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밥8월 레터] 직업윤리와 정직성

2015. 8. 18. 17:45Letter

 

직업윤리와 정직성

 

1.

어떤 축제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하면서, 당황스런(?) 사건 하나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대학교의 연기과를 기반으로 하는 연극팀이 <맹진사댁 경사>라는 작품으로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 팀에서 극작가 오영진 선생님의 이름으로 명찰을 신청했던 것이지요. 아마도 축제 구역에 마음대로 출입할수 있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다른 작품도 감상할수 있는 증표로써 통용되는 아이디의 갯수가 더 필요했나 봅니다. (혹은 착오?일 수 도 있겠고요)

'극작가 오영진' 이라고 적힌 아이디를 매고 축제 구역을 돌아다닐 누군가를 생각하니, 한편으로 웃음도 나고 한편으로 한숨도 나왔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희극작가였던 오영진 선생님도 예상하지 못한 희(비)극적인 상황이지요. '상식과 정보의 평준화' 가 이뤄지지 않은 위계적인 극단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하는 가장 낮은 계층에 있는 누군가가 저지를 수 있는 실수(?)겠거니 ...하는 구조적인 문제로 파악했습니다. 한편으로 이를 바로 문제 삼지 않고 발급해준 축제 사무국의 일처리도 퍽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나쁜 의도는 없었겠지. 괜찮을 거야. 그리고 일일이 따지기엔 너무 귀찮은걸. 하는 마음도 들었고요.

실은 예술가의 '악의' 를 미루어 짐작하는 일 만큼 우울하고 불편한 일도 없습니다. '왜 그랬을까?' 하는 동기를 유추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해명하지 않는 상대의 심중을 살펴보다 보면, '노답' 일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지요. 그 과정에서 그들을 재단했던 기준으로 나 자신을 돌아보는 일도 생깁니다. 수신자가 답하지 않은 질문은 고스란히 송신자에게 돌아오는 법이니까요. 그렇다면 나는 잘하고 있는가.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뻔히 들통날 극작가 대신 가상의 인물을 만들지 않았을까? 이를테면 딱히 의심가지 않는 드라마터그 정도?)

 

▲ 스피노자 <에티카>의 마지막 구절 "분명 모든 고귀한 것은 드물고도 어렵다."

 

2.

인디언밥은 예술가를 다양한 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존재로써 '신뢰할만한' 대상으로 바라봅니다. 그 대상이 젊은 예술가이거나 독립예술가일때 그 이해와 관용의 폭은 넓어지지요. 여기까지는 무리가 없으나, 가난한 혹은 소외된 예술이라는 맥락이 예술가에게 주어졌을 때, 비평의 단호함은 주저함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과정의 부족함을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과정의 부정(不正)함을 논할 때 고민이 생기는 것이지요. 신뢰할만한 대상은 불신의 대상으로 변하게 됩니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을 예술적으로'도' 올바른 것이라고 착각하는 경우도 그렇습니다. 대의와 명분을 앞세워 예술작품을 수행할 때 그것의 절차나 방식의 부조리함을 쉬쉬하면서 넘어가는 일 또한 종종 발생하지요. 한편으로 아이디어의 표절이나, 지원기금의 오남용, 혹은 스스로 자기 작품을 과대포장하거나, 공약으로 내건 기획을 실천하지 않는 등 비윤리적인 상황도 여전히 눈에 띕니다. 결과적으로 그로부터 발생하는 미적인 '손실' 은 고스란히 참여한 관객이나 함께한 동료 예술가들의 몫이 됩니다.

축제 안에서 벌어질수도 있는(?) 헤프닝 정도로 일단락되었지만, 이 일로 인해 계속 머릿속에서 질문이 맴돌았습니다. 지금, 여기 한국의 젊은 예술가에게 '직업윤리' 가 있을까? 예술가라는 직업을 통해 돈을 벌어본 적도 없고, 사회에 기여한다고 느껴본 적도 없는 이들에게 막스베버가 말한 '소명으로서의 직업' 이 가당할까. 사회적 약자로, 생존에 급급한 예술가는 도대체 어디까지 윤리적이어야 할까. 그깟 아이디 카드 하나가 뭐라고.

 

3.

제도나 법규는 그 설정에 있어서 '공리주의(功利主義)' 를 바탕으로 합니다. 모두가 '룰' 을 지킬 때, 그로인한 이익과 가치는 모두에게 가장 크게 돌아간다는 믿음이지요. 살펴보면, 독립예술이나 젊은예술은 제도권 예술이 갖고 있는 권위나 불합리해 보이는 구조 '그 자체를' 극복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법규를 엄수하지 않을 때 어김없이 나타나는 비도덕적 행태를 타도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더 많지요. 역설적으로 독립예술과 젊은예술은 무너진 기성의 '공리주의' 의 원칙을 '제대로' 복원할 임무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당대의 가장 윤리적으로 예민한 존재들이 독립-예술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지요.

예술가의 직업 윤리가 무엇인지 고민될 때,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기준은 바로 나 자신과 동료 그리고 사회에 대한 정직함이겠지요. 귀차니즘과 괜차니즘이 만연한 예술계 혹은 비평계에 '정직성'은 잃어버린 우리의 자존감과 책임감을 일깨워줍니다. 직업으로써 자본주의 사회에 기여하지는 못해도, 소명으로써 민주주의 사회에 참여하게 되는 동기가 되기도 하겠지요. 그러고 보면 뛰어난 예술가만큼이나, 정직한 예술가가 되기는 어렵고도 드뭅니다.

요절한 설치작가 박이소는 가수인 빌리 조엘의 <Honesty>를 직역한 <정직성>이라는 노래를 남겼습니다. 아마도 '연애' 나 '세상살이' 를 염두에 둔 팝송 가사가 실상 예술가의 '윤리강령' 에 더 어울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지요. 빌리 조엘의 낭만적인 목소리 대신, 투박하고 촌스럽게 들려오는 박이소 작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봅니다. 이번 달 레터는 본 추천곡을 함께 들어보는 것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따스함을 찾기는 어렵지 않아. 그냥 사랑하며 살면 돼. 진실을 찾는다면 그건 힘든 일이야. 너무나 찾기 힘든 바로 그것. 정직성, 정말 외로운 그 말. 더러운 세상에서."

 

 

2015년 8월

독립예술웹진 인디언밥 편집위원

정진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