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4. 10. 08:39ㆍ07-08' 인디언밥
한국독립애니메이션계의 무림일검 - 장형윤 감독의 작품 관람기
- 김희철
- 조회수 855 / 2007.12.20
한국독립애니메이션계의 무림일검
- 장형윤 감독의 작품 관람기
김 희 철
<무림일검의 사생활 > 장형윤|2007
장형윤 감독의 애니메이션 작업을 처음 본 것은 서울독립영화제2007의 폐막식에서였다. 그의 이름은 몇 년 전부터 들어왔지만, 그의 작품이 가진 내공을 두 눈으로 확인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의 최신작 <무림일검의 사생활>은 ‘우수 작품상’과 ‘영문자막 프린트 지원작’이라는 2관왕의 영광을 안으며 폐막작 상영의 맨 마지막을 장식했다. 함께 폐막작으로 상영된 다른 감독들의 영화들도 너무나 훌륭한 작품들이었지만, 나를 비롯한 대다수 관객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 냈던 것은 단연 <무림일검의 사생활>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정말 신나게 웃었다. 최근 몇년 동안 그렇게 폭소를 터뜨리며 영화를 봤던 기억이 가물가물한 것 같다.
프롤로그 결투 씬의 클로즈업 장면은 바로 영화의 내용으로 몰입하게 만든다. 과거 무림의 고수였던 주인공 진영영이 현세로 환생했다. 강철과 같은 몸으로 다시 태어나길 원했던 주인공의 소망이 이루어지긴 했는데, 그의 몸은 인간과 강철 기계(이 글이 스포일러가 될까봐 어떤 기계인지는 밝히지 않겠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접하는 친근한 것이다.) 상태가 수시로 변한다. 그러한 변신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일 줄 아는 여주인공 혜미와의 일상적 연애사와 종종 등장하는 검객들과의 혈투가 번갈아 등장하면서 멜로와 액션 장르를 넘나드는 재미를 느끼게 한다.
그의 작품에 홀딱 반해버린 나는 12월 8일 토요일 상암동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에서 열린 ‘해피투게더 독립영화 - 장형윤 감독 작품 상영회를 놓칠 수 없었다. 이날 상영회에서는 <무림일검의 사생활>과 더불어 그가 만들어왔던 단편 작품들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었고, 상영 후엔 1시간 넘게 관객과의 대화가 지루하지 않게 이루어졌다.
2002년작 <어쩌면 나는 장님인지도 모른다>는 바흐의 서정적인 음악이 흐르는 음울한 블루톤 화면의 작품이다. 고층건물들, 타워 크레인 등 작가가 바라보는 도시의 삭막한 풍경이 느껴진다. 하지만 감독 자신도 밝히듯이 다소 작가주의에 치우친 것 같은 애매모호한 단편이다. 이후 장감독은 ‘여러 사람들과 같이 볼 수 있는, 같이 즐거울 수 있는 걸 만들자’고 결심했고, ‘작품 속에 어떤 사상이나 생각을 넣는 것보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관객과 공유하기 위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티 타임 (Tea Time, 2002)
그래서 같은 해에 만들어진 <TEA TIME>, 2003년작 <편지>에서 장형윤표 개성이 본격적으로 표현되기 시작한다. 채색없이 선으로만 그려진 <Tea time>은 머리를 심하게 다친 소년과 안전모를 쓰고 나타난 천사 이 두 명의 캐릭터가 장소의 변화 없이 만들어내는 무언의 상황극이다. 단순하지만 아주 깔끔한 작품이었다.
편지 (The Letter, 2003)
작가 자신의 연애담이 기초가 된 <편지>에서는, 지방에 사는 여자친구와 사귀면서 느낀 거리감을 공룡이라는 캐릭터를 이용하여 표현했는데, ‘(여친과 나) 사이에서 내 진심을 집어먹어버리는 공룡같은 존재가 있는 건 아닐까?’라는 의문이 들었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빠가 필요해 (Wolf Daddy, 2005)
그의 작품들에서 간간히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웃집 토토로> 냄새가 다분히 풍기는 장면들이 나오긴 한다. <아빠가 필요해>의 소설가 늑대가 글을 쓰고 있는 집안 모습이나 시골 풍경들, 또는 <무림일검의 사생활>에서 혜미를 태우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장면 등이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형윤식 캐릭터와 코믹들은 그의 작품을 탄탄히 지탱하고 있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고, 범상치 않은 철학적 고민을 엿볼 수 있는 대목들도 자주 확인할 수 있다.
주인공인 소설가 늑대가 뿌려놓은 자식들(영회, 토끼, 거북이)와 잡아먹으려고 냉장고에 넣어둔 사슴이 어느새 새로운 가족으로 탄생하게 되는 점이라든지, 늑씨가 가끔 날리는 조용한 나레이션(‘문학이 삶보다 중요한가?’ 같은)에는 가족, 예술, 인생 등에 대한 감독의 진지한 성찰이 담겨있다.
35mm 필름, 캐릭터와 분리되지 않는 사운드 등 기술적으로도 발전된 <무림 일검의 사생활>에는 우리에게 친숙한 일상의 모습들이 많이 등장한다. 리어카, 골목길, 분식집, 옥탑방 앞 빨래줄에 널린 옷들, 김밥천국 스티커, 20kg LPG 가스통, 홍대 앞 레코드 가게, 한강변 63빌딩, 그리고 어김없이 등장하는 고층건물 타워크레인. 순식간에 우리의 일상 공간을 강호의 한복판으로 만들어 버리는 판타지를 구축하면서도 현실의 세세한 모습들을 포착하고 있는 것은 장형윤 감독 작품의 최대의 미덕이라고 생각된다.
“작품에 내가 살고 있는 서울의 풍경, 실제적 이미지를 넣고 싶었다. 기본적으로 한국 관객을 위해 작업했고, 관객들이 자신이 아는 공간이 나오면 좋아할 것 같았다. 현실에 반쯤 발을 담그고 있으면 좋겠다.” 현실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다큐 작업을 하고 있는 내 취향이 강하게 작용했겠지만, 작가가 갖고 있는 그 생각에 가장 크게 공감할 수 있었고 그가 한국독립애니메이션계의 무림일검이 될 것 같다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
따뜻하고 귀여운 영화를 계속 만들고 싶어하는 그의 작업이 기하급수적인 수의 관객들과 만나길 빌면서 졸필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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