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낯선 이웃들의 목소리 <소녀도시로부터의 메아리>

2010. 3. 25. 11:32Review

 

낯선 이웃들의 목소리


《소녀도시로부터 메아리》




1
. 들어가며


 소녀도시에는 “사랑한다” 는 말이 없다. “만약에” 라는 가정도 없다. 사랑과 가능성이 없는 공간에서 소녀는 절규한다. 소녀도시로부터의 메아리가 돌아온다. 관객을 향해 돌진하는 5만개의 구슬. 시청각을 압도하는 장면에 외침은 단말마가 된다. 마지막 말은 무엇이었을까. 오빠인지, 마마인지, 愛してる(사랑해)인지, 안녕이라는 말인지. 




 재일교포 2세인 연출가 김수진이 극단 신주쿠 양산박과 함께 일본의 ‘앙그라’ 연극을 이끌었던 가라 주로 작 <소녀도시로부터의 메아리>를 한국 무대에 선보였다. 작품에서도 그러하듯 60년대 일본 연극의 실험과 전위의 순간들이 연상된다. 그로테스크한 작품의 분위기, 다이나믹한 배우들의 운동감각, 연극적 낭만과 일본의 음습함이 공존하는 무대. 양산박이 활약하는 무대는 현실과 탈현실이 묘하게 겹친다.



2. 다이나믹한 세계의 창조


 작품의 스토리는 자신의 뱃속(?)에 기거하는 여동생 유키코를 찾아 나선 다구치의 여행기다. 남자가 생명을 잉태하고 있다는 점이나, 의식 세계에서 무의식의 공간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넘나든다는 발상이 인상적이다. ‘자기에로의 침잠’ 이자, ‘근원에의 여정’ 등과 같은 무거운 철학적 질문이 떠오른다. 허나 신주쿠 양산박은 그 별난 이름처럼, 가볍고 재미있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여러 가지 세계가 무대 위에 펼쳐진다. 수술실 위에 놓인 다구치의 현실 세계과 유키코가 머무는 내면의 세계, 그리고 유키코의 약혼자 프랑케에 의해 호명되는 역사의 시공간이다. 마취 상태의 몽환적 세계 안에서 기억과 일상과 역사가 뒤섞이는 셈이다.


 복잡한 세계의 층위는 그리 넓지 않은 두산아트센터의 소극장 무대 위에 다채롭게 구성된다. 현실에서 오테나의 탑이 있는 내면의 세계로 넘어갈 때, 다구치는 자신의 옷깃을 흔들며, 바람이 휘몰아치는 대지로 나아간다. 내면의 세계에서 프랑케 역시 자신의 기억을 불러들인다. 병사들이 뿌려대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만주의 벌판이 펼쳐진다. 일본 특유의 흩날림의 분위기를 살린 눈송이를 비롯하여, 모기장 속에서 등장하는 배우들, 다다미 장을 이용하여 문간방과 수술실을 나누는 등의 공간 분할로 배우들의 움직임은 공간의 시각화에 절대적으로 기여한다. 배우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새로운 공간이 발견되고, 세계의 층위는 다양하게 말을 걸어오는 것이다.

 느긋하게 움직이는 거지 노인들의 운동성과는 다르게, 프랑케를 추종하는 젊은 네 명의 소녀들은 시종일관 깡총깡총 뛰어다닌다. 무대 위에 매달린 주마등은 빙글빙글 돌고, 롤러스케이트를 신은 프랑케 박사는 김연아의 피겨 스케이팅을 흉내 내며 빙그르르 무대로 진입한다. 이렇듯 창출된 공간을 채우는 운동성은 작품에 묘한 활기를 더해준다. 유치하지만, 무엇이든 용인되는 환상의 세계, 정상과 비정상이 구분되지 않는 기형적인 세계다.






 이러한 세계에서 배우들은 당혹스러울 만큼 자유롭고 경쾌하다. 귀여운 소녀 이미지의 유키코는 유리구슬처럼 불안정하지만 대담하고 씩씩하다. 한편으로는 살기위해 발버둥 치는 존재이자 살아가야 하는 세계를 찾아 항상 떠돌아다니는 슬픈 존재다. 누군가 찾아오고, 맞아주는 거지 노인들의 모습보다도 더 안쓰러운 것이다. 유키코와 다구치의 재회 장면은 일본 만화나 개그프로에서 익숙한 콩트와 슬랩스틱의 외양을 하고 있는데, 뭔가 맞지 않는 듯한 대사와 행동에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난감하다. 그들은 바보스러운 행동과 별난 취향을 대담하게 드러내는데, 그 와중에 근친, 소녀취향, 페티쉬, 네크로필리아 등등의 변태성은 스쳐지나가듯 얼버무려진다. 대체로 진지하게, 장난과 금기를 넘나듦을 표현하는 배우들 덕에 관객들은 어리둥절의 연속이 된다. ‘그로테스크’ 를 친화하게 하는 배우들의 힘이 놀랍다. 노래를 연주하고 나서 ‘아주 좋군’ 을 순환적으로 연발하는 거지 노인들의 코멘트는 처음에는 기가 막혔다가, 재미있고, 이내 처량해진다. 가장 의아한 지점에서 인간적인 마음이 드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귀여움’ 의 인상은 점점 ‘기괴함’ 으로 변하고, 종장에는 ‘처연함’ 으로 변모한다. 소녀도시로부터 메아리를 보내는 유키코가 그러하고, 김수진이 연기한 프랑케 박사가 그러하며, 담배를 피우고, 야한 속옷을 입고 다리를 찢는 간호사가 그러하다. 기괴함의 주체는 그것이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사연을 지닌 존재로 자리할 때 더욱 애틋하게 변모한다. 


 스타킹을 신고 스케이팅을 하는 박사나 입술에 루즈를 바르고 등장한 연대장의 모습, 여동생을 품고 있으며, 아리사와를 사랑하는 다구치에게선 여성적 무의식의 인격체(아니마)가 느껴진다. 모호해지는 여성성과 남성성의 경계에서 유키코는 ‘유리의 성’ 으로 변신을 감행한다. 암수의 교합으로 생명을 잉태하는 동물성이 무생물의 광물성으로 치환된다는 상황 설정이 기가 막히다.



3. 그로테스크한 세계의 모사


 ‘그로테스크(Grotesque)’ 는 예술 일반에서 환상적인 괴기성과 우스꽝스러움을 일컫는 말이다. 연극에서의 ‘낯설게 하기’ 의 장치는 그로테스크를 추동시키는 힘이 된다. 앞서서 언급한 아니마와 아니무스 개념의 시각화가 대표적이다. 이 작품에서는 일본 특유의 변칙적인 미학으로 현현되고 있다. 집 떠나와 배회하는 인간들, 요괴 같은 모습의 캐릭터들, 안식처를 찾아 떠도는 원혼들. 영락없이 일본의 문화적 원형을 고스란히 담보한 일본연극의 모습들이다. 죽어서야 의미를 갖는 머리, 광기어린 사랑, 얼굴 없는 미녀 등등 잔인하고 엽기적이며 광기를 담고 있는 상황을 연출한다. 한편, 조소와 해학 등의 웃음을 유발시키는 배우들의 표현으로 ‘'그로테스크'의 개념을 확장하면서, 일본 문화의 다양성을 관통한다.


 알 수 없는 오브제와 언어들, 캐릭터들로 인해 구현된 알 수 없는 세계. 언어는 해체되고, 이성 중심의 세계는 파괴된다. 일본어였다가 한국어였다가, 일본말로 된 영어를 넘나드는 말의 음성. 그에 담긴 의미도 어린아이의 말장난처럼 가볍거나 혹은 비논리적인 상황의 설명으로 어긋난다. 그러나 그로테스크가 모든 지점에서 비논리를 주장하거나, 단지 기괴함으로만 머무는 것은 아니다.





 이상한 세계에 대해 침묵하고 외면하는 우리들 대신에, 그들은 적극적으로 시종일관 장광설과 요설을 쏟아내는 행위를 통해 이상한 것들의 사연을 살핀다. 그들의 ‘언어’ 는 세계를 규정하고 구분하는 대신 경계를 허무는 놀이가 된다. 말이 서로 통하지 않아도 거지 노인들은 정서적 일체감으로로써, 서로 의지하고 기댄다.


 차가운 이성의 언어 대신 인간적인 정서가 우러나는 ‘음악’ 역시 작품을 구성하는 중요한 축이다. 재즈틱한 멜로디와 뜬구름 잡는 가사가 매치된 ‘자궁의 눈물’, ‘구두의 고독’ 등등의 노래가 생경함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자신의 본향을 그리는 한국의 ‘고향의 봄’ 과 ‘봉선화’ 등의 노래로 애수를 자아내기도 한다. 그로테스크한 세계를 따뜻하게 품어주는 정서로서의 환기이자, 광기와 잔혹의 사랑으로 오해받을 수 있는 일차원적 멜로의 세계에서도 거리를 두는 역할을 한다. 향수를 자극하는 하모니카 소리가 무대 위에 애잔하게 울리면, 음습한 공간에 낭만과 순수가 불꽃처럼 피어오른다.



4. 나가며


  <소녀도시로부터의 메아리>는 근친상간과 동성애, 낙태, 기형아 등등 반생명성(불모성)에 대한 논의를 진행시키고 있다. 광물화된 인간에게서 인간의 긍정을 보기도 하고, 스스로 사물이 되는 것으로 인간을 구원하겠다는(?), 다소 장황한 대사를 부러 내세우기도 한다. 유리자궁을 지닌 유키코는 벌레를 밟아 죽이며 살아있는 생명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는 등, 일관성의 지점을 찾기도 쉽지만은 않다. 검은 옷을 입은 무용수 캐릭터는 유키코의 또 다른 분신으로 나와 모호함을 증폭시킨다. 현실 사회에서 수용될 수 있는 범위를 살짝 벗어나 있기에, ‘나’ 와는 다른 이웃들의 그저 그런 다양한 목소리로 치부해 버릴 수도 있겠으나, 그들의 문제제기는 우리에게도 밀접하다. 프랑케 박사는 기억 속에서 재현되는 ‘1948년의 만주’ 는 구체적인 일본의 역사를 호명한다. 승전을 꿈꾸며 아시아로 진격하던 폭주의 꿈은 패전으로 여지없이 깨져버렸다. 무수한 생명이 으스러졌고, 대지는 불모의 땅이 되었다. 이처럼 ‘반생명’ 의 실제적인 사건은 현실이 아닌 탈현실의 몽환 속에 틈입한다.


 박사가 관동군이었던 시절에 부모와도 같은 연대장의 등장으로 폭력적인 세계의 지배자와 복종자가 뒤바뀐다. 무의식을 억압하는 존재가 나타남에 따라 박사 역시 폭력적 자기 근원으로 침잠하게 된다. 모든 생명을 부정하는  프랑케에게 ‘어머니’ 는 기껏 천박한 자궁을 가진, 탄생기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어머니는 죄인이다. 그래서 생명성을 빼앗아 유리로 바꾸어야 한다. 유리자궁을 가진 어미는 잉태가 불가능하거나, 혹은 자신을 찢기는 고통으로 출산을 감행해야 한다.


 소녀는 유리로 되어 있기 때문에 유리가 깨지는 순간을 기괴한 소리와 파편의 실감으로 괴로워한다. 이러한 감각은 반인간적 상황으로 대유된다. 유리의 마찰과 파열은 불편함을 야기하고, 그러한 현실에 직면하게끔 만든다. 레모네이드는 유리병에 담겨야 빛을 발하고, 구슬은 유리로 만들어져야 그 영롱함을 더한다. 스웨덴의 눈이 날리는 큰 수정 구슬의 질료도 유리다. 뭔가 낭만과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게 만드는 속성. 그게 유리의 성질이나 광물은 생명을 잉태하지 못한다. 다만 깨지고,  마모되어 사라질 뿐. 


 일본만화와 드라마, 영화를 통해 미리 일본 문화에 노출된 관객들은 어느 정도 대중적/서사적 코드에 익숙하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이 영상이 아닌, 실제로 펼쳐진 연극 무대를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우리의 낯선 이웃들은 화려함과 세련됨이 아닌, 거친 언어와 몸짓 그리고 투박한 외양을 통해 따뜻함과 웃음으로 우리에게 손을 건넨다. 그들이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 역시 그런 식으로 소외자의 목소리를 대신 전하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신주쿠 양산박의 무대는 재현하기 어려운, 기괴하고 아름답지 못한 것들을 일본 특유의 감수성과 연극성으로 절묘하게 녹여내었다.


글 | 정진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