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4. 10. 14:27ㆍ07-08' 인디언밥
- 유효진
- 조회수 725 / 2008.12.18
- 젊은 연출가와 작가로 구성된 ‘혜화동 1번지’ 4기 동인들이 펼친
‘2008 혜화동 1번지 4기동인 페스티벌 - 극.장.전’의 첫 번째 작품 -
<누가 대한민국 20대를 구원할 것인가?>
#1. 누가 대한민국 20대를 구원할 것인가.
어찌 연극인 줄 알았으랴. 참으로 직설적이며 심오한 이 제목만 듣고선, 대학교 한 기슭에서 벌어지는 세미나나 포럼쯤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친구들과의 모임 자리에서 새로운 연극 한 편을 보고 왔노라 슬쩍 설을 풀어 놓으니, 유통기한에 다다른 대학교 4학년인 친구들의 반응은 의외로 냉담했다. 눈을 번쩍 뜬 채 이구동성으로 “그래서? 그래서, 누가 구원해 준다던? 응?”과 같은 열렬한 리액션을 기대했건만, 그들은 각자의 포크질에 열중하며 눈길도 내주지 않은 채 심드렁하게, 이렇게 물었다. “그래서, 거기선 누구라고 하던?” 나는 그들의 무심한 표정에서 나를 포함한 현 대한민국 20대의 싸늘한 냉소주의를 어렴풋하게나마 읽을 수 있었다.
#2. 연극에 비친 대한민국 20대의 우울한 초상.
작품은 다양한 세대들의 시선 속에 비친 대한민국 20대의 모습을 조명하고 있다. 혹자는 20대를 끈기 없고, 패기도 없고, 버릇까지 없는 총체적 난국의 세대라 규정한다. 또 다른 혹자는 20대를 청년 비정규직 문제를 비롯한 자신의 세대 문제와 사회문제엔 도통 관심도 없고 그저 제 안일만 챙기는, 그에 더해 무식! 하기까지 한 희망 없는 세대라 규정한다. 누군가는 20대가 무슨 약을 잘못 먹었기에 조로(早老)하여 점점 보수화되어 간다고도 한다. 이렇게 기성세대의 다양한 시선의 ‘조합’으로 완성된 연극 속 20대의 초상은 고통과 슬픔과 분노에 복받쳐 일그러져 있다. 마치 ‘파블로 피카소’의 그림 ‘우는 여인’과 같이 말이다.
#3. ‘자화상’이 아닌 ‘초상화’, 그 아쉬움.
작품 속에서 대한민국 20대들은 그러한 기성세대들의 시선과 냉혹한 세상에 눈물로서 항변한다. 자본주의 구조 하에서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기성세대에게 착취당하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르는 대학 등록금을 조달하느라 등골이 빠지고, 유례없는 청년실업난 속에서 취업 6종 세트의 아이템을 확보하기 위해 ‘영혼이라도 팔겠다’고 절규한다. 기성세대가 바라보듯, 그렇게 일그러진 청춘의 모습을 띨 수밖에 없는 서글픈 현실을 이야기하는 20대들의 모습에서, 몇몇 관객들은 이내 눈물을 훔치기도 한다.
그러나 비록 20대를 대표한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개인적인 감정의 원류를 20대라는 세대적 보편성에서 찾아볼 수도 있을 ‘나’는 그 부분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보다는 되레 약간의 아쉬움과 신파적 흐름에 대한 불편함을 느꼈다. 연극 속의 대사에도 있었듯, 기성세대가 신세대를 바라볼 때마다 읊조리는 ‘요즘 젊은 것들은!’과 같은 뇌까림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해 왔다. 세대 간 문화적 단절과 소통의 부재는 역사적으로 관성처럼 늘상 존재해온 것이므로, 사실 그다지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오늘날 기성세대와 20대의 ‘관계’의 키워드는 불신과 적대, 그리고 경쟁이다. 그러나 작품 속에서는 정작 20대가 기성세대에게 느끼는 불신과 세상에 대한 분노는 온전히 담기지 못했다. 스스로 자화상을 그리지 못한 오늘날 청년들을 대신해 이 작품은 20대들의 대변을 자처했지만, 그 역시 결국 기성세대의 시선으로 예측한 20대의 모습이라는 점에서 한계와 아쉬움이 엿보였다.
#3-1) 작품 속, ‘기성세대’들이 20대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반박1 : 우리의 이름은 무식한 대학생?
연극에서도 낭독했듯, 어느 한 언론인은 신문을 통해 대놓고 20대를 향해 ‘그대 이름은 무식한 대학생!’이라 일갈했다. 20대 대학생의 엄청난 굴욕이 따로 없다. 물론, 이는 우리 세대보다 앞서 청춘의 시절을 겪은 인생 선배의 애정 어린 타이름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사실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다. 대학에 낭만이 사라졌다거나, 대학생이라면 마땅히 학문삼매(學文三昧)에 빠져봐야 한다는 등, 기성세대가 현 20대에게 보내는 주옥과 같은 다양한 훈육용 말씀은 실제로 나와 같은 대학생들의 낭만임과 동시에 낭만일 뿐이기도 하다. 함께 나아가기 위해 고민하는 학문을 꿈꾸었던 나와 패기탱천할 대한민국 꽃청년들은 또다시 남보다 먼저 내달리기 위해 경쟁해야 하는 취업공부에 익숙해져야 하거나, 행정고시다 임용고시다 사법고시다 언론고시다 해묵은 고시생으로 생을 연명해야 한다. 이 속에서 마음껏 자유롭게 이 나라 지식인의 좌표를 그어 보는 일에는 사실상 어마어마한 용기와 결단력을 요구한다. 사회과학과 인문학 서적대신, 사람과 사람 사이를 합리적으로 이용할 것을 종용하는 각종 처세서와 실용서적에 목메고, 토익과 학점에 벌벌거리는 것이 바로 오늘날의 차마 부인할 수 없는 20대들의 모습이다. 틀에 박힌 취업공부와 변질된 대학교육 속에서도 어김없이 우리를 순응케 하는 위대한 원동력은 물론, 대학 졸업 후의 ‘취업’이란 생로의 보장이다. 개개인의 의지를 꺾으며 전진하는 오늘날의 현실이 그렇단 소리다. 그로 인해 현재 20대들이 가질 법한, 혹은 가져야 할 모든 고민들과 문제의식은 오로지 경제적 현황과 취업 문제라는 하나의 용광로로 수렴되어 진다. 경제 문제에 초점을 맞춰 20대들의 현실을 이야기했던 연극이 이를 방증한다.
이러한 현 20대들의 모습이 기성세대들의 눈에 마뜩찮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특정한 시대적 상황에서 공유된 집단적 경험을 기반으로 형성된 한 세대의 우월적 시선과 특권인식으로, ‘이렇게 해 보세요. 왜 못하죠? 한심하군요. 무식해욧!’이라며 현 세대를 평가하고 재단한 일을 두고 지당하신 말씀이라며 마냥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연극 속의 20대들은 이러한 기성세대들의 시선에 ‘그래도 그 땐 취업 걱정은 없으셨잖아요.’라고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린다. 결국 연극 속의 20대는 나약하고 힘없는 존재로 그려진다. 결말 부분에서 20대에게 주어진 것은 지옥행 열차를 탈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표를 찢어 버릴 것인가 하는 제한된 선택지일 뿐이었다. 20대는 기성세대에게 휘둘리며, 때론 한심하고 무식하다고 욕을 얻어먹으면서, 왕왕 착취를 당하고 혹은 경제적으로 빌붙어 살면서도,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기성세대 앞에서 동정과 이해와 구제를 요청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우월 관계를 내재한 ‘이해와 동정적 시선’만으론 결코 현실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3-2) 작품 속, 기성세대들이 20대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반박2 : 불온하고 불편한, ‘20대의 보수화’
그동안 정치권에서 청년들에 대한 철저한 이해 과정을 거쳐 시시 철철 내놓는다는 것은 결국, 아마도 영원히 지켜지지 않을 것 같은 ‘일자리 창출’이나 ‘등록금 인하’와 같은 구닥다리 의제였다. 정치에 대한 매번 반복된 배신감을 겪다보면 그 자리엔 자연스레 불신과 냉소가 자리 잡게 마련이다. 해도 해도 안 되기에, 20대의 적지 않은 일부는 이번 해엔 이념에 관계없이 ‘경제 회생’을 모토로 내건 경제 대통령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어 보았다. ‘세대의 내부 경쟁’을 넘어서 ‘세대 간 경쟁’이 치열해지자, 이 시대의 청년들은 내 아버지와의 밥그릇 다툼으로 문제가 심각해짐을 깨달았다. 결국 경제의 전체적인 파이를 키워야겠다는 절박한 필요성에 의해, 경제 발전을 약속하는 후보에게 표를 던져준 것이다. 그 선택의 결과가 얼마나 참담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문제는 일단 차치해 두고서라도, 그 현상을 두고 ‘20대들의 보수화’라고 운운한다면 곤란하다. 그것은 오로지 기성 정치세력에 대한 ‘선택’의 권리만 부여받은 청년들에게 신뢰와 비전을 얻지 못한 기성세대의 '내부적 문제'를 철저히 은폐하고, ‘20대의 정치적 무관심과 보수화’라는 해석의 틀로 20대에게 문제의 책임을 전가하는 행위이다. 이제 ‘20대의 보수화’라는 기성세대의 언어를 ‘20대에 대한 정치적 철학의 부재’라는 언어로 바로 잡아야 한다. 20대인 우리가 이 세상에 정말로 외치고 싶은 것은 ‘우리가 보수화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해해 주세요.’가 아니라, ‘우리가 보수화되었다고 말하는 기성 정치세력들의 불온함’이다.
#3-3) ‘작품’이 20대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반박 : 우리는 ‘이해’를 바라는 게 아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실제로 이 작품은 많은 부분을 ‘현 대한민국 20대들의 현실에 대한 이해’에 할애했다. 물론, ‘이해’라는 과정은 변화와 희망을 상상하게 하는 출발점이고, 언제나 지속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끝나지 않을 이야기이긴 하다. 그러나 노상 ‘이해 작업’에만 머무르니 문제가 된다. 절차에 얽매이다 보니 정작 중요한 그 다음 진행을 하지 못한다. 청년실업이다, 88만원 세대다, 청년들이 곳곳에서 비명을 지르는 이쯤 됐으면 ‘차이’에 대한 상호 이해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는 서두는 이제 그만 매듭을 짓고, 본격적으로 실제적인 변화와 대안을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닌가. 20대인 우리 역시도 ‘이럴 수밖에 없는 우리를 이해해 주세요.’와 같은 눈물의 읊조림이나 사춘기적 감상은 진즉에 졸업을 했어야 맞고, 이미 졸업을 했다. ‘이해’는 언제나 말뿐이라는 것을 이미 체험과 경험으로 체득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기성세대들로부터의 이해와 동정을 원하는 게 아니다. 청년들의 목소리가 정책적 의제로 반영되고, 그를 통해 기성세대와 청년세대가 동등한 입장에서 실질적인 변화를 약속하는 실효적 제도와 구체적인 정책을 생산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 20대들이 결국 88만원 비정규직으로 가는 ‘지옥행 열차’를 타지 않고 마지막 남은 표를 찢어 버린다면, 정말 그 다음은 어떻게 될까? 그 전까지는 기성세대들에게 이해와 구원을 촉구하던 작품 속의 20대 청년들도, 결국 작품의 말미에 가서는 현재의 구조적 문제를 ‘우리들의 선택과 책임 문제’로 귀결시키고 방치해버린 듯한 인상이 강하다. 자연스레 시스템을 거부한 뒤의 대책 마련도 오롯이 청년들의 몫으로 돌려진다. 작품 속의 주된 시선의 주체가 20대를 바라보는 기성세대였다는 점에서, 작품 마지막 부분의 해결 주체가 결국 20대로 설정된 것에 대한 배신감은 더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만약 우리들 앞에 ‘열차를 탈 것인가, 바닥에 나앉을 것인가’라는 단 두 가지 선택지만 있을 뿐이라면 20대의 어느 누가 탑승을 거부할 것이며, 그 누가 다른 동지의 탑승거부를 강요하고 탑승한 자를 비난할 수 있을 것인가. 지옥행 열차라도 놓치면 도태와 낙오자, 집안과 사회의 골칫덩이라는 낙인을 지울 수 없을 텐데 말이다. 열차를 타고 타지 않고의 문제와, 희망을 놓고 놓지 않고의 문제는 그야말로 개개인이 알아서 할 자유로운 선택권의 영역이다. 그 누구도 20대에게 자본주의 시스템에 편입됨을 거부하라거나,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과 패기를 잃지 말 것을 강요할 순 없다. 무책임한 희망 주입이 외려 청년들을 더욱 지치게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결국, 이쯤에서 이 사회가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은 기성세대와 청년세대가 동등한 시선에서 함께 연대하는 일일 것이다. ‘지옥이 아닌 곳으로 열차의 궤로를 어떻게 수정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함께 고민하는 일말이다. 이것이야말로 대한민국의 20대와 더불어 기성세대 모두가 진정 구원되는 길이다.
#4. “어떤 선진자본주의 국가도 자국의 젊은 세대를 이렇게까지 망가뜨리진 않습니다.”
연극 ‘누가 대한민국 20대를 구원할 것인가’가 들려준 에피소드와 대사에는 사실상, 그렇게 새롭다할 이야기가 없었다. 다만, 지금까지 20대에 대해 산발적으로 논의된 이야기들을 한데 묶어 ‘누가 대한민국 20대를 구원할 것인가’에 대해 담론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든 것에 이 작품의 진정한 의미가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작품을 보면서 끊임없이 느꼈던 아쉬움은 ‘왜 이러한 문제제기와 이야기를 온전히 20대인 우리의 시선에서 하지 못했는가’였다. 사실 오늘날의 이 현실과 직접 맞대면해야 할 이들은 다름 아닌 20대, 우리 자신이 아닌가. 따라서 자생적인 다양한 문화적 시도들을 통해 20대에 대한 자체적 담론을 형성하고, 이러한 담론과 철학이 현실의 문제를 풀어가기 위한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도록 하는 실천이 요구된다. 연극 ‘누가 대한민국 20대를 구원할 것인가’가 20대에게 하고 싶은 진짜 이야기가 어쩌면 바로 이 지점에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보충설명
2008 혜화동1번지 4기동인 페스티벌-극.장.전
<누가 대한민국 20대를 구원할 것인가?>
작/연출 김재엽 | 극단 드림플레이
날짜 : 2008.11.12~11.23
장소 : 연극실험실 혜화동 1번지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
문의 : http://dreamplayer.cyworl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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