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4. 10. 14:31ㆍFeature
인디 10년, 아직도 인디는 유효하다!
- 남유진
- 조회수 1433 / 2007.07.11
인디 10년, 90년대를 넘어오며 이념의 대안으로 등장한 문화의 시대에서 인디는 어디만치 와있고 어떤 흔적을 남겼는가? 또 서울이 아닌 지역에서 인디는 얼마큼 성장하였을까?
결과부터 말하자면 위의 두 질문에 대한 답은 이렇다. 현시대의 인디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는 것, 그리고 여전히 홍대 앞 시간 속에서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지역에서 인디가 어떤 존재가치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건 아니다. 주목받지는 못하더라도 지역에서 고군분투하는 인디스트들은 더욱 치열할지도 모른다.
인디란 무엇인가? 누구도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차라리 인디밴드는 누구인가? 독립영화 감독은 누구인가? 독립미술가는 누구인가? 하는 ‘대상’을 지칭하는 것은 쉽다. 그렇지 않고 인디음악은 무엇인가? 독립영화는 무엇인가? 독립미술은 무엇인가? 독립의 진정성은 무엇인가? 하는 ‘개념’을 지칭하면 우리는 사고의 분열을 느끼기 시작한다. 과연 클럽에서 연주하는 밴드가 인디인가? 거리에서 힙합을 추는 댄서가 인디인가? 아니면 담벼락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과연 인디인가?
만약 듣는 사람이 ‘인디는 독립-independent-이다‘라는 대답을 듣는다면 그는 다시 무엇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인가? 라고 재차 질문을 해 올 것이다. 자, 당신의 대답은 무엇인가?
이때부터 답하기가 곤란하면 쉽게 ‘비주류문화’라는 말을 내뱉는다. 좀 더 생각한 사람은 ‘자본과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대답을 내놓는다. 그럼 이 두 가지 대답은 인디의 충분조건이 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렇듯 지나간 인디10년이 아직 우리사회에 명쾌한 공감대를 형성시켜주지 못하고 있다. 인디는 단순히 어떠한 상태나 현상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인 동태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90년대 중후반 시작된 인디는 여전히 개념 정립이 진행 중이고, 그 활동 역시 명확한 경계를 구분 짓고 있지 않다. 명확하고 고정된 울타리는 아마도 인디의 생명이 다한 후일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문화예술은 쉼 없이 기존의 장르를 허물고 해체하며 다양한 혼합 변종을 이루어나가면서 예술의 개념조차 순수예술에서 탈피하게 만들었다. 현대 문화예술의 다양함 속에서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예술의 흐름은 인디가 생성되고 유지되는 토대를 제공하였다. 독립영화를 비롯하여 음악, 미술, 문학 등 동시대의 문화예술 전 방위에 걸쳐서 전개되는 인디의 움직임은 기성세대 및 주류문화에게 섣불리 손을 대어 주저 안칠 수도 없고, 내버려두자니 ‘긴가 민가’ 자꾸 뒤가 켕기는 포섭과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인디적 움직임은 한때 홍대 앞 음악씬을 중심으로 주류 매체의 폭발적인 관심을 끌어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는 주류매체의 가십성 기사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며 지속되지 못하였다. 마치 이들 주류매체들에 의해 성공적 데뷔처럼 기대를 불러 모으기도 했지만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컸었다. 오히려 이들 매체의 인디에 대한 잘못된 태도들은 이후 인디의 활동영역을 스스로 한계 짓게 만드는 부작용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러한 점들은 주류매체와 주변 외부관계들이 그들의 관심사와 판단의 잣대를 자의적으로 들이대고 난도질한 폭력과 다름없다. 유행처럼 퍼지던 인디에 대한 가십들은 그들의 테두리 안에 가두어지고 개념 지워졌으며 치기적 감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다루어졌다.
인디에겐 인디적 잣대가 필요하다. 주류사회의 잣대와 평가는 대항해야할 대척의 한 지점이다. 10년의 진화를 겪는 동안 이러한 인디의 내공은 단련되었고 주류사회의 시선이 고정된 순간 그 스스로의 경계를 탈피하고 허무는 태생적 본성을 유지하게 되었다. 인디는 시작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그들과는 다르게 그 나름의 방식으로 진화해오고 있는 것이다. 흥하고 망하고의 문제는 인디에게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인디는 독립 그 자체의 지속적인 의미의 재생산과 활동에 있다. 독립한 후의 흥망성쇠는 이미 품을 떠난 자식의 문제다. 단지 주류시스템에서의 ‘흥’의 문제만 인디가 고민을 하였다면 인디는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흥’의 문제가 도외시 되었기에 우리사회에서 얕게나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자수성가’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인가? 몇몇 스타탄생과 성공신화에 의존한 자본주의적 이상은 다수를 억누르고 현혹시키는 천박한 광고에 지나지 않는다. 개인의 꿈과 신념, 도덕적 양심과 철학을 주류적 사회시스템과 타협하고 내던지지 않고는 자본주의국가에서 ‘흥’하기란 불가능하다. 이러한 주류적 시스템을 경시하고 비웃는 모든 존재들에서 인디는 시작되고 또 그 일탈을 꿈꾸고 욕망한다.
그러면, 주류문화와 제도로부터의 독립은 처음부터 가능하였는가. 답은 '없다‘. 혁명이라는 말이 더 이상 불온하지 않는 시대에 독립혁명이라는 말은 새삼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또한 그 자신이 거대한 자본의 토대 안에 존재하면서 독립을 선언한다는 것은 상호모순적이다. 주류 시스템으로부터의 독립이 주류시스템을 완전히 탈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독립을 이야기하지만 독립의 토대는 마련되지 않았다. 주류시스템의 안에서 독립을 외치는 것이다. 우리가 먹고 사는 지속적인 생존방식은 주류적 시스템의 바깥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세계를 꿈꾸고 욕망하는 인간의 본성조차 가치를 상실해야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혁명이 아무리 자본에 의해 상품화되고 이미지화된다고 해도 인간에겐 여전히 자유로운 신세계를 향한 본능적 DNA가 존재한다. 인디는 이러한 DNA를 계승하고 있다. 독립의 꿈을 꾸는 것이 죄가 될 것인가?
10년이 지난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주류시스템으로부터의 완벽한 해방구나 피난처는 여전히 요원한 꿈으로 남아있다. 10년이 지난 지금 과거의 이러한 생각들이 과연 시대착오적이고 착각이었을까? 착각이었다면 우리는 무엇을 착각하였을까?
먼저 ‘주류시장과 제도로부터의 독립’이라는 말이 인디에게 너무 과도한 짐을 안겨주고 있다는 것을 짚어야 한다. 우리는 이 말의 앞에 ‘상대적’이라는 말을 끼워 넣어 ‘인디’에게 숨 쉴 곳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인디는 다만 또 다른 세계를 욕망하고 시장을 교란하며, 관습적인 제도를 야유하며 끊임없이 틈새를 비집는 일탈을 노래할 뿐이다. 태생이 그렇다. 인디의 피는 뜨거운 듯 하면서도 차갑다. 이것이 과거의 저항운동처럼 사회의 전복을 실행하는 것은 아니다. 인디는 이러한 욕망들의 개별적이며 자율적인 상대적 움직임이다. 만약 이러한 상대적 논리와 자율성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인디는 생존할 근거도 사라지고 살아갈 방법도 찾기 어려워진다. 완벽한 인디적 공간은 존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과거 ‘정신과 태도의 문제는 곧 저항‘으로 연결시키며 인디를 구분 짓는 방법은 이러한 의식의 과잉을 불러왔다. 이로 인해 인디를 손에 닿지 않는 환각의 세계로 자리매김하고 그에 걸 맞는 추락의 세계로 끄집어 내렸다. 그리고 인디적 산업시스템을 갖추기 위한 여러 움직임들은 그에 걸 맞는 역할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둘째, 인디의 역할을 문화예술의 내적 미학으로 승화하려면서도 사회경제적으로 연동시키는데 터부시했다. 정신과 시스템에 대한 태도의 문제는 상호교차하면서 유기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정신의 문제는 과잉되었고 대안적 시스템의 문제는 홀대받았다. 문화예술과 삶의 누림에 대한 담론은 풍성하였지만, 그 근저에 깔린 문화산업에 대한 시스템과 삶의 방식에 대한 태도 문제는 달가워하지 않았다. 또 문화예술정책의 장르적 경계들은 인디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다.
이러한 ‘주류 시스템에 대한 삶의 방식‘이라는 고민의 부족은 생존의 문제를 경시하게 만들었다. 체질적 자생력 강화의 문제는 비즈니스 마인드 부족으로 치부되었고, 개인과 공간의 소소한 문제로 떠넘겨졌다. 어느덧 문화과잉의 시대를 살게 되었지만 문화의 발전과 다양성을 이야기하면서 그 밑에 자리한 산업적 시스템의 사회정치적, 경제적 맥락을 연결시키지 않았다. 아니,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충분하지 못했고 진지한 중심에 서지 못했다. 인디적 산업의 시스템은 좀 더 다양한 실험과 도전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강산도 변하게 하는 10년의 세월이 그냥 흘러가지는 않았다. 인디는 스스로 생겨나서 10년을 견디었고, 주변의 ‘한 때겠지’하는 비아냥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꿋꿋하게 자리를 지켜왔다. 그 간에 무너진 곳도 있고 변질도 곳들도 있겠지만 그 자신의 든든한 양분으로 소화시켜냈다. IMF를 지나면서, 2002월드컵을 지나면서, 인디의 모든 자양분이 다 소진되고 주류메커니즘의 상업성과 동질화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많았지만, 인디는 여전히 인디로서 그 자리를 지키고 다양한 변종으로 수준을 높이고 범위를 넓히고 있었다. 이후 나타나는 인디의 ‘흥망성쇠’는 처음부터 인디의 문제가 아니었으며 인디는 과도한 욕심을 부리지도 않았다.
<2004년 시작된 광주 인디뮤직페스티벌 포스터>
누구도 인디에게 숟가락을 들게 하지 않았고, 또 밥을 떠먹여 주지 않았다. 구차한 삶일지언정 빌어먹지 않았으니 인디는 그 스스로 지난 10년 동안 훌륭했다.
주류사회의 변두리에 인디적 공간을 상상하고, 자질구레한 일상의 정치와 싸우면서 삶의 변주를 노래해왔으며 그 나름의 심미적 실천을 진행해 나왔다. 인디는 이러한 사소한 일상공간에서의 소통의 방식이며 삶의 표현의 형식이다. 또한 그 실천 자체이다. 지배적 시장과 제도화된 주류문화가 등장하는 곳이면 어느 곳이든 그 경계의 틈바구니에서 또아리를 틀고 혀를 내미는 삶의 방식이다. 채이면 채이는 대로, 까지면 까지는 대로, 지속적이고 자생적인 또아리를 트는 도전과정이 ‘버림받은 후레자식들의 생존의 방식’인 것이다.
“DO IT YOURSELF!” 는 아직도 유효한 인디의 명제이다.
보충설명
2007년 7월 19일 1차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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