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4. 10. 08:05ㆍ07-08' 인디언밥
- 아데모모(자유기고가)
- 조회수 594 / 2007.10.25
“소설가 구보씨와 경성사람들”은 소설가 구보 박태원의 실제 삶과 그가 쓴 소설들을 토대로 구성한 실제 사람들의 가상 이야기이다. 작가의 삶은 그의 작품에 배어있게 마련이고, 그의 작품들 역시 작가의 삶을 유추할 수 있게 만든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그들은 유사점을 갖고 있을 뿐 동일하지는 않다. 연출을 할 때마다 나는 그 작품 어디엔가 내가 녹아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한다. 등장인물들의 입을 따라 떠도는 말들 속에 나의 생각과 취향이 배어있음을 발견하고 은밀한 웃음을 흘리기도 한다. 성기웅씨가 쓰고 연출한 이 작품에서 나는 작가의 시선을 느껴보고 싶었다.
이 작품은 몇 겹의 껍데기를 통과해야 한다. 제일 안쪽에 일본의 문물이 넘쳐나던 1930년대 경성이 있고, 구보 박태원이 본 1930년대 경성의 풍경들이 있고, 극작가 성기웅의 눈으로 바라본 구보 박태원의 삶을 통해 조망해본 1930년대 도시의 삶들이 있고, 다시 현대인의 몸으로 과거를 상징화시킨 연출과 배우의 의도들이 가장 바깥 껍데기를 싸고 있다.
껍데기가 많은 작품들이 좋다. 물론 감동적인 작품은 언제나 단순한 플롯과 단순한 성격으로 나의 허를 찌르는 작품들이지만, 여러 겹 껍데기를 살짝살짝 벗겨볼 수 있는 작품들은 종합선물세트 같은 다양한 즐거움을 준다. 구보씨가 특별한 목적없이 하루동안 경성을 산책하면서 만나고 들은 이야기들을 가지고 여섯편의 단편소설을 구상하는 장면들은 각기 밀접한 관계없이 작품에 나열되어 있다. 냉정한 듯 무심한 듯 작가 구보씨는 단편소설집을 읽어내려가듯, 장면의 전환에 별다른 비중을 두지 않고, 심지어는 클라이맥스를 향해가길 기대하는 관객들의 기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산보를 즐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연을 보면 구보씨의 혹은 성기웅씨의 연민어린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뒷간에 생애 최초로 받은 러브레터를 빠트린 여학생, 좋아한다고 여겼던 여자의 산고, 서울와서 살림을 차린 유부남을 질타하는 윤초시, 일본인 하숙집 주인 딸과 순간적 연애감정을 느낀 동경유학생 등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삶의 아이러니한 순간들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상의 반복이 숨막히게 만들지만, 조용한 세상에는 언제나 작은 사랑의 감정들, 가질 수 없는 것을 더 갈망하게 만드는 욕심들, 섬광처럼 지나간 순간적인 감정들이 물결치고 있다. 단지 우리의 무딘 감각은 그것들을 평범하게 만들 뿐이다. 가끔 칼을 갈고 싶다는 욕구가 인다. 나의 둔탁한 세포들을 순간 예민하게 만들어줄 차갑고 날카로운 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우면서 껍데기들이 담뿍 담긴 에피소드는 구보 박태원의 <특강! 이상적 산보법>이었다. 전막이 끝나고 관객들은 모두 공연장 밖으로 축출(?)당한다. 휴식이 끝나고 돌아오면 무대위에는 Charlie Chaplin의 “도시의 등불(City Light)”가 상영되고 있다. 영화는 무대의 가장 뒤쪽 막에 영사되고 있는데 그 영사막 앞으로 그만(?) Charlie와 똑같은 콧수염과 지팡이와 꼬리달린 재킷을 입은 이가 걸어나온다. 후막이 시작되면 우리의 유사 찰리는 구보씨와 함께 한가롭고 여유로운 산책길을 방해하는 친절하고 허물없는 아는 이들을 만날때마다 어떻하면 그들을 물리칠 수 있는 지 다소 역설적인 방법을 소개해준다.
유사 Charlie와 구보씨는 영화관에서는 자주 만났을지 모르지만(왜냐하면 그 시절 경성의 영화관에서는 Charlie의 영화를 많이 상영했기 때문에), 그러나 그들은 한번도 직접 만난 적은 없을 것이다. 마치 실사와 허사가 만나서 대화하는 애니메이션을 보듯 무대 위에서 그들은 함께 대화를 나누고 설명하는 구보씨를 대신해서 거절하고 싶은 친구들과의 만남을 정중히 거절하는 방법을 실연(實演)해 보이기까지 한다. 심지어는 무성영화 속에서 Charlie가 도망가는 우스꽝스러운 해프닝까지 슬랩스틱 코미디를 섞어 보여준다. 경제학 강의라도 하듯 진지함을 가지고 구보씨와 Charlie씨가 설명하는 산보법의 핵심은 인정이나 예의 때문에 자칫 방해받을 수 있는 개인의 소중한 산보시간을 상대방 기분나쁘지 않게 거절하는 대응법을 설파하는데 있다. 모던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개인주의가 필요했었나 보다.
모던을 지나 포스트모던까지 지나버린 지금 우리는 여전히 타인의 친절과 개인의 의무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질질 끌려다니기 일수다. 1930년대 별 쓸데없는 고민을 하면서 한나절의 산책 시간을 보장받기 위해 이러저러 말도 안되는 궁리를 비법처럼 제시하는 코믹한 상황이 배꼽을 잡게 하는 이유는 사실은 지금도 마찬가지라는 것. 시간이 흘러 세상은 많이도 변했고, 작품에 나오는 약국이며 다방이며 이발소는 이제 다른 건물들로 바뀌었지만, 우리의 구질구질한(?) 다시말해 악다구니 같은 삶들, 그런 삶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들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그것이 참 답답하기도 하고 한편 다행스럽기도 하다. 그래서 한번 만나본적도 없는 동그란 테 안경을 낀 구보씨가 친근하고 경성 뒷골목 사람들의 목소리가 편안하다. 마치 나도 하루동안 구보씨와 함께 내가 살던 동네를 낯선 듯 바라보며 돌아본 듯이.
보충설명
예술의 전당 ‘자유젊은연극 시리즈’ 다섯 번째
“소설가 구보씨와 경성사람들”
공연 장소 :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
공연 시간 : 2007.10.20(토)~ 11. 4(일), 평일 7:30, 토 3:00, 7:30, 일 3:00, 월 공연없음.
원작 : 구보 박태원
극본 및 연출 : 성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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