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현혹의 사회적 맥락이여: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를> - 질문을 던지는 연극

2012. 4. 18. 01:38Review

 

2012 페스티벌 봄 리포트

질문을 던지는 연극

르네 플레쉬의 <현혹의 사회적 맥락이여: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를>

글_전강희

 

 현혹의 사회적 맥락이여: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를. 독일의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르네 폴레쉬의 작품이다. ‘현혹의 사회적 맥락’이라는 말이 작품의 지적인 무게감을 고스란히 전달해준다. 그리고 동시에 ‘현혹’, ‘눈동자’라는 단어에서 관능미도 풍긴다. 정신적인 면과 육체적인 면 모두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제목이다. 뭔가 마음을 풀 여지를 주지 않는다. 나는 긴장감을 유지한 채로 무대를 바라보며 극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무대 양쪽에는 자막을 읽을 수 있는 대형 스크린이 두 대 설치되어 있다. 그 위로 공연이 시작되기 전부터 “연극은 우리 삶의 진지한 그림자가 아닙니다.”라는 범상치 않은 문구가 떠오른다. 학창시절 수업 시작하기 전에 학습 목표에 제시된 명제처럼 모두의 시선을 잡아끈다. 렉처 씨어터라더니 예습이라도 시키는 것일까? 문구와는 반대로 진지하게 수업에 임할 각오를 다지고 있는데, 하얀 커튼 뒤에서 누군가의 움직임이 감지된다. 이 공연의 주인공 파비안 힌리히스이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커튼을 툭툭 치며 뒤쪽 무대에서 활기차게 뛰어다닌다. 커튼 뒤에서 그가 만들어내는 작은 소리와 움직임은 숨겨진 큰 공간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무언가 있다는 또 다른 기대감을 품게 만든다. 하지만 커튼이 올라가고 관객이 마주하는 것은 텅 비어있는 어두운 공간뿐이다.

텅 빈 공간에서 파비안은 정형화되지 않은 행동을 이것저것 해본다. 파비안의 말과 행동은 관객의 기대치, 예상치를 벗어난다. 그의 모든 것이 즉흥적인 것으로 보인다. 즉흥에 맞게 나 역시 편안한 마음으로 바라보기만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가 쏟아 내는 말들이 나를 극 속으로 몰아넣는다. 셰익스피어, 헤밍웨이, 카프카, ... 이름 모를 시인의 시가 튀어 나온다. 하나의 의미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눈과 귀로 끌어 모은다. 그가 쏟아내는 말은 자유로워 보이는 몸의 움직임과는 다른 정교함이 있다. 말과 몸, 이 두 세계가 충돌을 일으킨다.

 

그는 관객의 이를 닦아주려고 칫솔에 치약을 묻혀 다가가는가 하면, 이 악기 저 악기를 두들겨 보기도 한다. 뭔가 거창한 것을 하려나 하는 찰나에 연주하는 것을 그만둔다. 이런 행동이 계속 반복된다. 그러다 ‘탤런트’를 관객과 함께 외치며 무대와 객석을 하나로 만든다. 관객들은 이것만으로도 신기해하고 재미있어 한다. 그런데 상황이 갑자기 달라진다. 파비안은 관객들에게서 유쾌한 호응을 이끌어내 놓고서는, 공연을 통해 상호능동적인(interactive) 것을 기대하지 말라는 말을 꺼낸다. 무엇을 하든 무대와 객석의 능동적인 교감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상호수동적(interpassive)이 되는 것이 차라리 났다는 설명을 이어간다. 예술과 교감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는 말을 던진다. 관객의 웃음은 무대와의 상호 교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무대가 보여준 환영(illusion)에 빠져들어 유발된 것뿐이다. 이처럼 환영만을 보여주는 연극은 우리 삶의 진지한 그림자가 될 수 없다. 우리가 예술에게, 연극에게 테러당하고 있음을 알고 쉽게 현혹되지 말라고 역설한다.

그는 1971년 브레튼 우즈 체계가 무너진 이후로 우리 사회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걸었다고 말한다. 그 이후 우리의 금전적 가치는 금이 아닌 종이돈이 결정하게 되었다. 그가 내던지는 책처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상징이 우리를 지배한다. 인간이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책 속의 활자로 환원되었다. 연극 무대도 마찬가지이다. 파비안은, 르네 폴레쉬는 이것에서 벗어나라고 말한다.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것들에게서 현혹되지 말라고 한다. 상호능동적인 공연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내려오는 무대위의 모든 관습적인 것들을 깨야한다고 역설한다. 방법론으로 그가 채택하는 것은 배우의 몸을 보여주는 것이다. 피부의 생생함을 강조함으로써 기존 연극의 모방적인 재현에서 억눌려 있던 몸의 현존을 보여준다. 자신의 몸에 스프레이를 뿌리고, 어머니 시신의 차가운 팔과 생명이 넘쳐나는 자신의 팔을 비교하며, 눈이 아닌 자신이 직접 느끼라 이야기한다. 연극처럼 남이 보여주는 것을 통해서, 가만히 앉아서 다른 이와 상호작용하려는 생각을 버리라고 이야기 한다.

관습적이지 않은 몸의 사용은 관객들 각각에게 상이한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단수인 배우의 몸이 복수로서 관객에게 다가간다. 관객은 한 덩어리의 단체가 아닌 하나하나의 개인이다. 과연 이 시대에 맞는 공동체의 개념이다. 폴레쉬는 이 점을 깨닫는 것이 상호능동적인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의 공연은 연극자체에 대한 도발이다. 연극에서도 사회에서도 더 이상 환상을 보여주지 말자, 환상이 허구라는 것을 드러내자, 있는 그대로 관객들에게 보여 주자. 이 점이 그가 공연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나는 폴레쉬의 이런 생각에 동의한다. 하지만 ‘동의’라는 표현을 쓰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했다. 부정문과 의문문의 홍수 속에서 그가 정말 전달하고자 하는 것의 정수를 뽑아내기에는 내가 좀 쉬어야 했다. 그리고 또 그가 말하는 것이 이론가들, 철학자들이 말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남과는 조금 다른 말장난으로 나를 현혹시키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보아야 했다. 관념적인 대사와 파비안의 몸으로 그가 나를 현혹시키고 있는 것인지, 나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따져보아야 했다. 여전히 아니라는 대답을 하기에는 그날의 느낌이 생생하다. 하지만 내가 지쳐 떨어질 때까지 연극에 대해서 고민해 보게 만들었기 때문에, 르네 폴레쉬는 목표한 바를 완수한 것 같다. 나는 이 공연을 질문을 던지는 연극이라고 명명하겠다. 관객이 관객에게 스스로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연극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필자_winnie

   소개_읽고, 보고, 쓸 수 있어 기쁩니다(^^) 

 

 

르네 폴레슈
현혹의 사회적 맥락이여,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
René Pollesch
Here's Looking at You, Social Context of Delusion!

2002년 독일 최고의 연극인으로 선정된 연출가 르네 폴레슈의 열정적인 텍스트를 독일 최고의 배우로 평가받는 파비안 힌리히스(Fabian Hinrichs)가 무대화한다. 무대를 좁게 만드는 힌리히스의 정열과 지혜, 괴성과 궤변은 강렬한 에너지로 관객을 휘감으며 재현을 넘어서는 독특한 연극 언어를 설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