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연극인 젠더감수성 워크숍] 1. 성녀와 창녀 사이에서

 

 

[전국 연극인 젠더감수성 워크숍] 1. 성녀와 창녀 사이에서

 

2020 연극의 해 사업 중 하나인 <전국 연극인 젠더감수성 워크숍 : 연극x젠더감수성, 대체 뭔데?>는 연극 안의 젠더감수성이 무엇인지 함께 알아보고 토론하고, 직접 글을 쓰는 과정입니다. 전국의 7개 지역에서 진행되는 워크숍은 강의와 토론의 의미를 넘어 각 지역에서 비슷한 고민과 불편함을 가진 동료들의 존재를 확인하고 새롭게 연대하는 소중한 시간이기도 합니다.

 요즘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단어 ‘젠더감수성’이란 무엇일까요? 그리고 ‘젠더감수성’이 있는 작품은 어떤 작품일까요? 

 이번 연재는 워크숍에 참여해주신 안산, 광주, 대구, 부산, 춘천, 대전, 전주지역의 연극인들이 보내주신 원고로 이루어집니다.

 
주최/주관 2020연극의해집행위원회

주관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

후원 문화체육관광부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은 개인 및 단체들과 연대하여 성폭력에 맞서고 안전한 창작환경을 위해 노력하는 수평적인 연극인들의 운동입니다.

출처_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 페이스북 페이지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 

-성녀와 창녀 사이에서- 

글 _ 허혜수(워크숍 참여자)

 

<지킬 앤 하이드>는 내가 처음 본 대형뮤지컬이다. 극에 나오는 넘버 모두 좋아해서 몇 년째 핸드폰에 담아 듣기도 하고 공연이 올라올 때마다 소위 회전문(같은 극을 여러 번 보는 것을 일컫는 말)을 도는 작품이기도 하다. 애정하던 공연이라 좋은 이야기만 하고 싶은데 연극을 하며 젠더 감수성이라는 말을, 성적 대상화라는 말을, 여성 캐릭터를 소비한다는 말을 접하고 공부해야겠다는 필요성을 느낀 이후 어느 순간 이 공연이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1. 성녀와 창녀를 모두 가진 능력자

 

지킬의 약혼 상대자이자 순종적이며 지킬을 무한히 신뢰하는 엠마와 약혼식 파티 후 가게 된 술집에서(약혼식 후 창녀들의 술집을 간다는 설정도 납득하긴 어렵다. 남성이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방법은 정녕 이 방법뿐인가?) 만난 창녀 루시의 사랑, 두 여자의 사랑을 듬뿍 받는 주인공 지킬이 등장한다. 약혼녀가 있는 상황에서 지킬이 루시와 키스하는 장면도 나오는데 지킬을 연기하는 배우마다 표현하는 결이 약간씩 다르긴 하지만 지킬의 외도(?)는 극중에서 큰 문제로 보이지 않게 그려진다. 

 

모두 지킬의 위험한 실험을 걱정하고 만류하지만 엠마는 그를 전적으로 지지하고 어떠한 불평, 저지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엠마가 극 중 부르는 넘버도 그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나는 그를 믿는다는 내용의 노래만 부를 뿐이다. 엠마와 루시가 함께 하는 듀엣곡도 지킬에 대한 두 여자의 애절하고 순애보적인 사랑 내용이다. 지킬은 여리기만 한 성녀 엠마와 거친 삶을 살았지만 지킬에 대한 사랑은 진심인 창녀 루시, 두 여자를 모두 가진 능력자이다. 

 

2. 루시의 죽음

 

지킬의 실험으로 등장한 지킬의 또 다른 자아인 하이드가 루시를 죽이는 사건이 벌어진다. 지킬이 도망치라는 편지를 전달하지만 결국 또 다른 지킬인 하이드에 의해 죽게 되는데 이를 알게 된 지킬은 괴로워하며 ‘대결’이라는 넘버를 부른다. ‘대결’은 남자배우가 지킬과 하이드 두 역을 동시에 진행하며 부르는데 두 개의 자아가 처음으로 한 자리에서 날선 비난을 주고받으며 노래하는 극 후반의 중요한 장면이다. 개인적으로는 2부에서 이 곡을 기대하는 관객이 나 외에도 정말 많지 않을까 예상한다. 하지만 글을 쓰는 지금, 지킬이 때론 두려워하던 하이드에게 정면 대응하는 이 장면이 루시라는 여성 캐릭터의 죽음으로 각성되는 남자 주인공을 보여주는 ‘냉장고 속의 여자’를 무대에서 재구성한 건 아닌지 의심이 든다.

그녀의 죽음은 이후 별다른 영향 없이 무난하게 엠마와 지킬의 결혼식 장면으로 넘어간다. 

 

3. 엠마의 완벽한 기다림

 

지킬이 약혼식에 늦어도, 실험을 하느라 얼굴을 보지 못해도, 끝내 결혼식에서 숨을 거둬도 엠마는 “편히 쉬세요.” 라는 말과 아름다운 곡조로 그의 마지막을 배웅한다. 

완벽하고 깔끔하게. 태생적으로 나쁜 말 하는 법은 배운 적 없어 보이는 그녀는 단 한 번의 태도 변화 없이 끝내 아름다운 여인으로 남을 뿐이다. 무조건적인 기다림. 순종. 끝없는 사랑. 곱고 여리고 예쁘고 하얀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지킬의 약혼자, 결혼식에서 남편을 잃은 슬픈 여인일 뿐이다.   

 

알면 알수록 불편해진다. 내가 예민한 사람이 된 것만 같다. 부당하고 이상한 현상들이 얼마나 많은지 참 놀랍다.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걸까? 

젠더 감수성을 다루며 혼란에 빠진 내게 존경하는 선배가 해 준 이야기가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몰랐던, 애써 지나갔던 이 모든 것들을 배우는 것은 새로운 시야를 장착하는 것으로 이젠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고 말이다. 

달라지기 위해, 성장하기 위해 겪어야 하는 성장통이 괴로울 땐 함께 고민하고 공유할 수 있는 동료가 있음에 감사하자. 그리고 더 넓고 깊어진 시야로 내가 사랑하는 예술이 지금보다 나은 환경, 작품, 의미로 발전되는 모습을 지켜보고 만들어가고 싶다. 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