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밥 4월 레터] 걸작을 만들지 않겠다는 다짐

2022. 4. 11. 00:44Letter

[인디언밥 4월 레터]걸작을 만들지 않겠다는 다짐

 

행사 전날 리플렛을 디자인해 당일에 뽑는 곳을 본 적 있으십니까? 행사 중에 원고를 추가로 요청 받는다던지 뭐 그런 일도요. 저는 있습니다. 오늘은 걸작을 만들지 않겠다는 다짐에 대해 얘기해보고 싶습니다.

 

작품을 하다보면 언제나 대단한 결과물로 보여주겠다는 욕심으로 시작합니다. 아무 변수없이 짜여진 계획 속에서 그 욕심은 때로 해롭습니다. 삶이 RPG게임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열심히 하면 그에 비례하는 보상, 레벨업, 멋진 나의 캐릭터, 그 안에서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 성장하는 관계 뭐 그런 차원에서 말이죠. 하지만 어째선지 늘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감각을 받습니다. 예상치 못한 크고 작은 문제들이 작업을 위협하면, MP와는 달리 쉽게 휘청이는 마음과 HP포션을 먹어도 차지 않는 체력을 겨우 달래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어느 시점이 되면 생각합니다. 우린 이제 걸작을 만들려고 하면 망하는구나. 선방을 위해 달려가야지. 

 

선방하는 삶은 얼마나 구차하고 아름답습니까. 
(이렇게 한 줄 띄우고 쓰면 대충 아름답다는 비약으로 퉁쳐지는 것도 같습니다.)

 

 

저는 요며칠 아팠습니다. 지난 해부터 준비해오던 프로젝트를 3월에 마치자마자 바로 5월 축제를 위한 실무와, 여름에 진행될 공연의 밑작업을 시작했더니 몸이 버티질 못한 모양입니다. 장염인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지만 화장실만 잘 돼있다면 나갈만 한 것도 같아서, 또 더 이상 일정을 미루면 안 될 것 같아서 무리하게 스케쥴을 이어갔습니다. 굳이 내가 가지 않았어도 괜찮았을 자리를 헤매고, 어색한 식사 자리에서 누룽지를 깨작거리며 생각했습니다. 염증은 장에 있다는데 왜 온 몸에 근육통이 오고 머리가 아픈걸까. 어쩌면 나는 그저 게으르게 눕고 싶은 것 아닐까. 아픈 것보다 아프다며 누워있느라 해내지 못한 일들이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의사선생님은 원래 그런 거라고, 2-3일 쯤 쉬라고 얘기했습니다. 
(이렇게 한 줄 띄우고 쓰면 아무 것도 아닌 말도 큰 깨달음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레터를 함께 읽으시는 예술가, 혹은 각자의 작업을 이어가는 노동자, 아니 모든 분들의 삶은 어떻게들 굴러가고 있는 걸까요? 게임처럼 열심히 하는 만큼 보상이 따라오는 세계에 계실까요? 혹은 불쑥 부딪히는 나쁜 이들과, 누구의 잘못도 아닌 문제와, 사실은 내 문제였던 것들을 마주하고 계실까요. 아프지 않고, 지치지 않고, 언제까지 성장하면서 팽창하는 세계는 어딘가 있을까요? 영원하게 샘솟는 자원, 끊임없이 우상향하는 그래프, 계속 내 쓰레기를 받아주는 옆 동네, 있는 그대로의 날 사랑해주는 연인 같은 것들이 떠오르네요. 그게 무엇이 되든 실패할 것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우리는 실패할 것입니다.

 

 

저는 의외로 한때 과학과목을 좋아하는 고등학생이었습니다. 그 즈음의 물리 시간엔 공기저항과 마찰력은 무시하고 답을 구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다들 그렇게 시험성적에 그렇게 목을 메는 모양입니다. 공기처럼 보이지 않게 누군가를 막아서는 저항, 누구의 트랙에만 깔린 거친 노면과 약한 이들을 넘어뜨리는 기울어진 세계를 없애고 싶어, 없는냥 행동하는 것이겠죠. 지난 달엔 대선을 바라보며 ‘마피아 게임’이라는 노래를 썼습니다. “약속의 땅엔 연약한 이들은 없다던데, 네가 슬픈 걸 보니 너는 범인이구나. 불행한 네가 있을 곳이 여긴 아냐”같은 가사를 적었습니다. 역시나 걸작이 되지 못할 곡이겠지요. 우리는 삶이 숨겨놓은 부비트랩에 걸려 넘어질 것이고, 대단했던 계획은 결국 실패할 것입니다. 어느 순간 선방을 향해 달려나가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차라리 다짐해봅니다. 

 

우리 걸작 대신 선방합시다.

 

독립예술웹진 인디언밥 편집위원

김민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