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밥 11월 레터] 용서를 가불해주세요

2021. 11. 23. 13:21Letter

 

 

 

[인디언밥11월 레터] 용서를 가불해주세요

 

 

언젠가 신이 나타나서, 미래의 것을 미리 당겨쓸 기회를 하나 준다면 아주 비굴하게 말할 겁니다. “저…그…사장님…제가 요즘 형편이 안 좋아서 그런데 용서를 좀 가불 받을 수 있을까요?” 역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요. 비극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언젠가 인디언밥 레터가 참 특이하다는 얘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건 아주 가늘고 느슨하게 지속되는 매체의 특수성 같은 거겠죠. 보통 그 달에 발행될 글을 갈무리하며 소개하는 글을 쓰거나, 어떤 주제나 방향성을 제시하는 레터를 쓰고 그에 맞는 기사를 발행할 텐데, 인디언밥 레터는 그렇지 않잖아요. 그래서 저는 그래서 레터를 독자와의 관계 맺기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인디언밥 운영진이 이렇게 지낸다고 인사를 건네고 독자분들께 안부를 묻는 자리라고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최근 만났던 반짝이는 작품들 대신 개인적인 얘기를 더 해보겠습니다.

 

 

11월은 어려운 달입니다. 일조량 감소에 의한 우울증 및 무기력증 때문이라고 너스레를 떨면, 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웃었고, 적당히 아는 사람들은 걱정했고, 또 잘 아는 사람들은 웃어주었습니다. 올해는 12월 초에 진행될 큰 프로젝트 2개를 동시에 준비하고 있으니 벌써부터 디지겠습니다. 힘든 이유는 체력일지 모르지만 괴로운 이유는 제 무능과 무력함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원하던 저의 모습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말이죠. 친구가 ‘가을은 용서받기 좋은 계절’ 이라던데 도대체 맥락도 이유도 알 수 없는 말이었지만 은근히 위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외치고 싶어졌어요. 

“아아-저로 인해 고통받는 많은 동료분들 부디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후대의 평가 따위 저 먼 들판에 던져버리고, 수치심과 자괴감도 알아서 확대 재생산해가며 영원히 반복하겠습니다. 제발 저에게 자비를!”

 

 

사진1. 김선율 MV<자장자장> 가운데

 

12월 초에 발표될 큰 작업 중 하나로 음반을 만들고 있어요. 베드타운 키드로서 자장가를 테마로 한 앨범을 지었는데 어쩐지 뮤직 비디오를 열심히 만들었습니다. 그 중 한 곡에선 주인공이 내내 편지를 쓰는 영상을 찍었어요. 그 편지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당신의 생일이 4월 1일이라는 얘기를 좋아했습니다. 당신은 울고 모두들 웃었겠죠. 그야말로 거짓말처럼 태어났다는 말이 어울리는 날이었을 겁니다. 받아 마땅한 사랑을 불안없이 받던 날이 아니었을까 상상해봅니다. 손등이 붉어진 날에도, 안 그래도 큰 눈이 눈물에 부어 금방 튀어나올 것 같던 날에도, 당신은 그만한 사랑을 받았어야 했을텐데요. ‘말하지 못한 것’들이 모두 ‘전하지 못한 것’은 아니라고 넘겨짚어 봅니다.

 

제게도 받아 마땅한 사랑이라는 게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가시를 만져보니 장미임이 틀림없다는 비약처럼요. 고통스럽고 부끄러운 삶이 눈 앞에서 지나가고 있습니다. 잠들지 못하는 밤도 언젠가 끝날 줄 압니다. 그때까지 열심히 사랑하고 싶습니다.

 

좋은 밤 되세요. 편지 줄입니다.

 

사진2. 민수민정 <어서오세요 아름다운 나그네여> 공연 사진

 

이번 주엔 전라북도 완주군에 공연을 하러 다녀왔습니다. 월식을 보며 연주하는 건 아름다운 경험이었습니다. 저를 초대해준 기획자분들과 함께 어두운 길을 이동하며, 동네에 가로등이 많이 없는 이유를 들었어요. 해지면 자야 된다고, 나무들도 쉬어야한다는 이유에서 어르신들께서 반대하셨다더라고요. 충격적이었습니다. 쉬어야한다뇨. 아버지는 저에게 “너는 잠 때문에 망할 것”이라고 하셨는데, 실제로 게으름과 무능으로 삶과 일을 망쳐가고 있는데 쉬어야한다뇨. 

 

 

우리가 잠을 자는 이유가 과학적으로 명확히 밝혀지진 않았지만, 뇌과학 쪽에선 기억의 차원에선 잠의 기능에 대해 얘기한다 합니다. 어떤 기억은 강화시키고, 쓸모없는 시냅스를 지워서 머리를 청소해주기도 한다고요. 어쩌면 용서라는 것도 그런 걸지 모릅니다. 자잘한 자극을 지워 정말 필요한 것들을 오래 기억하는 일이겠죠. 

 

 

밤이 길어지는 계절입니다. 잘들 주무시고 계신가요?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부탁드립니다. 저에게 용서를 가불해주세요!

 

 

독립예술웹진 인디언밥 편집위원

김민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