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밥 9월 레터] 가장 적극적인 형태의 연서

 

 

가장 적극적인 형태의 연서



안녕하세요! 어쩐지 격월로 찾아오고마는 인디언밥 레터입니다. 죽지도 않고 또 왔다기엔 저는 조금 죽어가고 있는 것도 같습니다. 아직 다 죽진 않았다니 기쁜 일일까요? 

 

지난 달엔 이랑 작가의 3집 <늑대가 나타났다>를 오래 들었습니다. ‘내 친구들은 모두 가난합니다. 이 가난에 대해 생각해보세요.’라고 말하는 노래는 강렬했습니다. 문 밖의 사람들을 외칠 땐 무키무키만만수의 <방화범>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포도주를 만들고 그 찌꺼기를 먹을 뿐'이라며 소리치면 <도시산책론 : 도시투어 1. 서울의 미로>에서 만난 ‘내가 가난하지 않았다면 너도 부자되지 않았을텐데'같은 문구도 생각났어요. 그녀는 ‘우리는 여전히 여기에 있’다는 얘기를 남기고 우화를 빌려 이 노래들을 ‘잘 듣고 있’냐고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고는 ‘동시에 다 죽어버리자’고 외쳐요. 그러면 ‘일도 안 해도 되고, 돈도 없어도 되고, 울지 않아도 되고, 헤어지지 않아도 되고…’ 합창은 고함이 되고 절규가 되며 막을 내립니다.

 

사진: 이랑 <늑대가 나타났다>

 

언젠가 친구와 인류의 끝에 대해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강경파라서 다같이 카운트 다운을 하고 환한 빛속으로 빨려들어가면 좋겠다고 말했고, 친구는 온건파라서 어느날 이후로 모두가 출산을 안 해서 끝을 맞이하길 바랐습니다. 버텨내는 삶에 진절머리를 내면서도 그냥저냥 살아가던 즈음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인류의 종말은 무슨-그냥 그 친구와의 관계만 종말을 맞았어요. 그날을 떠올리면 문득 그 친구는 이랑을 닮았고 저는 그러지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건 저에게 ‘내 귀한 사람들아'라며 호명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어요. 그들은 연서를 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폭력적인 세상, 쉽게 지워지는 존재로서 할 수 있는 사랑이란 그런 것일지 모릅니다. 우리 삶을 고통으로 칠하는 것들을 노려보고 돌을 들어보는 것 말입니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네가 나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자 슬픔인지는 거대한 삶의 무게 앞에 때로 무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럴땐 너를 괴롭게 하는 것에 함께 몸을 부딪히고 아파하다가 차라리 멸망을 꿈꾸게 되는 거겠죠. 

 

사진: 책 <갱상도 사투리 학습서> 중

 

아아 삶이 계속된다는 게 얼마나 고통스럽고 부끄럽습니까. 몇 달을 쏟아부은 공연이 엎어져도 삶이 계속되고, 더 긴 시간을 애쓴 축제가 엎어져도 해야할 일은 남는데, 축제가 엎어지는 대신 공연을 취소시키면서 다행이라 가슴을 쓸어내리는 건 얼마나 우습습니까. 오늘 트위터는 주디스 버틀러의 강연으로 뜨겁고, tv에선 명절을 맞아 성폭행 가해자로 지목받은 배우가 주연한 영화가 나오고, 저희 집은 그냥 롯데자이언츠의 경기력이 최대 화젯거리입니다. 언제나처럼 평화롭고, 그 평화가 수치스러운 밤입니다.

 

볕을 충분히 쬐고 세상을 저주하지 말자고 다짐하지만 벌써 새벽 4시입니다. 취소된 공연은 상영회로 바뀌어 다시 준비할 게 생겼고, 연기되어 열릴 축제를 위해 할 일이 더 남았습니다. 제 노래와 축제를 위해 뭐라도 하고 자야겠지요. 희망차게 레터를 마치기엔 어려울 모양입니다. 다만 이 모든 게 글러먹었다고 함께 화를 내봅니다. 오늘은 내 귀한 사람들을 함께 떠올려보겠습니다. 



독립예술웹진 인디언밥 편집위원

김민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