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페 더 로스트> 몽타쥬 감각으로 자기 심문의 시간을 강요하다

2009. 4. 10. 07:5907-08' 인디언밥

】<까페 더 로스트> 몽타쥬 감각으로 자기 심문의 시간을 강요하다
  • 김남수
  • 조회수 690 / 2007.10.23

■ 공연그룹 은빛창고 <까페 더 로스트> 리뷰


몽타주 감각으로 자기 심문의 시간을 강요하다


대범한 창작 정신에는 슬픔과 절망을 이야기해도 숨길 수 없는 활기가 돋아나는 법이다. 디테일의 무수한 가지들이 괴물의 촉수처럼 뻗어 나아가도 막다른 골목이 있는 미로가 되지는 않는다. 왜냐? 대범하다는 것은 띄엄띄엄 가는 것 같아도 중요한 맥락을 놓치지 않는다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느슨하게 툭툭 건너뛰어도 그것은 행간과 틈새가 어느새 말을 한다고 할까.

 

<카페 더 로스트>(10월 3일 포스트극장)는 감정이입하기 좋은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그보다는 대범한 몽타주 감각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사실 빛바랜 기억을 저 심연에서 길어올리고, 손대면 손댈수록 망가져가는 현실에서 ‘루저’의 슬픔을 노래한다고 해도 그것은 하룻밤만 지나도 달라지는 감정의 세계에 불과하다. 그러나 홍은지가 연출한 몽타주 감각은 그런 유한한 감정의 세계를 존재의 안부를 묻는 현시의 세계로 돌려놓고 있다. 감정 자체로의 몰입이 아니라 감정을 사용하는 방법에 눈뜨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새로운 강도와 밀도로 장면들을 배치하면서도 어떤 논리의 강박이나 근대적 프레임에 구속되지 않는다. 이 얼마나 산뜻한가. 불행도 어떤 그릇에 담는가에 따라 이미지가 아니라 실재가 된다. 이것이 <카페 더 로스트>에서 내가 발견한 미덕이다.

 

물론 이 작품의 부분마다 너무나 남루하고 뒤틀려 있어서 역설적으로 보석처럼 빛나는 순간들이 있다. 일순 정지! 라고 외칠 만큼 찰나지간의 진실을 포착하는 연출 능력이 상당하다. 첫 장면만 해도 그렇다. 할머니를 모티브로 삼아 기억을 펼치는 과정을 보라. “아리송해, 아리송해. 어젯밤 너의 말이 아리송해” 라는 노래가 흐르는 것도 수습불가인데, 그 여운이 다하기도 전에 “강물은 흘러갑니다, 아하! 제3한강교 밑을”이 포개진다. 아연실색이다. 이렇게 촌스럽고 추레해도 좋은가. 이런 구닥다리 감각은 키치라고 변명해도 다음을 풀기가 힘들 텐데, 어셈微?저러지? 게다가 제3한강교는 한남대교로 바뀐 지가 어언 수십년 아닌가.

 

유쾌한 관객들이 이런 근심을 사서 하고 있을 때, 저편에서 누군가가 등장한다. 가만히 보니, 그것은 할머니의 구부러진 몸이다. 이지현, 임소영, 이은아 같은 배우들은 할머니의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대뜸 할머니의 몸을 출현시킨다. 기억의 저편에서 물질적으로 호출한 할머니의 등장이다. 그것은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 실재의 표현이기에 할머니는 침묵해도 좋다. 할머니의 몸이 되었다는 것은 침묵한다고 해도 이미 그 주름진 몸으로 많은 것을 들려주고 있다는 의미이다. 다만 나중에 할머니가 할머니답지 않게 스피디한 느낌도 없잖아 있었다. 어쨌든 아주 낡고 때묻은 노래조차도 할머니의 몸을 통과하면서 현시되는 장면이었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한번밖에 발을 담글 수 없는 현실의 흐름에서 한 삽 푹 떠낸 에피소드들은 어떤가. “밀지 마세요” 라며 간신히 몸을 가누는 장면. 필시 지하철에서 밀고 밀치는 아비규환의 일상을 재현하는 것이리라. 이렇게 이해하고 있는데, 다음 장면에서 어항 속의 물고기가 바깥으로 뛰쳐나와 파닥거리는 생명의 몸부림을 똑같은 동작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아닌가. 지하철의 우리는 졸지에 아가미 껌뻑이는 금붕어가 되었다.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홍은지는 지하철의 사람과 물밖의 금붕어를 살짝 연결하여 은유적인 매듭을 하나 만들었다. 코드를 훔쳐서 다른 코드로 횡단하는 감수성이 사실 놀랍다.

 

또한 와인을 좋아한다는 여자, 대화는 온건하고 논리적이어야 한다는 여자, 몸을 가꾸어야 삶이 편하다는 여자들도 점차 시간이 흘러갈수록 모노드라마의 강도를 높인다. 그리고 웰빙의 모드였던 것이 어느새 분노와 광분의 모드로 홱 바뀐다. 특히 이 장면이 명장면인데, 무엇이 코드의 질적 변화를 통해 비판의 칼날을 벼리는지 능히 간파하고 있다. 웰빙을 모방하는 삶이 이 시대 삶의 미메시스 감각이라면, 우리 무의식은 그런 상징적 질서에 순응하는 삶은 노예의 삶이라고 단호하게 외치는 것이다. 슬슬 블랙유머를 통해 ‘나’ 아닌 것들이 떠밀고 가는 속수무책의 흐름을 풍자하는 연출이 흥미롭다.

 

또한 술에 취해서 반말과 눈싸움을 섞는 에피소드라든가 가는 사람을 막아서며 애타게 사람을 구하는 에피소드에는 현실의 인용이면서 동시에 남의 일이 아니라는 입장도 묻어난다. 풍자는 ‘나’의 얼굴에 침뱉기이며, 결국 자기 심문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카페 더 로스트>는 연극과 춤이 유기화되지 않은 채, 거칠게 질문한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지금 살아 있는가. 꽉 짜여지지 않고 크레바스와 틈새가 있기 때문에 이 작품은 오히려 점프컷처럼 대범하게 훌쩍 훌쩍 뛰어넘는다. 논리를 빙자한 촘촘한 비둘기 걸음이 아니라 천리구두를 신은 거인 걸음이다. 이것이 자기 심문을 꼬질꼬질한 내면의 닫힌 방에 질문하는 이를 유폐시키지 않고, 보다 열린 지평으로 안내한다. 이러한 몽타주 감각이 연출의 ABC라는 것이지만, 얼마나 그리웠던가.

 

치열한 자기 심문에는 불타는 도화선도, 꼼꼼한 레시피도 없는 법이다. 있는 것은 시간의 시련이며, 침묵에 대한 열정이며, 온몸으로 존재를 느끼는 감각이다. 보이지 않는 어둠 안에서 방황하고, 지하인간의 우울증과 실어증을 추체험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내면에 가장 근접하는 길이며, 공연예술이 할 수 있는 존재론적 시도이다. <카페 더 로스트>를 보고 돌아온 밤에는 유쾌한 관객 역시 쉽게 잠들지 못했다. 알고 보니, 자기 심문은 돌림병이었다. 나는 잘 살고 있는가. 나는 살아 있는가.

 

다만 <카페 더 로스트>에서 몽타주 감각이 속도를 잃고 맴돌이하는 것은 외로움이나 고독의 정서를 재현할 때이다. 사람을 끌어안거나 혼자 ‘로스트’된 채 서성일 때이다. 그러나 몽타주 감각은 이미 그러한 머무름을 용서하지 않을 만큼 힘이 세다. 어쩌면 마지막 장면에서 울긋불긋 길게 옷가지를 엮어놓은 것이 우리가 건너가야 할 현실이란 이름의 강물인지도 모른다. 강물에 순응하여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가로지르는 것도 훌륭하다. 그렇다면, 이미 <카페 더 로스트>의 공간은 ‘디레인지드’된 것이다. 데이비드 린치가 사용하는 이 용어는 새로운 꿈을 꿀 수 있을 만큼 범위를 벗어났다는 뜻이다. 숱한 분열과 광란이 때때로 일반적인 정서로 인해 브레이크가 걸리기도 하지만, <카페 더 로스트>에는 분명히 남루한 현실의 응시를 통해 욕망하는 태도가 있다. 욕망은 돌연 변화된 세계로, 두쪽으로 갈라진 평행우주로 안내한다. 그 때문에 유쾌한 관객은 이 작품에서 실재적인 매혹을 느끼는 것이다.


보충설명

<카페 더 로스트>는 병들고 시든 정신들의 외침이 가득하다. 역설적으로 그 외침을 통해서 정신은 살아있을 수 있는데, 실천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억에서 길어오고, 현실에서 퍼온 에피소드들이 배치되고 충돌되는 문법에서 홍은지는 상당한 연출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연극과 춤이라는 가름에 크게 개의치 않고, 용도와 상황을 따라 자유롭게 몽타주하는 감각이 흥미진진하다. 그럼으로써 개인들의 내면적 어둠이 곧 시대의 어둠일 수 있다는 설득력을 얻고 있다.

*공연그룹 은빛창고 http://cafe.naver.com/silverstorehouse
*사진제공 : 한상진

필자소개

무용평론가 김남수 (anacroid@empal.com)
카타르시스나 감동 따윈 값싼 쾌락이라는 혹자의 말에 혹해서 그럼 그게 아닌 예술은 무엇인가 찾다가 우연히 춤에 귀의하게 되었다. 실제 와보니, 열에 아홉은 깡통소리 쩔렁거리는 넝마주의자들의 작품이라 조금 실망하기도 했다. 게다가 먹고 살기까지 힘들어서 피로가 가중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익숙하면서도 여전히 무한한 표현의 매체인 몸을 쓰는 예술에는 싫증이 나지 않는다. 몸의 기억과 새로운 분열 그리고 숭고는 춤추는 이들 대부분에게는 여전히 미지이지만, 이제는 예감 이상의 현실로 서서히 바뀌어가고 있다. 그래서 그는 미래를 준비하느라 마음이 쉴 틈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