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성남, 앰비언트, 플라뇌르: RAINBOW99 <곳곳>

2025. 1. 12. 17:49Review


성남, 앰비언트, 플라뇌르

RAINBOW99 <곳곳> 리뷰

 

글_김로자

 

우리는 도시인이다. 그러나 도시를 목격하고 조망할 수는 없다. 그것은 우리가 도시로부터의 객관성을 담지한, 완전한 외부자가 아니라 도시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도시가 도시인으로서 우리의 생활양식을 생산하고, 우리의 행위가 도시를 다시 생산한다. 따라서 우리의 도시적 체험은 내화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를 ‘읽으려’ 시도한 이들이 있었다. 게오르크 지멜(Georg Simmel)과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같은 이들은 ‘플라뇌르’(fláneur – ‘만보객’, ‘거리산보자’ 혹은 ‘도시산책자’)의 이념형에 가까운 이데올로그들이다. 게오르크 지멜의 경우 근대성의 해명에 관심을 둔 사회학자의 입장에서 근대성의 현현인 도시에 접근한다. 시장적 교환관계의 표현으로서, 대도시에서의 삶은 상품들이 진열된 매대들을 끊임없이 마주하는 삶에 다름 아니게 되었다.

 

이러한 도시를 조망하는 주체임과 동시에 도시를 조망하기 위한 단위로서 플라뇌르의 개념은 벤야민의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비평에서 정치화된다. 「보들레르의 작품에 나타난 제2제정기의 파리」(Das Paris des Second Empire bei Baudelaire, 1938) 속 벤야민에 따르면, 보들레르는 근대 파리의 도시적 삶이 선사하는 충격을 플라뇌르의 시선을 통해 조망하는 시인이다. 만보객은 도시 속에서 도시적 생활양식을 수행하기보다는, 이와 분리된 채 할 일 없이 도시를 그저 떠돌아다닌다. 도시와 관계 맺지 않은 채 도시의 외부자로서 도시를 구경하고 관찰하기만 하는 일은, 우리가 도시를 새로운 관점에서 인식할 수 있도록, 우리가 기존에 인식하고 수용하는 의미를 뒤집을 수 있도록 한다.

이러한 플라뇌르의 수행성은, 이미지화된 수많은 도시의 파편들과 스쳐 지나가기, 도시에서 목격한 장면들을 일종의 지도로 구성하는 ‘지리학’적 작업을 시도하기에 방점이 있다. 물론 이 ‘지리학’이란 장소와 장소 사이의 물리적인 거리 따위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다. 장소가 생산하는 체험과 체험들을 연결 지어, 이를 거쳐가는 사람들이 완성해내는 의식의 모양이 어떤 것인지, 이정표를 제공하는 것이다. 상황주의자들은 이러한 방법론을 일컬어 ‘심리지리학’(psychogeography)이라 명명하기도 한다.

 

Rainbow99 <곳곳> 앨범 커버

 

여기, 또다시 도시를 읽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예술가들이다. 공간과 공간을 이미지화하여 매개하고, 이로부터 창출되는 의식 역시 이미지화하는 것은, 공간을 마주한 예술의 기능이기도 할 테다. 이러한 만보객적 시도로서 귀에 들어오는 장르음악 앨범들도 있는데, 가령 작년에는 앨범『곳곳』(2024, MUI/POCLANOS)을 통한 RAINBOW99의 시도가 있었다.

옥상달빛의 기타리스트가 아닌 일렉트로니카 뮤지션으로서의 RAINBOW99은 다양한 공간들의 이름을 매개로 이것들의 인상들을 스케치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왔다.『곳곳』은 ‘프로젝트 곳곳’의 무용작품들과 결합된, 성남이라는 도시에 관한 인상의 파편들로 구성된 앨범이다. 정확히 말하면 성남 사람들이나 분당 사람들이 서로를 (계급적으로) 구별 지으며 말하는, ‘구성남’이라는 동네에 관한 앨범이다.

 

어린 시절, 15년 넘게 ‘구성남 사람’으로 살아왔다. 내가 기억하는 2000년대 말-2010년대 초의 구성남은, 서울과 분당이라는 도시개발계획 사이에 끼어 버린, 빈민과 노동자, 그리고 뜨내기들의 섬이었다. 이 땅에 ‘도시민’으로서 처음 정착한 이들은, 박정희가 청계천을 비롯한 서울 일대의 무허가 판자촌을 개발하며 쫓겨난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처음으로 마주한 성남은 아무것도 없는 산기슭이었다. 사실상의 강제 이주에 ‘광주대단지 투쟁’이라는 대정부 저항 운동을 벌이기도 했던 이들은 결국 가파른 언덕 위에 집을 지어 살기 시작했다. 인터넷에서 ‘성남 인셉션 언덕’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사진 속 가파른 달동네는 그 결과였다. 이 골목은 내 중학교 등굣길이기도 했다. 아마도, 태평4동에서 태평중학교와 지금의 가천대학교가 있는 방향으로 넘어가던 골목길이었던 것 같다.

 

태평동 일대 사진 / 영화 인셉션 포스터 ❘ 제공: 필자

 

언덕을 밀지 않고 언덕 위에 집을 지은 도시. 이 도시는 서울로 가야 했지만 서울에 살 수는 없었던 이방인들의 도시가 됐다. 빈곤은 구성남의 보편적 정서였다. 나는 15년을 반지하에 살았지만 한 번도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전-월세를 전전하던 동네의 모든 친구들이 한 번쯤은 당연히 반지하 생활을 겪어 보기 때문이었다. 구택들이 모여 있는 골목들에는 비슷한 사람들의 공동체라는 것이 존재했다. 아이들은 옆집 친구들과 놀다가 야쿠르트 배달원들이 카트를 끌고 오면 음료를 하나씩 사 먹고, 소독차가 돌아다니면 연기를 쫓아다녔다.

 

분당은 성남시 분당구지만 분당 사람들은 스스로를 성남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분당 사람이라고 칭한다. 그들에게 어쩌면 ‘성남’이라는 기호는 계급적 경멸의 의미다. 그곳에는 언덕배기 골목길 대신 산을 밀어버리고 만든 반듯한 아파트 단지들이 있다. 엄마는 성남에서 분당으로 출근해, 아파트들을 돌아다니며 논술 과외를 했다. 그곳 아파트 단지들에 주차된 좋은 차들은 주민들의 자동차, 낡은 중고 경차들은 그렇게 ‘노동을 제공하러 온’ 성남 사람들의 자동차다. 우리 집은 그나마도 없어, 엄마는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를 발로 걸어 다녔다.

모든 경험의 조각들을 이어보면, 성남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것은 가난하고 쫓겨난 사람들이 어떤 게토 속에서 언덕배기 골목을 매개로 구축한 느슨한 공동체다. 성남을 경험해보지 않은 이들에게도, 빈곤의 공시성(synchronicity)을 제공하는 공간이다. 언덕은 ‘반듯한 평지’가 가리키는 중산층 동네와 성남을 본질적으로 구별 짓는 상징이다. 그리고 『곳곳』은 이 언덕에 대해 비언어로 이야기하는 프로젝트다.

 

 

 

 

『곳곳』은 가사를 통해 서사를 구축하고 이를 통해 컨셉트를 구축하기는 커녕 인상들을 그저 흩뿌리고 내던지며 그것으로 컨셉트를 희미하게 가리킬 뿐인 컨셉트 앨범이다. RAINBOW99은 앰비언트 일렉트로닉 인스트루멘틀 트랙들에 그저 ‘신흥1동’, ‘태평4동’, ‘언덕’, ‘골목’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만 하는 것으로 공간을 호명한다. 드럼 앤 베이스를 위시한 전자음악의 역동이 대체로 억눌러진, 침잠하는 53분 속에서 이 고유명사들은 힘 없이 흩날린다. 앰비언트는 소리의 잔향이 갖는 부피를 끝없이 확장해, 부유하는 공간감을 구축하는 데 역량을 오롯이 쏟는 실험음악이다. 청각적 공간성을 감각경험으로 드러내는 음악을 심리적-이데올로기적 공간성과 접합하는 것은 어떠한 지점에서 재미있는 정합성을 획득하기도 한다.

 

오프닝 트랙 「신흥1동」은 신파적인 마이너 코드들을 활용한 어쿠스틱 기타 리프로 문을 여는데, 믹싱을 거쳐 드러난 기타의 사운드 디자인은 꽤나 메마르고 건조하다. 다양한 신스 텍스처들이 앨범의 러닝타임을 거듭할수록 쌓여 가지만 시종일관 서늘하다. 심지어 특유의 ‘서늘함’이라는 감각은 피아노의 리버브만을 극대화해 풍부한 사운드스케이프를 그려내는 「연결」 같은 트랙에 이르러서도 징후적으로 우리의 귓속을 맴돈다.

본격적으로 리듬악기의 힘을 얻기 시작하는 트랙은 골목 공동체에서 뛰노는 ‘성남 애들’의 생기를 지시하는 「뗏골 아이들」이다. 뒤이어 등장하는 「언덕」은 그 이름으로서는 성남의 가장 중요한 성격을 호명하지만 앨범의 흐름 속에서 가장 이례적인 성격을 가진 트랙인데, 디스토션을 거쳐 뒤틀린, 인더스트리얼이나 덥스텝을 연상시키는 신스 텍스처가 본격적인 공격성을 획득하고 있다. 그러나 문을 닫는 「태평4동」으로 돌아오면, 앨범의 사운드적 지향은 출발했던 지점으로 되돌아온다.

 

 

 

『곳곳』은 신흥1동에서 출발해 골목들을 가로지르고 언덕을 넘어 태평4동까지 산책을 하는 만보객의 시선을 따라가고 또 만연하게 풀어내는 것 같다. 『곳곳』 속 플라뇌르가 마주한 성남은 계급적 우울삽화가 블루스처럼 코끝을 찌르지만, 때때로 소소한 소시민들의 역동이 불쑥 튀어나오고, 생활인들의 존재가 시선 속으로 튀어나오다 다시금 베일 뒤로 사라지는 공간이다.

성남이라는 공간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고유성을 획득하지만 이러한 공간성은 유사한 경험들을 매개로 『곳곳』을 접하는 이들에게 데자 뷰를 선사하며 보편성을 획득할지 모른다. 지금까지 도시들의 이름을 붙여 발매된 Rainbow99의 여러 앨범들은, 특정한 지명을 호명하며 이것이 간직한 고유의 공간성을 음악-이미지로 발현해내지만 동시에 이것을 모두 경험해 봤음 직한 공통의 심리 코드로 전화시킨다. 내가 단지 기쁜 것은, RAINBOW99이 공간을 바라보고 확장하는 시선 속에 내 슬픈 고향이 들어오게 된 것이다.  『곳곳』을 통해 엿본 성남 속에서, 당신에게 보인 장면들, 성남을 통해 만들어진 사람들의 모습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필자 소개

김로자

장르음악비평가, 대중음악웹진 온음 필진. 문화과학을 공부하며 듣고 쓰고 만드는 대중문화 생산・소비자로 살고 있습니다. 경합하는 것에서 아름다움을 찾습니다.

 

 

작품 소개

 
RAINBOW99 <곳곳>

Rainbow99 <곳곳> 앨범 커버


아티스트 : RAINBOW99
유형 : 정규
발매일 : 2024.07.08
유통사 : 마운드미디어
기획사 : MUI
프로듀싱 : RAINBOW99
모든 트랙 작편곡, 레코딩 믹싱, 마스터링 : RAINBOW99
아트워크 : G99(김가현)

 


본 리뷰는 2024년 거리예술·서커스 창작지원사업 선정작-2024년 서울문화재단 거리예술·서커스창작지원사업 선정 프로젝트 <일상공간예술비평:잇몸 잘 쓰기>-의 일환으로, 서울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