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변신', 붉은 점박이가 박힌 희번득하고 길쭉한 몸통

2010. 3. 22. 00:28Review


변신, 붉은 점박이가 박힌 희번득하고 길쭉한 몸통

-극단 미추의 ‘변신’을 통해 살펴본 벌레를 봄과 벌레가 봄에 대해서


글 ㅣ 개쏭



그레고르는 알다시피, 어느 날 벌레가 된다. 거대한 벌레. 머리 가슴 배가 뚜렷한 맵시있는 베짱이같은 곤충이 아니라, 붉은 점박이가 박힌 희번득하고 길쭉한 몸통을 꿈틀거리는 벌레 말이다.


벌레를 보다


내 동생의 이야기이다.

내 동생은 어릴 적부터, 누구나 어릴 적엔 그렇겠지만, 곤충을 좋아했다. 곤충도감, 곤충만화, 곤충소설을 섭렵
하고 곤충잡지를 다달이 구독해서 보는 -실은 구독신청을 엄마한테 두달 정도 조르고, 아직 젊고 가계부 기록
에 이틀에 한번 꼴로 실패하지만 그럼에도 삼일에 한번 꼴로 작심을 하는 그런 젊은 엄마이기에, 차마 일년 구
독 신청을 해주진 않고 한번씩 눈에 띄고 기억이 나고 오늘 반찬값을 좀 아꼈다 싶을 때 사다주긴 했지만-

리보나 저리보나 곤충소년이었다.

봄에는 개미를 채집하고, 아니 채집한다기 보다는 팔다리를 뜯어도 보고 급식으로 나온 우유에 담가도 보고 과학실에서 숨겨가져온 성냥으로 태워도 보고 하다가 집에 가서도 같이 즐겁게 놀아야지 하고 채집하는 거지만, 여름에는 송장메뚜기를 채집하고, 아니 채집한다기 보다는 송장메뚜기 입에서 나오는 비린색의 타액이 정말 피인지 확인해 보려고 날개를 뜯었다가 뒷다리를 뜯었다가 반으로 갈라서 그 색이 그 색인지 살펴도 보다가 저녁밥 먹으라는 젊은 엄마의 독촉에 아쉬워하며 큼지막한 몇 마리만 골라다가 두 손가락에 하나씩, 대여섯마리 끼워서 오는 것을 채집이라고 한다면 채집이겠지만, 가을에는 바야흐로 사마귀의 계절이 도래하여 사마귀를 채집하고, 아니 이것도 채집이라 하기에는 조금 뭐한게 보통은 사마귀와 다른 곤충들을 잡아다가 누가누가 잘잡아먹나 콜로세움놀이를 하는 거지만, 겨울에는 아쉽게도 모기를 빼곤 별다른 곤충이 없어서 -그리고 모기는 별로 즐겁고 흥미롭고 언제나 새로운 곤충의 종류에 속하지는 못하기에- 봄이 오기를 기다리는 그런 소년이었다.

그랬던 소년 동생도 중학교에 들어가고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는 잠자리 똥구멍에 라이터 불을 붙인다든
가, 스포이드로 날벌레들을 빨아모으는 시시껄렁한 장난질 밖에는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곤
충소년, 아니 이제는 곤충청소년은 곤충에 대한 친밀감과 종에 대한 계보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십오세가 넘어
가면 그렇게도 어렵다던 지렁이 덥썩 잡기, 구운 메뚜기 먹기 등을 여간 쉽게 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곤충청소년이 곤충만 보면 기겁을 하고 솜털을 빠직 세우는 사건이 벌어졌으니, 다름아닌 곤충이
벌레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곤충청소년이 당연하게도 재수를 했고, 아니, 삼수였나, 어쨌든 그러던 와중에
고등학교식 기숙학원의 기숙사에서 수학의 정석을 씹어먹고 있었을 때, 모가지가 근지러워 손을 가져다 댄 것
이 문제였다. 그러니까, 곤충소년이 곤충을 싫어하게 된 것은 재순가 삼순가를 한게 문제였다는 말이다. 어쨋
거나 모가지를 긁고나니 손가락 사이로 뭔가가 꾸물거리고 있었더랬다. 정채불명의 벌레의 길쭉 희번득한 배
때기가 일말의 규칙성도 없이 꿈틀거리고 있더랬다. 눈앞으로 끌어당긴 손가락 사이에서. 똥꼰지 입인지를 벌
름거리면서.

한참 유행했던 라깡 식으로 말하자면 상징계의 그물망 사이로 촉수가 침입했다랄까. 그 이후로 곤충소년, 아니 곤충청소년은 더 이상 곤충을, 아니 이제 그는 곤충의 학명과 한국이름을 부르는 것을 멈추고 그냥 벌레라고 부르지만, 만질 수도 가까이 갈 수도 없게 되었다.

그레고르는 벌레가 되었다.

그리고 그레고르의 절친한 누이와 사랑하는 어머니와 존경하는 아버지는 그를, 그레고르나 잠자나 그레고르
잠자나 오빠나 아들래미라 부르지 않고

저것

이라 부른다.

‘변신’은 이런 벌레 그레고르에 대한 이야기이다.

( *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머리가 쭈뼛 선다’는 말을 체험해 본 일이 있는가? 이 글을 쓰는 나는, 그러니까 곤충소년의 형은 딱 두 번 머리카락이 한올 한올 땀구멍서부터 쭈뼛 서는 경험을 해봤는데, 하나는 사람하나 없는 야밤에 야산을 끼고있는 도서관 주변을 휘파람에 바이브레이션을 넣어가며 걷는 중에 옆에서 커다랗고 연속적인 방구소리가 들렸을 때였고, 또 하나는 15년 동안 살아온 아파트 현관 앞에서 마치 푸들의 흰 파마머리를 얽어붙인 덩어리가 미시피추 춤을 추며 나에게 다가올 때였다. 전자는 아직도 정체를 모르겠고 후자는 비닐봉투였다는게 확인되었지만, 그렇다고 셔츠를 축축히 적신 식은땀이 바로 마르는 것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머리가 쭈뼛 설 때, 정확히는 쭈뼛 서고 바로 후에, 몇가지 행동방식을 택한다. -왜냐하면 그냥 계속
쭈뼛 세우고만 있기에는 머리카락엔 뼈대도 근육도 없기에-
쓰러지거나, 침착한 척 하거나, 돌맹이를 던지거
나. 바꿔 말하면, 두려운 것을 잊으려고 하거나, 두렵지 않은 척 하려거나, 두려워 죽을 것 같거나.)

그레고르가 벌레가 되어서 문을 열고 나왔을 때, 그레고르의 가족들은 각각의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어
머니는 기절하고, 그의 누이는 뭘 먹여야 할지를 고민하고, 그의 아버지는 관절염도 잊고 힘껏 사과를 던진다.
바꿔 말하면, 그의 어머니는 그 벌레가 그레고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기 위해 기절하고, 그의 누이는 속옷바
람인 것도 잊은 채 신선한 우유가 좋을지 약간 곰팡이가 핀 감자가 좋을지를 필사적으로 생각하고, 그의 아버지는 팽팽한 긴장으로 가늘어진 신경 속에서 뒷걸음질 치며 손에 잡히는 무언가를 집어던지는 것이다.

이런 반응은 그들의 가족애가 약해서도, 그들이 정서적 결함이 있어서도 아니다. 살려는 몸부림, 말로 할 수 없는 공포로부터 저항하기 위해 하는 한 생명체의 결단인 것이다. 손가락 사이를 꿈틀거리는 벌레의 배때기를 봤
을 때,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황급히 손을 털어내는 일 뿐이듯이. 다만 약간의 차이, 손을 터는 동작의 차
이 정도만이 있을 뿐, 손을 터는 행위는 같은 것이다.

그리고 남은 것은 손을 턴 행위에 대한 변명이다. 어머니는 끊임없이 기절을 하면서도 언잰가는 이 벌레가 다
시 사랑스런 아들이 되기를 기원하고, 누이는 저 벌레는 더 이상 오빠가 아니라고 말하고, 아버지는 저 벌레가
자신의 아들이라 자신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면 스스로 떠나줘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이 공포로 손을 터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다만 그 후의 변명은 오롯이 자신의 부끄러움으로 남을 것이며, 안타까운 것은 우리에게는 공포의 순간보다 변명의 시간이 훨씬 길다는 점이다.

더더구나 부끄러워지는 때는, 자신이 쳐낸 벌레가 우리를 지긋이 쳐다볼 때, 그 수백의 눈동자로 우리에게 조용히 말을 걸어올 때이다.


벌레가 보다





벌레가 우리에게 조용히 말을 거는 지점, 바로 이 지점이 연극 ‘변신’의 특이점이다.
머리털이 쭈뼛 서는, 그런 벌레를 단순히 벌레를 보는 사람의 시점 뿐만 아니라, 자신을 그러한 벌레로 보는 사람들을 보는 벌레의 시선까지도 나타나는 것이다. 방에만 박혀있는 벌레를 보여주기 위해서 놀라운 무대장치를 사용하기도 했다. 그레고르의 방, 즉 벌레의 방이 마치 클로즈업을 하듯이 객석 바로 코앞까지 이동을 하는 것이다. 어두워지는 조명과 함께 우르르 달려오는 그레고르의 방은, 관객에게는 머리털이 서는 광경이자 동시에 벌레의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는 기회이다.

또한 그레고르의 성격이 원작 소설과는 조금은 다른 점이 그의 내면을 더 풍성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원작에서
의 그레고르는 벌레가 되었다는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이성적이고 쿨한 인물이라면, 연극에서의 그레
고르는 착하고 무르고 갑갑한 순딩이, 가족들을 위해 반평생 몸이 부러져라 일을 하는 만년몸살 세일즈맨이다. 캐릭터가 어깨에 힘을 뺀 만큼, 우리는 더욱 깊숙이 그레고르의 감정의 선을 따라갈 수 있다.

무대장치과 원작과의 차이를 통해 -그레고르의 목소리를 더 가까이서 들을 수 있는 준비가 된 것이다. 벌레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편하지 않다. 하던 일도, 사랑하는 가족도, 꿈꾸던 미래도 잃어버린 사람.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혐오와 공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사람의 기분은 어떤 것일까.- 벌레를 보는 사람들의 찡그린 시선은 이 한 마리의 벌레 그리고 한 마리의 사람, 그레고르의 마음을 조각조각 뜯어냈을 것이다. 마치 신문지 뭉치
바퀴벌레의 아랫배를 으깨버리듯이. 그리고 아랫배를 으깨버린 것이 끝이 아니라, 대가리까지 으깨야 하는
데 실수한 것이라는 듯 다시 신문지 뭉치를 들어올리는 팔뚝마냥, 그리고 그 팔뚝을 바라보는, 이제는 도망갈
수도 없는 바퀴벌레처럼.

'어머니는 나를 보면 기절한다. 누이는 내 몸과 닿으면 비명을 지른다. 아버지는 술조차 마시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족들은, 내가 사라져 주었으면, 하고 생각한다. 나는 가족들, 아니 이제는 내가 그들을 가족이라 부
르는 것을 부정할 그들에게, 더 이상 아들이라고, 오빠라고 불리지 않는다. 다만

저것

이라고만 불린다.'

그레고르 잠자, 한 마리의 버려진 벌레는 모두가 잠든 어둠 속에서 조용히 이야기한다.

"
어둠은 진실을 더 잘 볼 수 있도록 해줘요. 다만, 자신이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 만요."
그레고르의 대사 中

온몸이 부러지고 곪은 벌레의 이 한 마디는 많은 울림을 담고 있다. 실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가장 괴로운
상태에서야, 그리고 일말의 희망과 자존심조차 꺾이었을 때에야, 사람들의 속마음, 그리고 자신의 속마음을 가
장 잘 알 수 있을지 모른다. 다시 사람으로 돌아온다는 희망, 다시 일을 할 수 있다는 희망, 지금까지 가족들을
먹여살린 것에 대한 자부심, 가족들이 나를 속마음 깊이에서는 실은 사랑할거라는 마지막 자존심, 이 모든 것
들이 무너졌을 때, 그때에야 그레고르는 한 칸의 방을 벗어나 사람들의 마음과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있게 되었
다. 그리고 그때에서야, 그 어둠 속의 진실을 보고 나서야 괴로운 삶, 괴로운 육신을 떠날 수 있게 된다. 마치
영혼이 떠나가듯, 그레고르는 안녕을 말하고, 가족들은 아무것도 없이 비어있는 자리를 바라본다.

어쩌면 그레고르는 벌레가 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멸시 받은 것이 아니라, 실은 이미 자신 안에 벌레를 담
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벌레로 변하기 전의 그레고르는 매일매일 지방순례를 다니는, 기차역 직원보다 기차 시
간표를 더 잘 알고 있는 영업부 사원이었다. 그는 이렇다 할 취미나 목표도 없이, 아버지가 사업 끝에 진 빚을
갚고 가족들의 생활을 유지해나가기 위해 매일같이 일만 한다. 집에서는 잠밖에 자지 않는 그를 지탱해 주는
것은 가족에 대한 사랑과 책임의식이다. 이 얼마나 착하고 훌륭하기만 한 청년인가. 문제는 이것이다. 착하고
훌륭한 것.

"나는 녀석이 처음 일을 끝내고 온 후의 표정을 본 적이 있어. 그건 충실히 일을 하고 난 사람의 표
정이 아니었어. 물론 녀석이 정말 열심히 일을 한 것은 알아. 하지만 그 피곤해보이는 표정 속에는
원망이 있었어."
- 아버지의 대사 中-

일 끝나고 돌아온 피곤에 쩔은 표정, 가족들을 위한다는 착해빠진 표정, 그리고 일말의-아주 잠깐 스친 원망의 표정, 이런 표정들은 마치 벌레의 얼굴처럼 가족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을 것이다. 별로 잘못된 것 없이 매끄
러워 보이지만, 벌레의 몸이 지나고 간 곳에는 점액질이 묻듯 오랫동안 매스껍게 여겨졌을지도 모른다.

우리도 이런 표정을 알고 있다. 어머니의 어머니다운 사랑, 아버지의 아버지다운 근엄함, 누이의 누이다운 발
랄함. 어머니의 어머니스러움, 아버지의 아버지스러움, 누이의 누이스러움. 그리고 그 표정 이면에, 우연한 사
건의 터짐으로 인해 순간적으로 눈치체기 힘든 찰나의 시간에 드러나는, 어머니의 이기심, 아버지의 치졸함,
누이의 비열함. 어머니의 어머니스럽지 않음, 아버지의 아버지스럽지 않음, 누이의 누이스럽지 않음. 그리고
나.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 설혹 말하더라도 실은 말한 것은 아닌, 나.


원작에서는 벌레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묘사를 했다면 (붉은 점박이가 박힌 희번득하고 길쭉한 몸통)
연극에서는 벌레가 된 그레고르를 연기하는 배우가 별다른 분장을 하지 않는다. 굳이 분장이라고 한다면,
벌거벗고 있다는 것이 유일한 분장이다. 왜 그랬을까?

벌레 코스튬을 하자니 코메디가 될 것 같아서? 실은 우리의 벗은 몸이, 사회적 불문율을 벗어난 우리의 모습이, 가장 깊은 내면에 있는 우리의 진심이 이미 벌레와도 같은 것으로 보여지는 것은 아닐까. 실은 벌레들이 사람 코스튬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레고르는 다만 그 옷을 벗어버린 것은 아닐까. 우리의 가장 인간적인 모습은 한편으로 사회적으로는 가장 비인간적이진 않을까. 내 속에 숨겨진 욕망, 숨겨진 진심은 과연 내가 입은 옷-밖으로 드러나는 나의 표현만을 볼 수 있는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소설 변신과 연극 변신 모두 이러한 질문들에 ‘아니오’라고 대답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아니오’라는 대답은 소설을 읽고 연극을 보는 사람들 또한 동일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람이라는 옷을 벗지 않는다. 실은, 벗기가 두렵다. ‘변신’은 이런 우리들 중 한명인 그레고르의 그 옷이, 그가 피곤에 쩔어 잠에 든 사이 몰래  벗겨진 것이다. 부끄럽고, 답답하고, 분노하고, 하지만 피할 수는 없는, 언젠가 우리들도 들킬지도 모를 한꺼풀의 옷이.


우리의 옷 속에는 일말의 벌레표피가 숨겨져 있다.



극단 미추의 '변신'

인간소외와 가족 해체의 위기에 놓인 현대사회에의 강한 일침!

'변신'은 20세기 대표적인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프란츠 카프카의 걸작이다. 인간 실존의 허무와 절대고독을 주제로 하며,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날 거대한 곤충으로 '변신'하는 데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출구를 찾기 힘든 현대인의 삶 속에서 인간의 불안과 구원에의 꿈, 그리고 자기존재에 대하여 현실 속에서 새로운 의문을 품게 하는 작품이다.

공연명     변신 (원작 : K.카프카)
공연일시  2010.3.11 (목) - 3.19 (금)
공연장소  게릴라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