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노란봉투> 나와 우리와 그들과

2015. 1. 21. 02:56Review

 

나와 우리와 그들과

<노란봉투>

이양구 작, 전인철 연출 / 극단해인 

 

글_정은호

 

 

노란봉투가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노란봉투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정도로, 쌍용자동차 노조 문제에 가깝지 않았다. 다른 세계였고, 다른 고통이었다. 정혜윤 PD가 게스트로 나왔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그녀의 저서 그의 슬픔과 기쁨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 라디오를 들으며 이런 사건이 있었구나라고 속으로 생각하는 정도였다. 그 책은 쌍용자동차 노조 문제와 관련 르포 에세이였다. 이름만 알고 있다가 잊어버린 책이었는데, <노란봉투>를 보고 나서 번뜩 떠올랐다. 나는 도서관에 가서 그 책을 빌렸다. 책 안에는 연극 <노란봉투>에서 형상화되었던 팩트들이 실려 있었다. 쌍용자동차가 인수합병되었다는 건 오래 전의 일이었지만, 나는 이제야 알게 되었다. 나는 쌍용자동차 노조 문제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고통은 그들의 고통, 나의 고통은 나의 고통, 이렇게 선을 그어놓은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그들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겠다는 도덕의식을 가질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사회적 이슈를 대할 때마다 항상 불편했었다. 그것이 나에게 자꾸 의무를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마땅히 올바른 규칙 안에 내가 놓이려면, 상대방의 고통에 깊게 빠져들고, 또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을 취해야만 했다. 나는 그것이 힘들었고, 싫었다. 나의 삶이 타자의 고통에 의해 강제당하는 느낌이었다. 도우려면 내 힘으로 내가 주체가 되어 도와야 했다. <노란봉투>를 보고 든 생각 중 하나가 바로 도움의 주체성이었다. 세월호 사건에 대해 고인을 능멸하는 농담을 적는 인터넷 댓글이나 트윗 같은 것들은 유희이기 이전에 이런 불안감을 느끼는 이들의 방어기제라는 생각도 들었다. 타자의 고통에 이입될 정도로 여유가 없고 마음의 빈 공간이 없는 상태. 사실 이런 상태의 사람들은 널렸다. 당장 거리에 나가봐도 다섯 중에 하나 이상은 반드시 이런 고통을 겪는 사람일 것이다. 이런 이들 모두가 그런 방어기제를 가지고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윤리 차원의 문제다. 사람의 본성은 그 사람의 바닥에서 드러난다. 쌍용자동차 노조 문제를 비롯한 수많은 사회적 이슈들은, 바닥의 상태에서 우리가 어떤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가와 연관 지어 생각해 볼 문제라고 느껴졌다. 거칠게 말하자면, 편한 길을 택할 것이냐 혹은 굳이 가시밭길을 걸을 것이냐의 문제라고 볼 수도 있다. 굳이 가시밭길을 걷는 사람에게 말없는 박수 외에 더 무엇이 필요할까.

 

 

이런 얘기를 늘어놓는 것은, 연극 <노란봉투>를 보고 나의 생각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여전히 그대로다. 나는 쌍용자동차 노조 파업 사건으로 인해 눈물이 나지도 않았고, 슬프지도 않았다. 그들은 내게 3인칭이기 때문이다. 2인칭의 죽음은 무척이나 슬픈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대상이라 규정하고 마음을 쏟았던 개체가 소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3인칭에 관해서 나는 슬픔을 모른다. 내가 X축이고, 대상이 Y축이라면, 그들은 Z축에 있다. 다만 나의 윤리가 외쳤다. 3인칭을 2인칭 보듯 해야 한다고, 그것이 윤리라고 말했다. 그래서였는지는 몰라도, 나는 그들의 사건을 대하며 슬프지는 않았지만, 사회적으로 무엇이 문제인지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나에겐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한의 윤리였다. 그들의 죽음에 대고 내가 슬프다고 얘기한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나는 슬프지 않다. 굴뚝으로 올라간 노조원들이 단식투쟁을 벌일 때도 나는 슬프지 않다. 산 자와 죽은 자가 나뉠 때 그들이 느꼈을 고통을 나는 모른다. 나는 다만 메커니즘에 대해서 고민한다. 무엇이 그들을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만들었는가. 이 문제는 너무나 복잡하고 어렵다. 단순히 선과 악을 규정하기에는 너무나 크고 밑도 끝도 없다. 하지만 일차적으로 생각을 정립해본다면, 일단은 안정된 일자리를 구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다. 기본적으로 먹고 살아야 하니까 그렇다. 삶을 영위할 최소한의 조건을 제공해주지 않는 사회라면 존속할 가치가 없으니까 그렇다.

 

 

<노란봉투>죽은 자’(회사에서 잘린 사람들을 가리킨다)가 된 병로와 지호가 굴뚝에 올라가는 것으로 끝이 난다. 굴뚝에 올라간 이들은 그 위에서 추위와 배고픔과 때로는 벼락의 공포와 싸운다. 대체 어떤 힘이 그들을 그렇게 투쟁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일까. <노란봉투>에서도, 그의 슬픔과 기쁨에서도 나는 똑같은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억울함이었다. 잘릴 이유가 없는데 회사를 잘렸다는 것. 당장의 생계수단이 끊어졌다는 것. 노동자 측에서는 얼마든지 연봉 조정에 관련해서 우호적으로 협의할 의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해고만을 밀어붙이는 회사와의 소통불가능. 이 모든 답답함을 그들은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적어도 <노란봉투>를 보면 그렇게 보인다. ‘죽은 자산 자로서 회사에 남은 사람들을 욕하기도 하고, 그들도 그들만의 사정이 있는 것이라며 이해하기도 하며, 서운함과 섭섭함에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린 건지는 알 수가 없다. 산 자 중에서도 부조리함 분노해 회사를 나오는 사람도 있고, 계속해서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회사를 나가는 사람도 있다. 각자가 모두 각자의 사정이 있다. 각자에게는 각자의 입장이 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입장 하에서 모든 일을 받아들이기 마련이고,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최대 범위까지가 진실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이런 맥락은, 자본적으로 사람을 대하고, 고용과 해고를 사칙연산의 기호 따위로 취급하는 어떤 회사의 진실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회사는 자본 창출을 목적으로 한다. 자본이 많이 창출될수록 좋은 회사라 한다. 삼성은 자본을 많이 창출한다. 그렇다면 삼성은 좋은 회사다. 간단한 삼단논법이다. 그런데 난 좋은이라는 수식어 대신 다른 말을 붙여보고 싶다. 이를테면 효율적인이다. 혹은 생산력이 높은이다. ‘좋은이라는 단어는 너무 안일하지 않은가? ‘좋은이라는 단어는 마치 인심 좋은 사람의 웃음이 생각나는 단어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좋은은 아니다. 자본이 효율적으로 창출되기 위해서 국내 수많은 회사의 사원들이 부품화되어간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좀 더 차갑고 기계적인 텍스트가 좋을 것이다. <노란 봉투>에서 인물들은 돈 때문에 죽는다. 돈 때문에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나는 단 한 번도 돈 때문에 죽음의 위기를 겪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돈의 무서움을 잘 모른다. 허나 돈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에밀 뒤르켐은 현대 사회에서 모든 자살이 타살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쌍용자동차 노조원들의 고독한 자살은 모두 사회적 타살이다. 효율화되는 것들이 인간성을 앗아간다. 결코 좋지 않다.

 

 

<노란 봉투>는 언젠가 내 머릿속에서 잊힐 것이다. 쌍용자동차 건도 그렇다. 세월호도 잊힐 것이다. 나는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다. 그것이 윤리이므로. 하지만 잊힐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무엇일까? 나는 세상을 바꿀만한 사람은 되지 못하고, 되기도 싫다. 사회 문제를 개혁하는 건 나와는 동떨어져있는 일이다. 단순히 잊지 않는 것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결국 그 사건마저도 잊히고 만다. 나는 어설프게 아름다운 해피엔딩으로 이 리뷰를 마무리 짓고 싶지 않다. 그들을 잊지 않을 것이고, 나는 앞으로도 윤리적인 삶을 살아가겠다는 맹세로 이 글을 끝내기 싫다. 그건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다. 그래서 화가 난다. 사회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이 발생했다. 회사는 인간을 부품으로 취급했고 국가는 배에 타고 있던 승객들을 신경 쓰지 못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이다. 달라지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는데 현실은 여전히 지독한 것이다.

그렇다. 현실은 원래 지독하다. <노란봉투>는 나로 하여금 아무것도 결론내리지 못하게 만드는 연극이었다. “어떻게 연대할 것인가”, 연극은 질문을 던졌으나 나는 아무 답변도 하지 못했다. 손잡는 일이 필요하다고, 고독의 연대가 버티는 힘이 되어줄 거라고 말하는 연극이었다. 무어라 말하기 어려웠다. 불가피한 사건은 또 발생할 것이다. 곪을 대로 곪아버린 상처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올 것이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3인칭의 고통을 대할 것이며, 부조리한 사회에 맞설 것인가. <노란봉투>는 정말로, 나로 하여금 아무것도 결론짓지 못한 채 고민만 잔뜩 껴안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노란봉투>는 사회적 관점에서 좋은 연극이 되었다. 너무 쉽게 나오는 답은 정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답보다 중요한 것은 정확한 질문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노란봉투>는 정확한 질문을 해주었다. 이제 내가 답으로 답할 차례다.

 

필자_정은호 

소개_ 시를 공부하고 있다. 무엇이 되고 싶다는 마음은 없으나 미래에도 계속 시를 쓰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이양구

연출  전인철

출연  안병식, 김민선, 조시현, 백성철, 김민하, 양정윤, 윤미경

무대디자인  박상봉

조명디자인  최보윤

음악감독  박민수

홍보영상  정병욱

분장  장경숙

조연출  이연주

그래픽디자인  김솔

기획  드림아트

제작  극단 해인

주관  손잡고

후원  혜화동 1번지 5기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