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모티베이션 대행> - 데빌맨이여! 튀김 모티베이션이 끝나지 않아요.

2012. 4. 17. 14:58Review

 

2012 페스티벌 봄 리포트

데빌맨이여! 튀김 모티베이션이 끝나지 않아요.

네지 피진<모티베이션 대행>

글_김해진 

네지 피진 식 자기소개로 시작하기

이 글을 쓰는 저는 김해진입니다. 1979년생이고 베이비붐 세대의 자녀이고 X세대라고 불린 적이 있습니다. X세대는 기성 세대가 이해불가한 대상이란 뜻에서 붙인 이름이었죠. 신세대라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했고요. 개인주의와 탈정치적 성향이 강하고 대중문화에 심취한다는 비판을 받았고 동시에 인터넷과 휴대전화를 자유자재로 사용한 세대로 풀이되기도 했습니다. 현실의 경제난과 정치적 변동을 경험하면서 점차 사회참여적인 성향으로 바뀌었다고도 해요. ‘내가 정말 그런가?’ 대학에 입학하며 외환 위기를 경험한 세대인 것은 맞습니다. 그것이 개인에게 큰 영향을 주었음은 물론이고요. 하지만 ‘~세대’라는 명명은 금세 흐릿해졌습니다. 왜냐면 명명해야할 다음 세대가 계속해서 나타났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그보다는 아래의 풀이에 더 관심이 갑니다.

‘6‧25 전쟁 후 인구가 갑자기 폭발한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가 대거 낳은 자녀(1979~1983년생)’ 중 하나가 바로 접니다. 저를 포함한 이 자녀분들은 앞 세대보다 5년간 17만명이나 더 태어났다고 합니다. 아…… 제가 친구로 사귈 수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이러나 저러나 세대별 설명이 저를 얼마큼 대변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또 얼마큼 대변하지 않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이것이 왜 네지 피진 식의 자기소개냐고요? 2012년 페스티벌 봄에서 공연된 네지 피진의 <모티베이션 대행>에는 세 명의 배우가 등장합니다. 배우가 아니라 생활인, 직장인, 알바라고 해야 할까요. 직원이면서 배우인 사람들일까, 배우인데 직원이기도 한 사람들일까. 시덥잖은 분류인 것 같지만 사실 이 질문이 <모티베이션 대행>과 마주하는 가장 쉬운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 세 사람은 자신들을 프리터, 마츠자카세대, 포스트단카이주니어세대, 빙하기세대, 잃어버린20년 세대, 로스트제너레이션, 버블세대, 신인류, 프레셔세대라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그 세대별 명명이 개인과 결코 동떨어져 있지 않음을 몸소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또 개인이고자, 예술가이고자 고군분투하죠. 무슨 말이냐고요?

다이라 쿠다칸에서 부토 무용수로 활동해 온 네지 피진은 패밀리 마트에서 주5일 13시간씩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꾸려갑니다. 사실 그의 본명은 따로 있습니다. 하타케야마 히로유키인데요. 중요한 건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다르게 지었다는 것이죠. 그건 자신의 정체성을 둘로 나누기 위해서가 아니라 둘로 나눔으로써 보다 자신을 분명히 인식하고 싶어서일 것입니다. 의지의 표명이랄까요. 세대별 명명보다는 그런 게 더 재밌죠.

네지 피진은 국립극단 소극장 판의 까만 벽에 비친 화면을 통해 제일 처음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전 일본의 어느 패밀리 마트의 상황을 한국에 실시간으로 중계하고 관객들 반응도 그쪽으로 전달하는 야무진 형식을 혼자 상상했습니다만 그건 아니었습니다. 편의점의 구석진 곳에서 네지 피진은 자신을 소개하고 편의점 일이란 것이 누군가 못하게 되면 반드시 또 다른 누군가 해야만 하는, 또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란 걸 암시합니다. 네지 피진이 예술 활동을 할 때 반드시 누군가는 그를 대신해 일을 한다……. 그것은 곧 네지 피진이 편의점에서 온전히 떠나있지 않다는(못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는 화면이 꺼진 후 무대로 걸어나옵니다. 네지 피진 말고도 두 명이 더 등장하는데요. 마치 건조한 초상화를 연출하는 것처럼 밋밋하게 서서 말하곤 합니다. 큰 움직임도 없고요. 이들은 관객을 향해 말하기도 하고 배우들끼리 서로 대화하기도 합니다. 자신들의 개인사가 담긴 사적인 내용입니다. 통역하는 목소리가 들리기도 했는데 의외로 그 목소리가 강렬했습니다. 아마 눈에 보이는 것들은 별로 없는 상황이라 이해가 가능한 소리에 더 집중하게 되어서 그럴 겁니다. 번역된 내용이 벽에 투사되기도 합니다. 관객들은 그러니까 보고 듣고 읽는 과정을 스스로 편집하듯이 수행해야 합니다. 드라마틱하지 않습니다. 보통 기대하는 기승전결이 있지 않습니다. 잘생긴 외모를 보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화려한 스펙타클도 없습니다. 평범한 의상입니다. 고전이 아니고 부토도 현대무용도 아니고 우리가 보통 말하는 창작극의 형태도 아닙니다. 페스티벌 봄에서는 ‘다큐멘터리 무용’이라고 소개하는데 ‘아무려면 어때’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단 하나, 극이 되려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욕망’을 감지했습니다. 물론 다른 방식의 욕망이지만요. 그것은 냄새와 관계가 있습니다.

 

튀김 모티베이션은 끝나지 않는다

튀김입니다. 전기로 가열되는 튀김기가 무대 왼편의 바닥에 놓여 있습니다. 잘 보이게 하려고 특별히 높은 데 둔 것도 아닌데 까맣고 빈 무대에 덩그러니 튀김기가 놓여 있으니 그냥 잘 보입니다. 처음에는 닭튀김이었어요. 무대 위의 세 명은 말을 하다가도 튀김기의 버저가 울리면 곧바로 튀김기에게로 다가가 다 튀겨진 조각들을 스테인리스 네모 쟁반에 옮겨 담습니다. 또 새로운 튀김을 넣어두고요. 이 행동은 공연이 진행되는 내내 꾸준히 이어집니다. 나중에는 감자튀김이었어요. 보고 있으려니까 먹고 싶더라고요. 그런데 감자튀김의 경우는 별로 사가는 사람이 없대요. 팔리지 않고 눅눅해지면 결국 버려야 한다는 거예요. 튀기고 버리는 행위를 종일 반복한다는 거죠. 그래도 그들은 튀김을 만들어야 합니다. 왜?

패밀리 마트에서 공연을 위해 자리를 비우면 누군가 대신 그 자리를 채워 일해야 한다고 했잖아요? 그와 같은 상황을 공연과 중첩시키려고 ‘튀기는 행위’를 무대로 옮겨온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계속 보고 있자니 그보다는 습관처럼 몸에 밴 구체적인 노동 행위가 이들을 장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몸과 함께 습관까지도 한국에 가져온 것입니다. 몸과 습관. 그것은 떼어지지 않는 것이죠. 뗀다면 억지스럽고요. 저는 이러한 형편을 ‘튀김 모티베이션’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끊임없이 누군가는 튀김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현실. 그것은 사람의 욕망이 아니라 튀김 자체의 욕망이자 속성입니다. 튀김은 패밀리 마트의 시스템 안에서 계속 튀겨지고 싶어한다고 저는 상상합니다. <모티베이션 대행>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욕망은 바로 튀겨지는 것입니다. 연기를 하고자 하는 사람보다도, 어머니의 자살을 극복하고 삶을 이어나가는 사람보다도 튀김의 욕망은 강력합니다. 왜냐면 간단하고 분명하니까요.

네지 피진은 연습실에서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보내는 편의점에서의 행위와 목소리를 공연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죠. 감자튀김을 용기에 담아 진열할 때는 가장 긴 놈을 가운데 꽂아 ‘Fuck You'의 형상으로 만들어 놓는다는데 노동과 소외의 현장에서 드러난 이들의 창작(?)이 관객들을 웃게 합니다. 그런데 그거, 어떤 웃음인가요.

이들은 또 스탠드 마이크에 대고 말하는 다른 사람의 ‘먹는다, 먹인다, 선다’ 등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데요. 예를 들어 ‘튀김을 먹는다.’라고 하면 나머지 두 사람은 바로 튀김을 먹는 거죠. 모티베이션 대행 놀이라 할 만 해요. 돌아가며 서로에게 질문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보였습니다. 숨은 동기를 일깨운다고나 할까요. 특히 네지 피진이 편의점 동료에게 ‘지금 이 일(편의점 일 말고 공연 일)에 책임감을 느껴야 하지 않겠냐’고 했던 질문이 기억에 남습니다. 책임감이라……. 공연에 대한 책임은 편의점 일에 대한 책임과 무엇이 같고 다를까요?

튀기고 말하고 질문하며 공연하다가 마침내 이들은 토해냅니다. 편의점 대사를요. ‘이랏샤이마세~(어서오세요)’ 등의 대사입니다. 마치 연극대사를 연습하는 것처럼 세 명이 호흡을 맞춰 편의점에서처럼 인사합니다. 방금 전까지 다소 지루해하며 졸기 직전까지 갔던 저는 큰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묘한 폭발의 순간을 경험합니다. 울컥합니다. 슬퍼요. 삶의 대사가 어떤 현실에 묶여있는지 바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지루해하다가 울컥하는 것도 참 이상한 일인데.

이런 저의 대사는 무엇일까요. 당신의 대사는 무엇입니까.

“데빌맨이여!”

네지 피진이 손가락을 쫙 펴 우스꽝스럽게 내밀면서 네 다섯줄 쯤 되는 연극 대사를 외우고 있습니다. 곁에서 단발머리의 마요 씨가 좀 다르게 해보라고, 그저 앞의 사람들에게 말하듯이 해보라고 몇 가지 주문을 합니다. 마요 씨는 더 나아졌다고 하지만 저는 그 차이를 잘 모르겠더라고요. 현실과 교직된 <모티베이션 대행>은 공연의 내용과 형식도 낯설지만 제 자신의 수용의 태도 또한 낯설게 느끼게 합니다. 관객은 무얼 보길 기대할까요. 배우들은 무엇을 연기하길 바랄까요. 결국 극장의 모티베이션은 무엇일까요. ‘데빌맨이여!’라는 대사는 분명 재밌고 웃겼는데 이상하게 집에 돌아와서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데빌맨은 없으니까요. 데빌맨을 재현한 연극이 아니니까요. 없는 데빌맨을 부르는 네지 피진의 어정쩡한 모습을 보여주는 공연이니까요. <모티베이션 대행>이 유머러스하면서도 슬펐던 이유입니다.

이 공연을요. 자본에 잠식당한, 끊임없는 기계적 노동에 물든 육체가 예술을 통해 주체성을 되찾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아니요. 그 주체성은 어쩌면 우리 삶이 욕망하는 최소한일 수도 있단 생각이 듭니다. 최소한이라……. 그렇다면 나는 최대한 어떤 삶을 바라는 걸까. 오랜 시간 서서 일해 다리뼈가 휜 네지 피진을 보면서, 앉을 때나 일어설 때 그의 몸에서 뚝 뚝 소리가 나는 걸 들으면서 최소한․ 최대한을 운운하는 것은 어쩌면 안일하고 순진한 생각일지도 모르겠어요.

극장에서 나와 굳이 파파이스에서 닭튀김을 먹었습니다. 누군가 튀김기에 넣었다가 건졌을 그것을 와그작 와그작 씹으면서 ‘나의 욕구는 누군가가 혹은 무언가가 대행할 수 있는 것일까?’ 생각했습니다. 아니요. 실은 아무도 아무것도 대행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베이비붐 세대의 자녀수가 아무리 많아도 내 욕구는 대행할 수 없는 나의 것이라고 저는 속으로 대사를 외웠습니다.

 

 

***사진출처

1.2.3.4.5. 네지피진 페이스북 http://www.facebook.com/pijinneji 

 Copyright: Ujin Matsuo

 

 

<모티베이션 대행>에 대하여

프리터_일본에서 정사원 이외의 근로형태(아르바이트, 파트타임 등)로 생계를 꾸리는 사람을 이르는 말. 일본식 조어로 프리랜스 아르바이터의 줄임말이다. 프리 아르바이터라고도 한다.

마츠자카세대_1980년생의 메이저리거 마츠자카 다이스케의 이름에서 유래. 다른 분야에서도 이 세대의 우수한 인재가 다수 배출되었다는 의미로 언론이 붙인 이름.

포스트단카이주니어세대_전후 경제성장과 함께 인생을 보낸 세대가 ‘단카이 세대’이며, 그 자녀들을 ‘단카이 주니어’로 부른다. ‘포스트단카이주니어 세대’는 그 후 1975년에서 1982년 사이 8년간 태어난 세대.

빙하기세대_거품경제가 붕괴된 후 취업난 시기에 구직활동을 해야 했던 세대.

잃어버린20년 세대_주로 일본의 거품경제 이후 1990년대부터 2010년경까지 약 20년 이상 이어진 경제불황기를 ‘잃어버린 20년’이라고 부르며, 이 시기에 태어나 자란 세대를 잃어버린20년 세대로 지칭.

로스트제너레이션_학교 졸업 시기에 취업을 하지 못하고, 취업 빙하기가 끝나고도 안정된 직업을 갖기 어려운 상황에 내몰린 세대.

버블세대_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일본에서 일어난 자산(부동산, 주식 등)가격 상승을 ‘거품경제(버블경기)’라고 부르며 이 시기에 입사한 세대를 버블세대라고 지칭.

신인류_1982년부터 87년에 태어난 세대. 거품경제기에 만들어 사용된 조어로, 기존과는 다른 감성이나 가치관, 행동규범을 가진 당시의 젋은이를 지칭.

프레셔세대_유․소년기에 거품경제가 붕괴하고, 이후 경제정체기에 초․중등학교를 다닌 세대로, 압박(프레셔)을 견디며 살아갈 수 있는 세대라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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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pported by The Japan Found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