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창작공동체 그린피그'의 <의붓 기억 - 억압된 것의 귀환>


현재의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타인의 기억
'창작공동체 그린피그'의 <의붓 기억 - 억압된 것의 귀환>

글_조원석




의붓 기억이 무슨 의미일까? 의붓아버지라고 하면 재가한 어머니의 남편을 말한다. 친아버지가 아닌 의붓아버지. 홍길동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했다. 반대로 의붓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닌데 아버지라고 불러야 한다. 그렇다면 의붓 기억은 기억이 아니지만 기억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을 말한다. 자신이 직접 겪은 기억은 아니지만 자신의 기억이라고 해야 하는 기억. 이런 기억이 있기는 할까? 선뜻 다가오는 말은 아니지만 의붓 기억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이 말을 염두에 두고 연극을 따라가 보자.

 




 

본격적인 연극이 시작되기 전에 한 사람이 나와 이야기를 들려준다. 공연이 시작된 장소는 포스트 극장의 무대 밑에 있는 배우 대기실 같은 곳이다. 해설자는 성경의 마가복음에 실려 있는 한 일화를 소개한다.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와 세례자 요한에 대한 이야기다.

 

연희 중에 살로메는 헤로데 왕 앞에서 춤을 추게 된다. 그 춤이 너무나 황홀하고 아름다워서 헤로데 왕은 상으로 살로메에게 한 가지 청을 들어주겠다고 했다. 살로메는 어머니 헤로디아에게 달려가 어떤 청을 할지 묻는다. 헤로디아는 남편이 죽은 후에 남편의 형인 헤로데 왕과 결혼을 했다. 이것을 두고 세례자 요한이 폐륜이라고 비난을 하고 다닌 것을 알고 있었다. 헤로디아는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딸에게 말한다. 살로메는 헤로데 왕에게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달라고 말한다. 그리고 왕은 경비병을 시켜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게 한다.

 

성경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리고 해설자는 영감을 받았던 예술가 중에서 프란츠 폰 스툭의 그림을 보여준다.

 

그림 속에서 살로메는 춤을 추고 있고, 오른쪽 밑에 고릴라처럼 생긴 경비병이 쟁반에 요한의 머리를 들고 있다.





이 그림을 설명하면서 해설자는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요한을 죽인 자가 누구인지 묻는다. 살로메에게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시킨 헤로디아인가? 아니면 어머니의 말을 전하며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달라고 말한 살로메인지? 그도 아니면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한 헤로데 왕인지? 아니면 왕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요한의 머리를 베었던 사람인지? 묻는다.

 







한 사람이 죽었는데, 가해자가 없다. 아니면 요한이 죽는데 일조를 한 모든 사람이 가해자일 수 있다. 어쩌면 그 가해자 중에 피해자도 있을 수 있겠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을 했지만 그로 인해 죄를 범하고,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피해자.

 

해설자는 전쟁을 통해 피해자이면서 가해자가 되어버린 경우를 이야기 한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이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피해자인지, 가해자이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해자가 되는지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긴 해설이 끝나고, 해설자는 윗 층에 있는 무대로 관객을 이끈다.







윗 층에 있는 무대로 간 관객들은 관객석에 앉아 있는 배우들을 보게 된다. 관객이 배우와 배우 사이의 빈 공간에 모두 앉으면 ‘너를 마지막으로 나의 청춘은 끝이 났다.’고 노래하는 배우들의 합창으로 공연이 시작된다.

 



무대에는 옷가지들이 널려 있고, 세탁기, 그리고 커다란 상자와 침대. 그리고 마이크가 있다. 마이크를 통해 배우들이 때때로 한국전쟁의 참혹한 실상을 증언한다.


배우들은 먼저 옷을 가지고 논다. 입고 있던 옷을 벗고 다른 옷을 입는 행위를 하거나, 다른 인물이 옷을 겹쳐 있으면 한 벌의 옷만을 허용하는 무언의 손짓을 해서 결국 옷을 벗게 한다. -옷은 분명 옷이 아닌 다른 의미를 띠고 있다. 어쩌면 옷은 정체성을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정체성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확실하지는 않다. 연극은 전쟁의 증언과는 달리 구체적이지 않다.

 





그리고 옷을 하나 둘 벗기 시작하는 네 명의 배우들을 영상으로 보여준다. 이 배우들은 맨 처음 관객들이 해설자의 해설을 들었던 아래층에 있다. 그리고 이것을 찍는 영상은 실시간으로 전달되고 있다. 알몸이 된 배우들은 입고 있었던 옷에 의해 다시 꽁꽁 묶인다. -왜 옷을 벗은 걸까? 그리고 왜 벗은 옷으로 묶인 걸까? 알몸은 기억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기억을 증언하려는 알몸을 묶은 옷은 어쩌면 기억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가해자일지도 모르겠다.

 


지하에서 올라온 알몸의 사람들이 옷에 묶인 채 바닥에서 고통스런 몸짓을 한다. 그리고 옷을 입은 배우들이 일어나려고 하는 알몸의 사람들을 거칠게 쓰러뜨린다. -왜 알몸들은 일어나려고 하는 걸까? 일어나는 행위는 어쩌면 전쟁의 기억을 증언하려는 행위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옷을 입은 사람들은 그것을 막는 것일지도 모른다. 옷을 입은 사람들. 그들은 무엇인가를 감추고 싶거나 감추고 있는 사람들이다. 감추고 싶다는 것은 이들이 가해자라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 이들은 어쩌면 둘이 아니라 하나일 수도 있다. 옷을 입은 사람과 옷을 벗은 사람은 한 사람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갈등일 수도 있겠다. 가해자일 수도 있고, 피해자일 수도 있는 기억들. 그 기억들이 서로 부딪치는 갈등을 일어나는 알몸과 알몸을 다시 쓰러뜨리는 옷을 입은 사람들로 표현한 것인지도 모른다. 좀 더 생각을 확장시킨다면 한 사람은 한 민족으로 넓힐 수 있다. 한 민족 속에 가해자와 피해자로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 갈등과 분열. 이 갈등의 골이 현재에도 여전히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알몸들이 일어나 세탁기 앞으로 가서 하얀 옷을 입는다. 이들도 이제 가해자의 위치에 서게 된다. 이제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기도 하는 상황을 확연히 드러내 주는 게임을 하게 된다. 일명 러시안 룰렛이라고도 불리는 이 게임은 회전식 탄창을 가진 권총에 총알 하나를 넣고, 총알이 언제 발사 될지 모르게 탄창을 회전시킨 다음, 상대방의 머리를 서로 겨누고 동시에 방아쇠를 당기는 게임이다. 이 게임이 연극에서는 코리안 룰렛이라는 이름으로 변형되어 나타난다. 배우들은 원을 만들고, 앞 사람의 머리를 향해 권총을 겨눈다.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의 명령에 따라 방아쇠를 당기면 한 사람이 쓰러진다. 그렇게 한 사람만이 남을 때까지 게임은 계속된다. - 죽고 죽이는 이 게임에서 가해자는 누구일까? 나의 눈에는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 분명히 가해자로 보인다. 비록 시력이 좋지는 않지만 이렇게 보는 이유는 그 명령이 없다면 이 게임은 성립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얼핏 보면은 마치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기도 하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기도 하는 상황이지만 이 들 모두는 피해자다. 이들의 운명을 손에 쥐고 불합리한 명령을 내리는 붉은 옷을 입은 자야 말로 가해자이며, 이 자가 상징하는 것은 전쟁이다.

 




이제 조금은 의붓기억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의붓기억은 자신이 직접 겪은 기억은 아니지만 직접 겪은 기억처럼 현재의 나에게 영향을 끼치는 타인의 기억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전쟁을 겪지 않았지만 그 전쟁의 기억이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는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전쟁은 일종의 의붓기억이다.

 

 

창작공동체 그린피그 <의붓기억- 억압된것의 귀환>
2010 서울프린지페스티벌 참여작
0817-0818
포스트극장

전쟁을 다룬 기존의 예술작품 중 많은 경우에 역사적 사건의 진정한 의미를 전달하기 보다는 정형화된 상징적 이미지를 답습함으로써 고통의 기억을 가볍게 한다. 기억을 어떻게 실체화 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희생을 상품으로써 기념하거나 일종의 세속화된 순교행위로
승화하는 오류로부터 벗어날 수 있나? 공연은 사건 그 자체와 그것을 기술하는 언어 사이의 괴리에 주목한다. 이를 벗어날 수 있는 건 증언이다. 증언은 독백이 아니라 면담자에게 구술되며, 면담자의 질문에 의해 수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증언자가 구술상황에서 과거 경험을 해석해 내면서 재생산해 내는 과정이다.
따라서 증언자의 감정상태, 유무형의 환경, 면담자의 입장 등이 개입된다. 내용의 구성 방식과 동일하게 형식을 구성한다. 각각의 작업자-연기, 음악, 영상, 미술-는 증언한다. 공연은 각각의 작업자의 기억은 개인 정신만의 자산이 아니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물질적 자산과 사회적 실천이 복합적으로 얽히는 과정이다. 구술자들의 증언과 공식적 다수의 역사로부터 작업자들은 각각의 결과물을 만들게 되고 이는 애초의 합의 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가장 능동적인 형태로 다층적인 매체 매 매체의‘대화’를 제시하게 된다. 재현이 아니라 대화의 장을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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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조원석은 서울 271번 버스 승객, 진로 마켓 손님, 이 현수의 남편. 상추를 키우는 정원사. 구피 열아홉마리를 키우는 어부. 도장 자격증이 있는 페인트공. 시나리오 '벽에 기대다'를 50만원에 팔고 남들한테 자랑하는 사람. "현실"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쓰다가 말다가 하는 게으른 사람.
그 외에도 수많은 "나"가 있어 어떻게 소개해야 할 지 모르는 "나" 


  1. 의붓기억은 저도 보았습니다.
    전쟁을 직접적으로 경험한 세대는 아니지만, 온몸의 세포로 전쟁에서의 공포감을 느낄 수 있는 공연이었요. '중요한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그들의 혼이 묻혀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는 마지막 메세지가 기억에 남네요.
    서울 변방연극제에서 이번주 주말에 또 한번 공연 계획이 있다고 하네요. 궁금하신분들은 보러 가보셔도 좋을것 같아요. http://www.mtfestival.com/2010_main/?p=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