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에서 출발한 햄릿, <'김현탁'의 햄릿>에 투영된 욕망

2009. 4. 10. 14:2307-08' 인디언밥

어린아이에서 출발한 햄릿, <'김현탁'의 햄릿>에 투영된 욕망
  • 김민관
  • 조회수 245 / 2008.11.19

 김현탁의 ‘햄릿’은 원작을 크게 변용했다고 느껴지기 이전에 새로운 감각으로 와 닿는다. 동시대를 사는 연출가에게 <햄릿>은 여전히 유효한 주제이면서 동시에 <햄릿>을 통해 자신의 관점을 조금 더 명확히 투영시킬 수 있었던 듯 보인다.

 ‘햄릿을 가지고 이 시대에 무엇을 말할 것인가?’ 이전에, 햄릿에 어떻게 연출가로서의 자신의 욕망을 투영시킬까에 이 작품은 집중되어 있다는 생각이다.


 작품은 주인공 ‘햄릿’부터, ‘레어티스, 호레이쇼’ 등을 어린아이들이 연기한다. 극은 아이들의 어른들로의 유희적인 역할 놀이로 치부될 수 있을 정도로 어떤 측면에서 실재감이 없다. 배경 역시 햄릿 그대로를 복원한 것이 아니다.
 가령 햄릿을 골리는 두 아이들은 심각한 갈등의 양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화되지 않은 동네 꼬마들의 보편적 일상 정도로 비친다.
 그 바깥에는 어른들이 존재한다. 크게 ‘오필리어’가 어린 햄릿과 관계를 맺을 때를 제외하고는 안과 밖이 분명하게 금단의 영역으로 넘나들 수 없게 설정되어 있다. 거꾸로 보면 유아적인 속성이 지배하는 주 공간 바깥에 현실이 있다.


 바바리를 걸친 중년 남성의 등장은 사오십 대 중년의 실직된 초라한 아버지상을 연상케 했다. 사실상 햄릿의 죽은 아버지로 상정되어 있는 것이지만, 시대적 속성을 현대적인 기표로서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이로써 조금 더 현실의 시선을 일치시켜 가는 지점을 만들 수 있다.
 안에서 햄릿은 그 바깥을 들여다보는데, 아이의 세상이 갖는 어른과의 맞닿을 수 없는 소통의 지점은 유리된 현실이지만, 반면 햄릿의 시선의 범위 내에 있다. 동시에 그러한 현실 자체를 반추하는 객관적인 관찰자로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햄릿의 아버지가 존재하는 것이다.


 첫 번째로 등장한 만화 영화의 주인공에 투사된 아버지의 목소리는 햄릿의 머리에 메시지를 세뇌시키고, 이후 아버지는 죽은 자로 극의 단절된 부분이 아니라 하나의 실재이면서 햄릿의 내면세계에 직간접적으로 침투하고 있다. 
 햄릿의 고민은 주체적인 것이 아니고 어른의 욕망이 투영된 다소 기형적 구조로 드러난다. 어린 아이가 연기하기에 어설픈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리얼한 것이다. 대사를 몸으로 적용시켜 가는 그들의 과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면서 연극을 생성시켜 나가고 있다는 분명한 인식의 지점이 관객에게는 성립되는데, 사실상 유치원 재롱 잔치에 학부형들이 와서 단체로 관람하는 것 같은 분위기가 어느 정도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어린 아이들이 주축이 된 '김현탁'의 '햄릿', 그중에 극을 확 열어젖힌 '뮤지컬' 신

 오히려 그런 것들을 포함해, 자신들의 어설픔이나 아이로서의 귀여움을 대사에 대한 몰입에 덧대어 바라보는 관객들의 시선을 자각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연기는 놀랄 만큼 관객의 반응에 전연 개의치 않고, 훈련된 몸을 순차적인 규칙에 따라 마음껏 풀어 헤쳐 놓았는데, 초라한 현실적 모습 건너, 지조 있게 한결 같은 모습을 유지하며 현실에 용기 있게 맞부딪치는 독립예술의 어설프더라도 진지한 실제적인 현장과 맞부딪치는 독특한 맛과 쾌감을 선사했다.
 이들이 노래를 보여 주는 갑작스러운 뮤지컬적인 장면에서는 답답한 햄릿의 흐름을 흩뜨리는 전복적인 퍼포먼스 속에 그들의 끼를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장치해 놓았다. 햄릿을 괴롭히던 두 아이가 보컬과 베이스를 맡고, 햄릿이 자신에게 덧씌우던 통을 드럼 삼아 셋이 어우러져 공연을 했다. 이는 또한 그 밖을 튀어 나온 실제이다. 한편으로 극을 판타지나 우리가 생각하는 햄릿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형식적으로 차용한 아이들 장난을 보는 것일 수도 있다는 사유의 지점을 또한 고려해 보게 하는 것이다.


 다시 극 현실로 돌아오면, 양식적인 연기의 양식을 따라하듯 과도한 힘을 실어 발성을 내는 아이들이 극을 전개시키는 주도적 역할을 맡았지만, 사실상 그 대사의 무게가 지니는 햄릿의 극적인 심각성을 사유치 못하며, 그것을 나열하는 평면적인 질서 안에서 극을 이끌어 간다. 사실상 그들은 그들 스스로는 어쨌든 단순한 대사 전달의 매개체이기도 했다.
 사실상 각각의 캐릭터가 이들에게 덧입혀지는 것인데, 이는 원작에 대한 사전적 이해로써 충분히 가능했고, 아이들은 모든 것을 그 속에 투여하는 열정을 보임으로써 햄릿은 훌륭한 현재진행형의 순간으로 태어났다.


 이로써 이 연극은 양식화된 연기와 대사를 암송하는 차원의 연극 자체를 메타적인 시선에서 비웃듯이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원작 텍스트를 맡은 배우를 달리함으로써 대사를 결과적으로 명확치 않게 하며, 연극이라는 공연 양식의 규칙을 이행함을 통해 아이들의 흰색 러닝셔츠를 걸친 흰 살결의 몸이 두드려져 보이며 몸주체가 살아나는 것이다.
 햄릿이 어른 오필리어와 뒹구는 사랑 신은 미묘한 감각을 안겼다. 또한 햄릿이 숙부 ‘클로디어스’와 어머니 ‘거트루드’의 섹스 장면을 햄릿이 지켜보는 데에서도. 햄릿의 살에 맞닿는 부분은 유아기적 욕망과 트라우마를 동시적으로 건드리는 일이기에 이는 진정 자극적이다.


 동시에 극의 호흡은 전체적으로 짧고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 막간에 여러 차례 울리는 ‘don't let me be misunderstood’를 비롯해서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에 나오는 'a time for us'는 칠팔십년 대의 감수성이 오버랩 되는 것 역시 재미있는 부분이다. 사랑의 감정을 다룬 노래를 따라 극은 햄릿 원래의 복수와 갈등의 코드보다는 사랑과 열망, 억압 등의 코드가 생성된다.


꿈 속에, 내지는 자신만의 내면세계에 유폐되어 있는 햄릿... 그리고 어른들의 시선과 경계 점을 긋는 세계 안에 있다.

 단편적인 이미지의 나열로 보일 정도로 여러 막이 빠르게 스쳐 감은 어렴풋한 어릴 적 기억으로 관객을 소급시키면서 다시 스스로의 기억과 마찰하는 지점을 만들어 낸다. 햄릿의 재현적인 내러티브의 질서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실재적인 체험의 자신의 모습이 겹친 햄릿을 만나는 것이다.
 그것이 성에 따른 분명한 구분을 보인다면, 여성에게는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모성애적인 일면과 맞닿는 측면이 있을 듯하다. 아이들이 너무 귀엽다는 식으로.


 마지막에 햄릿은 아버지의 손에 죽음을 당하고 마는 것으로 끝이 난다. 봉쇄되거나 차단된 현실에 질서를 파기하며 등장하는 아버지는 파괴와 극단의 결말을 자연스레 상징하며, 모성과 연계된 자아도취의 안락한 욕망이 부성의 강력한 금기의 기호가 작동하며 유아기를 단절시키며 둘을 비교시키고 있다. 즉, 햄릿의 차단된 욕망과 자폐적 사유 등을 표면화하면서 반대로 현실로 돌아오면서 트라우마로 잠재되는 욕망, 그리고 아버지 사회의 근엄한 질서를 드러내고 있다.


 극은 기억의 부름과 욕망 이후 현실과의 마주침을 통한 상처와 단절의 과정으로 직접적으로 관객과 마주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는 햄릿을 더욱 명확하게 연출가의 시선에서 반추하면서 상징적으로 결말까지를 가져 간 것이다.


 어설픈 원작 <햄릿>의 따라 하기나 변용은 원작 <햄릿>이 파기시킬 수 없는 굳건한 벽임을 다시 상기시켜 주면서 끊임없이 복제 재생산 돼서 폐기 처분되는 생산품이 될 것이다.
 또한 <햄릿>은 단순히 전달 형식과 매체의 다른 쓰임을 통해 우리의 감각을 적확하게 침투하는 <햄릿>을 우리에게 다시 안겨 줄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햄릿>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와 다룰 수 있을 것인가, 이전에 중요한 것은 연출가의 고민이고 그보다 햄릿이 자신에게 어떠한 해석의 지점을 남기는가를 결과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이를테면 또 다른 차원의 동시대성일 듯하다.
 <햄릿> 자체를 형식적으로 차용하고, 오히려 연출이 의도한 것들을 담아내면서 다른 햄릿을 만들어 냈고, <햄릿>에 대한 부담 역시 덜어 냈다는 생각이 든다. 즉, 대부분 빠지기 쉬운 의도 대신 의미의 질서에 사로잡히며 원작 이후의 모조품을 만드는 잘못된 선후 관계의 전철을 밟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른의 세계를 안에서 지켜보는 어린 햄릿, 이는 실재적이면서 트라우마로 각인되는 강렬한 기억으로 잠재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햄릿>에 어린 아이를 대입한 것은 매체의 쓰임을 다르게 한 것이 아니라 리얼 그 자체를 보여 주기 위한 연출가의 의도이다.
 동시에 아이의 욕망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죽음’의 모습, 그 절망을 우리는 어떻게 수용해야 할까? 현실과 욕망의 간극을 이후 어떤 식으로 풀어 갈지가 연출 ‘김현탁’ 극을 보는 관건인 것이다.
 

보충설명

[사진제공=서울변방연극제]

공 연 명 : 김현탁의 햄릿
공연일자 : 2008년 11월 14일(금)~15일(토)
공연시간 : 11월 15일(금) 오후 6시, 16일(일) 오후 6시
소요시간 : 50분
공연장소 : 가변무대 (한성대입구역에서 도보 20분)
공연연혁 : 초연
공연료 : 10,000원

원작 : 윌리엄 셰익스피어
공연단체 : 연극집단 성북동비둘기
재구성/연출 : 김현탁
출연 : 김주희 박선주 황정식 전정관 이진성
(아역)남유현 김동규 한승우
음악/무대/의상/조명/소품디자인 : 김현탁
조명오퍼레이터 : 황준호
음향오퍼레이터 : 김미옥
무대진행 : 김성훈
무대감독/제작 : 김성태
조연출 : 이성구


'햄릿'은 제11회 서울변방연극제에서 선보인 작품이다. 앞으로 연출가 '김현탁'은 자신의 이름을 타이틀로 건 고전이 된 작품들을 계속해서 재해석하는 작업들을 선보일 예정이라고 한다.
서울변방연극제는 매년 '관객비평단'을 통해 작품에 대한 다양한 시선을 아우르고자 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홈페이지 http://www.mtfestival.com에 있는 '관람평'을 통해 11회 서울변방연극제에 참여한 여섯 작품에 대한 여러 사람의 공연 리뷰를 보며 '변방'에 참여한 다양한 색채의 작품들을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필자소개

김민관 mikwa@naver.com
공연예술 분야 자유기고가, 現다원예술 비평풀(daospace.net)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