 담고 있다. 일제강점기, 광복, 분단, 한국전쟁을 거친 이들의 사진이다. 갓을 쓰고 두루마리를 걸친 사람들이 거리를 배회한다. 무당이 굿을 하고 사람들은 비나이고 비나인다. 서양식과 동양식이 혼재된 건물이 이질적으로 섞여있다. 먹이 발린 풍속화는 일본의 우키요에 특유의 평면성과 섞인다. 바다가 일렁이고 화살이 날아가고 말이 뛰고 사람이 떠다닌다. 심청이를 부르짖는 아비의 곡소리와 거뭇한 벽에 쉴 새 없이 지나치는 사진과 그림은 차가운 공기를 가득 채운다.

옆 벽면에는 김수영 시인의 <거대한 뿌리>(1964)가 원의 중앙에서 바깥으로 돌려 새겨져 있다. 시 속의 ‘나’는 이북친구들과 달리 남쪽식으로 앉아있으며 이사벨 버드 비숍여사와 연애 중이다. 비숍여사(1831~1904)는 조선을 방문하여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1898)을 출간하였다. ‘나’는 비숍여사가 읽어낸 조선의 모습 속으로 되돌아가있는 중이다. 그녀는 기이한 관습을 가진 서울을 보았고 서술했다. 저녁엔 모든 남자들이 귀가하고 여자들이 외출한다. 심야에는 다시 여자가 사라지고 남자는 오입을 하러 나간다. 민비는 장안 외출을 못했다. “버드 비숍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거대한 뿌리) ‘나’는 아직 제대로 앉는 법을 모른 채 조선의 풍경과 연애를 하며 지낸다. 시 속 그는 이 땅에 서기 위해서는 모든 반대의 움직임이 좋다 하였다.

박찬경은 한국의 샤머니즘적 전통을 부각시킨다. 효녀 심청 이야기에는 공양미 삼백 석과 정화수를 떠놓고 올리는 기도, 바닷속 용왕의 제물 등과 같은 주술적 요소가 있다. 빠르게 지나가는 근현대의 풍경 이미지 속에는 무당이 보인다. 무당은 귀신과 접하는 존재, 보이지 않는 존재를 자신의 몸을 통해 불러들이는 사람이다. 비과학적, 비합리적, 비이성적이라고 치부하며 수면 위로 올리는 것을 꺼리지만 아직도 암암리에 잔존해 있는 샤머니즘적 전통은 바뀔 수 없는 한국의 모습이다. 이런 맥락에서 다시 한번 김수영의 시를 읽어보면 어떤 형태의 역사이건 부정할 수 없으며 그것은 오히려 과학, 합리, 이성을 내세우는 오늘날에 벌어지는 사태보다는 덜 괴로운 것이 된다.

 

 

▲ ‹그 남자의 가방 II›(안규철) / A3 켄트지에 연필 드로잉 총 16점, 나무 가방 (출처_커먼센터 웹페이지)

 

2. 구석 의자, 그 남자의 가방 II (안규철)

하얀 방 한구석에 의자 하나가 놓여있다. 의자는 벽의 안쪽 모서리 쪽을 향해 있다. 의자에 앉기를 상상하면, 눈에 보이는 것은 검정 바탕이다. 그 검정 바탕에는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하얀 여행 가방이 있다. 그것은 날개에 가깝다. 하얀 날개 한쪽의 모습과 같다.

의자에 앉아서 검정 바탕을 바라보면 이야기는 시작된다. 하얀 가방과 의자, 검정 바탕이 발린 벽 모서리는 도화지 속에 담겼다. 주인공은 의자에 앉아 검정의 풍경을 바라보며 삶을 살았다.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고, 그 어떤 일에도 열정적으로 매달리지 않으며, 조용히 나 자신만을 향하는 삶, 세상에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오로지 내게 주어진 시간을 서서히 탕진하며 사라지는 삶”(그 남자의 방)을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누군가로부터 아직 가방을 가지고 있는지를 묻는 전화를 받는다. 그는 20년 전에 한 가방을 건네받았고 그것을 보관해왔다. 그동안 그 가방에 대해서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고 자신조차도 그것에 대해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전화를 받은 후, 주인공은 그 가방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그 가방을 보관한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는 전화를 걸어온 사람의 정체에서부터 전화를 걸어온 의도, 가방이 문제가 되는지의 여부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친절히 전화를 받지 못했던 자신을 원망했다가, 가방으로 인해 벌어질 일들을 짐작해보기도 한다. 그리고 변명들을 늘어놓아 본다. 마침내 그 가방을 미리 처리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후회하게 된다. 그는 가방을 처리하기로 마음먹고 길을 떠난다. 막연한 불안감으로부터의 도주로 여행은 시작되었다. 그러다 그는 자신의 모습에서 자기에게 가방을 맡겼던 그 사람의 그림자를 보게 된다.

“어젯밤 인적이 끊긴 도심의 상점가를 무작정 걷다가 쇼윈도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 모습 속에서 나는 놀랍게도 20년 전에 나를 찾아온 남자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때 나는 알았다. 그 남자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 남자가 그랬던 것처럼 이제는 내가 이 도시를 배회하는, 보이지 않는 자가 되어, 다시 누군가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그 남자의 가방)

안규철은 시간을 탕진하면서 자신만을 바라보며 점점 사라지는 삶을 살고 있는 남자에게 전해진 가방과 그 가방으로 인해 어떻게 그가 배회하는 자, 보이지 않는 자가 되는지의 과정을 이야기로 풀어냈다. 까만 벽을 바라보며 그 무엇도 하지 않고 자신에게 침잠해가는 인간이 어떤 존재에 의해 밖으로 향하게 되고 다른 이에게 가방을 전해주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배회할 때, 그는 돌연 보이지 않는 자가 되어 버렸다. 도시를 배회하는 유령 같은 존재가 되었다. 주인공이 보이지 않는 자가 되었을 때, 스스로에게서 가방을 건네준 이의 그림자를 보았다면, 가방을 건네준 이 또한 보이지 않는, 유령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 이자혜 / ‹페미닌 전사 앤니로리의 전설› / 혼합재료 벽화 (출처_커먼센터 웹페이지)

 

3. 페미닌전사 앤니로리의 전설 (이자혜)

앤니로리는 다양한 방식의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그 과정은 벽화로 그려졌다. “사람들은 그의 몸에 불을 싸질렀다! (미친놈들!)” 머리를 아래로, 발을 위로 둔 채 그는 떨어지고 있다. 까만 머리카락은 빗자루처럼 바닥을 향해 매달려 있다. 그가 불속에서 절규하는가? 알 수는 없다. 앤니로리의 얼굴은 까맣게 문질러져 있다. “그의 머리채는 물에 처박혔다!” 앤니로리는 까만 늪과 같은 곳에 엎드린 채 처박혀있다. 손바닥과 발바닥을 위로 향한 그는 몸에서 힘이 다 빠져나간 상태이다. “그를 땅에 파묻었다!“ 그의 오른쪽 팔과 왼쪽 다리만이 땅 위로 올라와 있다. 나머지 신체는 땅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손가락은 벌려지고 발가락은 꺾인다. ”코피가 흐르도록 그를 학대했다!“ 앤니로리의 눈은 거뭇하고 작은 코에서는 코피가 흐른다. 피는 입가 언저리까지 번져있다. 입은 조용히 닫혀있다. 반쯤 뜬 눈은 멍하니 뭔가를 응시한다. ”그를 질식시켰다!” 앤니로리는 엉덩이를 높이 올리고 쓰러져있다. 팔은 보이지 않는다. 얼굴은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머리카락은 바닥에 깔린다.

앤니로리는 다섯 번의 죽음을 당하였다. 페미닌 전사들은 앤니로리의 죽음을 축복해 준다. 앤니로리는 문패트롤 여신의 동산에서 세례를 받은 후 페미닌 전사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곳엔 비싼 보석과 맛있는 음식이 있다. 페미닌 전사들의 즐거움을 위한 마스큘린 육노예들이 있다. 육노예라 칭해지는 자들의 성기가 적나라하게 나와있다. 페미닌 전사들은 서로 키스를 한다. 주변은 빛난다. 다섯 번의 죽음으로 나타난 다섯 개의 보석은 페미닌 전사가 된 앤니로리의 곁에 머문다. 현세계에서의 무차별한 죽음에서 페미닌 전사로서의 새로운 삶으로의 이행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없다. 문패트롤 여신 아래 주어진 페미닌 전사로서의 삶에서 즐거움을 가져다 주는 것은 마스큘린 육노예들의 몸부림이고 페미닌 전사의 키스, 푸짐한 음식들이다. 이상적 아름다움으로 그려지는 문패트롤 여신은 보석들 한가운데, 파란 곱슬머리와 풍만한 가슴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다섯 개의 죽음으로 얻은 다섯 개의 보석을 띄우고 하얀 날개를 달게 된 앤니로리의 몸짓과 표정이 이상하다.

겸디갹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이자혜는 거름망을 두지 않은 상태로 앤니로리의 모험 이야기를 전한다. 다섯 번이나 부당한 죽임을 당한 앤니로리가 페미닌 전사가 되어 현상계에서 즐거움과 보석과 음식, 육노예가 있는 다른 세계(문패트롤 동산)로 넘어갔을 때, 거기엔 부당한 죽음이라는 것 말고는 아무런 연결점을 찾을 수 없다. 그리고 그녀가 속하게 된 세계에는 죽은 존재의 욕망이 다듬어지지 않은 채 날것의 모습으로 자리해 있다.

청춘은 푸르른 봄이다. 어떤 이상을 좇으며 그 이상과는 완전히 일치하지 않을 현실과의 긴장을 유지할 수 있는 시기이다. 어떤 가지로도 생을 다양하게 뻗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넘쳐나는 때이다. 잉여는 나머지를 뜻한다. 10에서 3을 나누어 3이라는 몫이 나오고 1이 남을 때, 1은 잉여가 된다. 사회에서 생산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고 남아있는 자인 동시에 보이지 않는 자, 주위를 떠도는 자이다. 세 작가가 주목한 귀신과 무당, 용왕과 심청이, 보이지 않는 자와 사라지는 삶을 사는 자, 페미닌 전사와 앤니로리는 청춘인가, 잉여인가, 둘 다 인가, 모두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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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_정은미

 소개_내가 누군지 글로 짓고 있는 중.

 

‹청춘과 잉여›

기간: 2014.11.21 ~ 12.31

참여작가: 김영글, 박미나, 박찬경, 백정기, 송상희, 안규철, 이상훈, 이완, 이자혜, 정연두

기획: 유능사(최정윤, 안대웅) / 협력기획: 김시습, 박희정, 윤율리

 주관: 커먼센터 / 후원: 서울문화재단, 한국문화예술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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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과 잉여>는 1990년대 이후 한국의 동시대 미술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에 관심을 두는 전시다. 1990년대는 한국의 시각문화가 급격히 변화한 시대다.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이 대립각을 세우던 시대의 마지막 장에 포스트모더니즘이 틈입했으며, 동시대 미술을 전문으로 다루는 미술관/레지던시, 대안공간, 비엔날레와 같은 국제전 등이 하나 둘씩 생기며 새로운 시각문화의 산파 역할을 했다.

이를 통해 동시대 지배적인 미술에 비추어, 스스로의 위치를 생각해 볼만한 상황이 만들어 졌다. 따라서 이 전시는 1990년대의 어떤 틈 사이로부터 동시대 미술의 모습을 유추해내려고 했다. 한편, 지금은 불안정함의 시대다. 지배적인 비평이나 양식이 사라진지 오래며, 전지구적 규모의 정치 경제 사회적 불안이 음슴하게 지속되고있다. 이런 상황에서 오늘날의 문화를 한 마디로 표현하는 건 매우 어려워졌거나, 그 동기를 잃어버린 듯하다. 오늘날의 미술은 그 어떠한 기대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청춘, 즉 잉여가 마주한 곤란이다.

<청춘과 잉여>라는 전시 제목은 두 세대의 작가군을 상징적으로 지칭한다. ‘청춘’과 ‘잉여’는 크게 두 세대를 구분하기 위해 사용됐다. 청춘은 ‘낭만적 시대’의 상징이다. 1980년대 3저 호황을 토대로 문화의 시대를 연 1990년대 청년들의, 어떤 낙관주의를 표현하고자 했다. 잉여는 (폴 그루그먼의 유명한 책 제목처럼) ‘기대감소의 시대’를 뜻한다. 2010년대 중반을 살고 있는 젊은이들이 공유하는, 가까이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어디쯤에서부터 시작된 불안정성을 표현하고자 했다. 하지만 청춘 안에는 항상 잉여가 존재하기 마련이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이 둘은 사실 하나의 양태를 다르게 표현한 것에 다름 아니다.

이 전시에는 1990년대 중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걸쳐 동시대적 시각성을 성취해낸 한국의 기성작가 다섯, ‘지금 여기’를 고민하고 있는 젊은 작가 다섯이 참여한다. 큰 틀에서 나이대가 각기 다른 10명의 작가들이 쌍으로 묶여있기 때문에 마치 신세대와 구세대가 대립되는 구도로 보이겠지만, 이 전시는 세대를 구분하고자 기획된 것은 아니다. 또 이 다섯 쌍들 각각이 완전히 독립적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세대간, 주제간의 연관성은 언제나 폭넓게 고려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전시는 1990년대 이후 한국 미술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일련의 양상과 함께 차이를 보여주고자 했다.

다섯 팀의 작가들은 오늘날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각자의 의제를 가지고, 작품 제작의 모티브나 방법론 등을 공유하는 형태로 신작을 제작했다. 전시는 이들의 신작과 이에 연관된 구작을 함께 놓고, 오늘날의 파편적 지형에서 90년대로 소급해 일종의 계보를 찾아보고자 했다. 과거의 무의미한 반복이 아닌, 그렇다고 점점 비평적 기준을 잃어가고 있는 오늘도 아닌, 미술의 새로운 “지속” 가능성은 어디서부터 찾아질 수 있을까?

90년대부터 냉전, 분단, 무속신앙 등 한국의 근대적 무의식에 관심을 가져 온 민중미술의 적자 박찬경과, 오늘날 보편적 현상으로서의 자본주의 구조를 탐구해 온 이완은 이번 전시에서 ‘아시아’라는 지정학적 주제를 공유한다. 박찬경은 이번 신작 <파경(罷經) 실험 1>(2014)에서 ‘전통(종교)문화’와 아시아 근대성 간의 관계를 드러내는 실험적 고찰을 준비했다. “‘전통(종교)문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참조로 삼을 만한 산물은 무엇일까? ‘전통(종교)문화’는 기호로 해석될 수 있을까?” 따위의 질문이 작업을 통해 펼쳐질 것이다. 박찬경이 생략된 과거를 발굴하는 고고학자에 가깝다면, 이완은 아시아의 오늘을 만든 결정적 증거로서, 과거의 파편을 모으는 일종의 탐정–수집가로 분한다. 오늘날 급격한 산업화 과정 속에 놓인 캄보디아 미얀마 인도네시아 등의 면면을 포착하는 신작 <움직임>(2012–2014), 쇠락한 식민지 설탕산업의 오늘을 담은 <메이드 인 대만: 설탕>(2013), 한국 근현대사의 정치적 순간과 연관된 수집품 모음<한국근현대사 취미수집 “정치 권력”편>(1940–현재)은 모두 비동시적인 것들을 동시에 출현케 한다. 몰락한(할) 기억의 몽타주는 오늘의 신자유주의 문화를 다시 한 번 숙고해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근대성의 모순을 비판하는 작업을 지속해 온 송상희와, 불가능한 시대를 은유하는 만화를 인터넷 상에 그려온 이자혜는 ‘어떤 세계를 모험하는 어떤 주인공’을 공통의 주제로 삼았다. 송상희는 신작 (2014)에서 15–17세기 유럽 열강들의 식민지 점령의 역사와 아프리카 탕가니카 호수에 사는 시클리드 물고기의 교미 장면을 병치하여 번식과 확장의 욕망을 폭로한다. 이자혜는 커먼센터의 건축 구조를 활용한 벽화를 선보인다. ‘앤니 로리’란 이름의 주인공이 마법 세계의 여전사가 되기 위해 겪는 시련들이 시대 별로 펼쳐진다. 주인공은 중세, 근세, 근대, 1970년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매 시대마다 부당한 죽음을 맞이하지만, 각 단계마다 전사가 될 미덕을 갖추게 되어 고통도 슬픔도 없는 마법 동산에 안착하게 된다. 각 벽마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과 죽은 주인공을 위로하는 파티 장면이 쌍을 이루어 그려지며, 문패트롤 동산이란 이름의 마법 동산이 구현된다. 시공을 초월하는 두 작가의 ‘모험담’은 유토피아에 접근하는 세대적 관점을 꽤나 적나라하게 보여줄 것이다.

작품 내에서 ‘이야기’를 소통 방식으로서 활용해 온 안규철과 김영글은 이번 전시에서 1990년대 주변의 이야기를 다룬다. 안규철은 90년대 자신의 대표작이었던 <그 남자의 가방>(1993)의 속편을 선보인다. <그 남자의 가방 II>(2014)는 <그 남자의 가방>의 시점으로부터 20년 후의 이야기다. 이전의 작품이 “다른 세계의 존재, 유보된 다른 가능성의 존재”에 관한 것과는 달리, 이번 작품에서는 “더 이상 아무 것도 기다릴 게 없음을 선언”하고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려는 태도가 암시된다. 안규철이 스스로의 작업을 비평함으로써 1990년대를 은유적으로 읽어낸다면, 김영글은 보다 근접한 시점으로 1990년대의 특정한 정서에 접근한다. 김영글의 신작 <가장(家長)의 근심>(2014)은 1997년 IMF 시기에 몰락한 중산층 남성의 모습을 되돌아본다. 가장의 방 안에 있을 법한 사물의 명칭을 비롯하여 당시 가장이 가졌을 심리를 묘사하는 300여개의 단어들이 전시장 사방에 배치된다. 두 작가의 이야기는 1990년대의 정서와 태도를 비평하는 동시에 지금을 새롭게 규정하는 단서를 제공해줄 것이다.

정연두와 백정기는 현대적 의미에서의 꿈과 소망, 그리고 그 실현이 갖는 의미들을 되짚는다. 신작 (2014)은 두 작가의 지난 작업과 다양한 오브제/기계장치를 유기적인 하나로 재조합한 작업이다. 정연두의 대표작 <내 사랑 지니>(2001)에는 이미지로서의 결과물에 선행하는 무수히 많은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그동안 소개되지 않았던 등장인물의 사연은 백정기의 촛불장치가 생산하는 전기 에너지의 힘을 빌어 라디오로 송출된다. 다른 방에 설치된 수조에서도, 똑같은 전력을 사용하는 기포분사기에 의해 작은 공기방울이 약하게, 끊임없이 새어나온다. 이런 요소들이 종합된 은 파국적 상황의 알레고리로서, 꿈과 희망, 여기에 포개진 어떤 불가능성을 동시에 작동시키는 장치가 된다. 두 작가는 오랜기간 ‘꿈의 작가’로 명성을 떨쳐왔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낙관과 비관 어느 한 쪽으로 쉽게 기울 수 없는 양가성을 드러낼 것이다.

박미나, 이상훈은 특정한 조건 아래 회화라는 전통적 매체를 재구성하려는 시도를 지속해 왔다. 이번 전시에서 이 둘은 ‘블랙 앤 화이트’, 두 색채를 공통분모로 삼아 느슨한 협업을 진행했다. 박미나의 신작 <2014 –Black>(2014)은 각 물감회사에서 제시하는 기본색을 다룬 <12 Colors>(2013)의 연장선 상에 있는 것으로, 각기 다른 회사의 공산품 유화물감 55개를 규격화된 캔버스에 채색해 ‘만들어진’ 검정색을 비교, 대조한다. 이번 전시가 첫 데뷔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상훈은 미디어버스에서 출간된 <조영법(造影法)1: 000 –111>(2014)의 다이어그램을 전시용으로 각색하여 책과 함께 전시한다. 그는 사생의 조건을 분해해 일종의 회화 제작 매뉴얼처럼 구성하고자 했다. 전시에서는 매체에 관한 숙고를 통해 다원주의의 막다른 골목에서 ‘최소한’의 미적 기준점을 확보하고자 하는 현대미술가들의 노력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아무 것도 새롭지 않다’고 여겨지는 오늘날 시각문화의 문제는 사실, 과거부터 끊임없이 반복된 것이다. 우리는 과거를 거울 삼아 문제를 발견하고, 현대적 관점에서 갱신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이것이 이해될 수 있다면, (박찬경의 문장을 도용하자면) 이번 전시가 “비록 어설픈 지도 그리기에 불과하다고 해도 문제될 것이 없다.” – 최정윤, 안대웅(유능사) (본문출처 - 커먼센터 웹페이지)

 **커먼센터 가는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