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쌀롱드싸튀 <보트하우스>-사랑의 현실


쌀롱드싸튀 <보트하우스>

사랑의 현실
글_조원석




그림이든, 문학이든, 연극이든, 영화든 예술 작품은 나에겐 하나의 화두다. 화두는 단어들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단어들을 통해 세상을 해부하는 것이 리뷰를 쓰는 고통이고 즐거움이다.

쌀롱 드 싸튀의 ‘보트하우스’도 일종의 해부 도구라고 할 수 있다. 해부 도구는 날카로울 수록 좋다. 간혹 둔한 해부 도구를 만나면 그만큼 세상을 해부하기가 힘들다.


다행이다. ‘보트하우스’는 날카로운 축에 속한다. 도구에 해당하는 단어들은 ‘상처’, ‘사랑’이다.





이 연극은 미국으로 망명한 유태인계 독일인 회계사 매트와 공장주의 딸로 공주처럼 살아온 간호사 샐리의 사랑 이야기다. 이 두 사람의 신분은 이 연극의 시대 배경을 드러내는 역할 뿐만 아니라 이 둘 앞에 펼쳐질 사랑의 모습도 암시 하고 있다.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독일에 의해서 죽고, 누나는 프랑스의 고문으로 죽은 매트는 삼촌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하지만 유대계 독일인인 매트는 미국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 유대계 독일인이라는 신분이 얘기하듯이 그 어느 쪽에도 속할 수 없는 매트는 미국이라는 자본주의국가에 뿌리내리기 위해 회계사라는 직업을 선택한다. 하지만 회계사라는 직업은 뿌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매트는 알고 있다. 그래서 매트는 더 이상 자손을 낳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숫자와 논리를 좋아하는 지독히 이성적인 매트는 역설적이게도 천사를 믿는다. 신분의 양면성처럼 논리와 비논리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매트에게 사랑은 천사와 같다. 천사 같은 사랑을 원하는 매트에게 사랑은 이미 지상의 것이 아니다.


공장주의 딸로 태어난 샐리는 공주처럼 자란다. 공주들이 이웃 왕자와 결혼하듯이 또 다른 공장주의 아들과 거래에 가까운 약혼을 하지만 대공황을 겪으면서 집안은 몰락하고, 샐리는 열병을 앓고 나서 아기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된다. 전쟁 덕분에 공장은 다시 일어설 수 있었지만 샐리는 파혼을 당한다. 아기를 낳을 수 없다는 것은 더 이상 혈연의 뿌리를 뻗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즉 샐리 또한 사랑은 더 이상 지상의 것이 아니다.



1944년 7월 4일 . 미국의 독립기념일. 미국 미주리주 레바논의 어느 보트하우스에서 매트와 샐리는 만난다. 연극의 도입부에서 매트는 관객과 대화를 한다. 이 연극은 낭만적인 연극이며, 관객의 상상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연극이라고 말한다. 보트하우스 밑으로 흐르는 강물을 상상하고, 강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밴드의 음악을 상상하고, 뒤편으로 펼쳐져 있는 숲을 상상하라고 한다. 참신한 도입이라고 하지는 않겠다. 중요한 것은 이런 도입이 이 연극에서 왜 필요한가이다. 사랑 역시 상상이 필요한 걸까? 아니면 연극은 관객의 상상으로 완성된다는 걸까? 아무튼 이런 상상을 하면서 연극을 더 보자.






매트와 샐리는 아직 서로의 상처를 모른다. 그래서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티격태격 자신의 입장만을 내세운다. 하지만 서서히 서로의 상처를 들춰내고 상처를 알아가면서 껍질은 벗겨지고 서로를 이해하는 마음이 생겼다.



상처를 서로 알기 전에도 이 둘은 서로 사랑했었다. 한 눈에 반한 그런 사랑이었다. 이런 사랑은 가족의 반대라는 이유만으로도 쉽게 버릴 수 있는 사랑이었다. (샐리는 매트가 집에 찾아오는 것을 싫어하고, 집에 찾아오는 매트 때문에 자신이 곤란한 처지에 빠졌다고 화를 낸다). 그리고 한 눈에 반한 사랑은 때로는 집요한 행동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매트는 샐리의 병원으로 찾아가고, 집으로 찾아가면서 샐리를 곤란한 처지에 빠져들게도 하지만 자신의 그런 행동이 샐리에게 어떤 고통을 주는지 모른다. 오직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하다.) 이 둘은 처음에는 한 눈에 반한 그런 사랑을 했지만, 서로를 공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로의 상처를 알게 되면서 이 둘의 사랑도 변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상처는 단순히 감정의 아픈 기억들이 아니다. 어느 곳에도 뿌리를 내릴 수 없는 매트와 더 이상 혈연의 뿌리를 내릴 수 없는 몸을 가진 샐리의 상처는 현재 진행형이며 앞으로도 계속 진행되는 상처다. 이들의 사랑은 상처를 이해하는 것을 넘어 상처를 공유하는 사랑이며, 약속이다. ( 이들은 보트 위에서 사랑을 고백하고 있다. 아마도 이들이 가진 상처를 물 위에 떠 있는 보트에 비유하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른다. 단지 두 사람만 탈 수 있는 작은 보트, 그리고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흘러갈 존재들.)






사랑이 약속이라는 것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결혼식에서 사랑의 서약을 하는 경우를 본다면 적어도 결혼을 한 사람들은 사랑의 맹세를 한 번은 한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랑을 고백할 때 맹세를 하는 것은 그 만큼 사랑하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며, 현재 느끼는 사랑의 감정이 오래 가지 않는다는 것을 옛 사람들도 알고 있었다는 증거다. 사랑할 때 사랑하는 감정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상처가 개인의 어둠이라면 전쟁은 인류의 어둠이다. 전쟁은 서로에게 상처를 입혔고, 이 상처를 공유하고 있다. 이 상처를 서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매트가 믿었던 천사의 사랑이 필요할 지도 모르겠다. (천사의 사랑은 별것 아니다. 그냥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사랑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다. )



도입부에서 관객의 상상을 요구하면서 연극을 소개한 이유 역시 이 연극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 달라는 것일 수도 있겠다. 결코 사랑은 쉬운 것이 아니니까.





공연정보

2010 서울프린지페스티벌 참가작
쌀롱 드 싸튀 <보트하우스>


2010.8.12-13
성미산 마을극장

작품줄거리
1944년 7월 4일.
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의 독립기념일.
미국 미주리주 레바논의 어느 부유한 집안 영지에 딸린 오래된 보트하우스.
지난 전쟁에서 온 가족을 잃고 어린 시절 미국으로 망명한 마흔 두살의 유태인 회계사 매트와 순수했던 시절, 거래와도 같았던 사랑에 좌절한 거대 군복공장주의 딸, 서른 한살의 간호사 샐리.
서로를 사랑하고 있음에도 자신들을 가두어왔던 깊은 상처로 인해 서로를 받아들이기를 겁내하던 두사람.. 그런 그들이 먼 길을 돌아 어느 달밤, 아무도 찾지 않는 숲 속의 버려진 보트하우스에서 만나,
자신들을 가두어왔던 그 상처를 태어나 처음으로 서로에게 드러내고 마침내, 사랑을 이뤄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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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조원석은 서울 271번 버스 승객, 진로 마켓 손님, 이 현수의 남편. 상추를 키우는 정원사. 구피 열아홉마리를 키우는 어부. 도장 자격증이 있는 페인트공. 시나리오 '벽에 기대다'를 50만원에 팔고 남들한테 자랑하는 사람. "현실"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쓰다가 말다가 하는 게으른 사람.
그 외에도 수많은 "나"가 있어 어떻게 소개해야 할 지 모르는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