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네마프 뉴미디어 탈장르전 : 무용영화, 영화시, 그래픽영화, 리듬영화

2010. 8. 17. 17:32Review

 
<네마프 뉴미디어 탈장르전 : 무용영화, 영화시, 그래픽영화, 리듬영화>


글_허김지숙








 

월경(越境) - 새로운 상상력, 그 시작을 탐색하다.

 
뭐야, 내가 뭔가를 놓친 걸까. 저 남자 왜 자꾸 웃는 거지. 남자의 웃음에는 맥락이 없었다. 자연을 뛰노는 댄서의 정갈한 퍼포먼스 장면에서, 생활의 비참함을 표현하기 위해 댄서가 세트에 매달린 장면에서 또 전쟁의 참혹함을 표현한 애절한 장면에서도 터져 나왔다.


무용영화와 영화시 섹션을 보러간 원트리의 맨 뒷자리에서 난 자꾸 피식 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는 남자를 만났다. 그는 무용영화 섹션의 일곱 편의 작품을 보면서 자신의 유쾌한 기분을 거침없이 표현했다. 팔짱을 끼고 바짝 무릎을 붙인 채 스크린을 응시하던 나는 그의 반응에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내가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친 것일까, 아니면 그가 이상한 걸까.

 







서울뉴미디어페스티벌은 10주년을 맞아 올해 ‘국제’적으로 거듭났다. 국제뉴미디어페스티벌(Nemaf, 이하 네마프)의 슬로건은 ‘열애(10ve)'다. 소통과 사랑을 전하고자 한다는 이 슬로건은 장르의 경계를 아울렀던 서울뉴미디어페스티벌의 취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네마프의 상영일정표를 펼쳐놓으니 그야말로 매일 보고 싶은 작품들이 포진해 있었다. 린 삭스, 켄 제이콥스 등의 거장 회고전에서부터 세계의 미디어아트를 볼 수 있는 본선작들, 그리고 직접 작품을 체험하는 워크숍들까지. 하루 24시, 한정되어있는 여가의 시간에 그 욕심들을 다 채울 수 없기에 선택을 해야만 했다.

 






눈에 띄는 섹션은 개막작들과 본선작들이었지만 그 외에 더 관심을 끄는 것은 이름도 생소한 ‘영화시’, ‘리듬영화’, '그래픽영화‘가 있는 탈장르 섹션이었다. 탈장르전의 한 섹션 ‘무용영화’의 경우 이전에 아이공에서 상영했던 ‘마야 데렌’의 댄스필름에서 추측이 가능했지만 나머지는 감이 잘 오지 않았다. '그래픽 영화‘라면, 현재 만들어지고 있는 영화의 대부분이 그래픽영화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현재 극장에서 상영되고 있는 작품의 거의 모두 그래픽이 사용되고 있으니 말이다. 그저 영화 ’그래픽‘이 아닌 ’그래픽‘ 영화라는 단서 정도. 그렇다면 ’영화시‘는 무엇일까. 시처럼 정서와 암시의 영상일까. 이정도의 추측에서 ’리듬‘에 영화 혹은 필름이라는 단어가 함께 하는 ’리듬영화‘에 가서는 추측도 별다른 답을 얻어낼 수 없었다. 그렇다면 부딪혀보는 수밖에….

 



무용영화 :
벗(겨지)길 두려워하지 마시라


한 섹션의 상영작은 많든 적든 다 보고 나면 특정한 작품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편애라고 할 수도 있겠고 개인의 취향의 문제일수도 있다. 불편했기 때문에 더 기억에 남을 수도 있고 반대로 같은 이유로 완전히 잊히는 버리는 작품이 생기기도 한다.




 









댄스필름 ‘하루의 여왕들 Reines d'un jour'은 섹션에서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26분이라는 다소 긴 러닝타임에도 지루함을 느낄 새가 없는 다이나믹한 작품이었다. 구름 짙은 알프스의 하늘과 언덕을 뛰어오르는 여섯 개의 육체가 나타났을 때부터 나는 이 작품이 나의 편애작이 될 거라는 예감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심지어 이 작품은 이 섹션에서 맨 처음 순서였는데도 말이다.












또한 ‘마을 3부작 The Village Trilogy'은 무성영화로의 회귀 혹은 오마주처럼 느껴졌다. 작품의 내러티브를 따라가게 만드는 방식은 우리가 잊고 있었던 무성영화의 매력을 상기시키고 있었다. 무용과 공간으로서 전쟁의 상처, 가족의 추억을 이야기 하는 인상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극장에서의 무용공연에서는 놓칠 수 있는 표정의 클로즈업으로 감정의 결은 그대로 살아나고, 장소의 제약에서 풀려나 자연 혹은 특정한 장소에서(매저 Measure, 코너드 Cornered) 댄서들의 표현력은 더욱 부각된다. 카메라가 쫓아가는 그들의 육체는 관능의 힘으로 관객을 강하게 이끌었다. 약동하는 그들의 육체를 보며 한편으로 노골적이라고 말해질 수 있을 만큼 간결한 표현들은 그동안 우리가 보아온 여타의 영화들이 얼마나 불필요한 것으로 덧칠해진 것인가를 떠올리게 했다.

대신 작품들은 ‘시각’의 집중으로 모아진다. 소리와 색의 의도적 배제 혹은 부각은 퍼포먼스에 집중하게 만들고 에두르지 않는 그 방식은 표현되길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영화시 : 개인적 기억이 울리는 공명


토요일밤 무용영화와 연달아 상영된 영화시 섹션에서는 무용영화의 에너지로 달려온 감각을 편하게 풀어놓을 수 있었다. 언뜻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잡념이 끼어들 여지가 많았다. 무슨 이야기일까 생각하고 있자면 화면은 이미 흘러가고 있었다. 이건 마치 행간에 내 생각을 끼워 넣고 천천히 흘러가는 한편의 에세이나 시를 읽고 있는 기분이었다.


작품 ‘죽은 개를 찾아서 Searching for Dead Dongs'는 감독 자신의 외할머니부터 어머니 또 자신으로 이어지는 장녀로서의 삶을 이야기하며 감독 자신의 허스토리를 작품으로 보여줬다. 담백한 인터뷰와 나레이션의 교차가 서서히 풀어가는 이야기는 흡입력있게 관객을 이끌었다.


이렇게 작가의 정서가 두드러진 작품이 갖는 힘은 남의 일기를 훔쳐볼 때의 짜릿함으로 다가왔다. 개인의 내밀함이 갖는 힘, 그것이 영화로 일반화되고 객관적으로 보여질 때 관객 각자의 속으로 침투하여 공명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리듬, 그래픽 영화 : 시각과 음악의 콜라쥬, 진정한 공감각적 체험


리듬·그래픽 영화 섹션의 작품들은 탈장르섹션 중에서도 새롭고 인상적이었다. 작품의 표현 방식이 새롭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픽은 현재 거의 모든 영화나 텔레비전 등의 영상매체에서 익숙하게 쓰이고 있고 그만큼 거기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작품들은 미디어아트를 전시하는 미술관이 더 어울려 보였다. 미술관의 LCD화면에서 주로 보아오던 작품들과 효과나 표현방식에서 많이 다른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들의 집중도와 경험치는 사뭇 남달랐다. 큰 화면과 풍부한 사운드로 펼쳐지는 영상들은 시각과 청각이라는 경계를 허물며 하나의 감각적 체험으로 다가왔다. 이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에너지가 성큼 다가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인공의 영상들은 순전히 컴퓨터를 통한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러움’을 추구하고 있었다. 피어나고 변형되고 다시 꽃이 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플로버 Flover'나 인체의 형상이 분해되고 다시 재조합되는 ’재생되다, 부활하다 Reanimated & Rebirth' 등 대부분의 작품이 본질적인 ‘자연’의 움직임이나 속성을 표현하고 있었다.

 
리듬,그래픽영화 섹션의 상영을 마치고는 ‘재생되다, 부활하다’의 전우진 작가와 GV시간이 있었다. 작가는 분절된 프레임 안에 시공을, 자연을 담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실제로 무용가의 움직임과 실사를 따와서 작업을 했다고 한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보아 넘겼던 장면들은 만삼천장의 레이어를 겹쳐 만들어진 것이라는 제작과정을 밝히기도 했다. 한 관객이 도대체 왜 동작(무용가의 퍼포먼스)을 스틸로 만들고 다시 그것을 움직이게 만들었는지에 대해 질문을 하자 작가는 그저 속 깊은 웃음을 내비칠 뿐이었다.

 


탈장르, 무용영화·영화시·리듬,그래픽영화는 한 섹션 안에 상영되었지만 다 각각의 개성이 뚜렷하고 매력도 각각이었다. 뉴미디어라는 장르 안에서 새롭게 생겨난 이종(異種), 경계의 경계를 넘는 작품들이었다. 정의되어지기보다 표현되는 것을 먼저(avant) 고려된 이 작품들은 어떤 장르의 창작이든 작업을 하는 사람에게 훌륭한 자극제가 되어줄 것이다.

(하도 들어서 이제 더 이상 떠올리고 싶지 않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라는 말이 있다. 새로운 내용과 형식, 존재방식, 모든 게 고갈된 것처럼 느껴지는 이때에도 계속 어떤 형태로든 ‘새로운’ 것들이 생겨난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작은 새로움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인다. 알고 보면 새로울 것도 없는 영화 ‘인셉션’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 그 새로움이란 것은 단번에 뚝딱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수많은 시도와 변형에서 나타난 기형들이야말로 바로 ‘인셥션’의 모태이다. 새로운 표현의 경계를 허무는 이 작업들의 경험이 그래서 더욱 소중했다.


하물며 알 수 없는 부분에서 웃기를 멈추지 않은 그 남자 또한 작품 안에서 뭔가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새로운 해석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아니면 말고 다음에 마주치면 왜 그렇게 웃었던 건지 그 이유를 꼭 듣고 싶다.

 

 


+ 보태기 : 
‘뉴미디어아트 포럼’에 다녀와서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미디어’라는 말이 얼마나 흔한가 말이다. 뉴미디어, 매스미디어, 멀티미디어 그리고 미디어아트. 미디어아트라는 생소한 개념이 이다지도 친숙하게 다가오는 동안 알지 못했던 시작을 알아보는 시간이랄까. 무엇보다 국내 미디어아트의 운동과 그 궤를 같이하는 네마프 Nemaf에 대해 더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10년 적지 않은 시간이다. 네마프는 90년대 본격적으로 나타난 대안영상, 비디오 액티비즘의 장이 되어왔다. ‘탈경계’라는 색으로 비주류의 이야기-여성주의, 소수자, 장애인 등-와 표현방식을 소개해왔다. 그리고 네마프는 10년의 꾸준한 행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고 그 방향성을 재고하고 있었다.

발제자는 마지막으로 네마프가 영향력 있는 독자적 영역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전복적
전략’의 필요성을 제안했다. 이에 대해 토론자들은 액티비즘으로 존재했던 기존의 방식을 대안적 ‘페스티벌’로 커뮤니케이션 해야 한다거나(유비호 작가), 정체성 그리고 네마프를 통한 작가들의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했고(김경묵 감독), 앞으로의 또 다른 10년을 위한 자기 위치의 재정립의 필요성(양지윤 큐레이터)등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했다.

발제와 토론을 거치며 네마프는 약간 자기비판을 거듭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은 이러한 열린 토론과 모색이 바로 그 ‘전복적 전략’의 실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영화계의 무관심 속에서 페스티벌이 치러져왔다고 했는데 아이공을 메운 관객들의 진지한 눈빛에서 나는 오히려 희망을 보고 돌아왔다. 그리고 내년의 네마프가 보여줄 다른 모습이 무엇일지 벌써부터 궁금해졌다.





제 10회 서울 국제 뉴미디어 페스티벌
2010
0805-0814
http://www.nemaf.net/

 

 필자소개

허김지숙

한 줄 썼다 두 줄 지우는 소설가 지망생.

자유롭게 살겠다고 몇 년째 밤에만 일하는 올빼미 인생.

지식채널E만 보면 분노와 눈물로 5분간 롤러코스터를 타는 과잉감정증후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