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밥 4월 레터] 청춘(靑春)에게 보내는 시(時)

2012. 4. 9. 10:40Letter

 

청춘(靑春)에게 보내는 시(時)

 

 

김광석은 내가 5집을 미친 듯이 손꼽아 기다리던 겨울에 그만 죽어버렸다. 그해에 나는 대학을 졸업했다. 학업 성적이 우스웠으므로 취직 따위는 애당초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렇지 않더라도 이렇게 청춘이 끝나버릴 수는 없는 일이라고 우겨야 할 참이었다. 무슨 까닭인지 그해 겨울에 나는 김광석이 다음 앨범에서는 모던 포크로 완전히 복귀할 것이라고 떠들고 다녔다. 무슨 마음으로 그렇게 떠들었을까? 내 젊음에서 김광석의 노래를 빼고 나면 그 끝을 알 수 없는 침묵만 남을 테니까. 그런 김광석이, 술에 취해서, 그것도 집에서 목을 맸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울어버렸다. 외로운 그 어느 집 한쪽 구석에서 내 청춘도 그렇게 목을 맨 듯한 느낌이었다.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中에서)

그리고 작가는 이어서 썼습니다. “그러나 청춘은 생각보다 오래갔다”고. 청춘(靑春). 그것은 ‘만물이 푸른 봄’을 빗대어, 파릇파릇한 인생의 젊은 날을 가리키는 말이지요.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닌, 봄처럼 짧은 나날들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연극 전공 학생들의 학교 레퍼토리 공연 보는 것을 무척 좋아합니다. 그 중 서울예대 학생들은 매 학기 담당 교수들의 기존 작품을 거의 똑같이 무대에 올리곤 하는데요, 사실 그 경우에는 성인 단원들이 공연했던 기존 작품과의 차이가 응당 ‘학생 배우들의 연기’에서밖에 찾아질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눈여겨보거나 판단할 만한 유일한 요소가 ‘연기’라는 것인데, (사실 어느 정도 틀에 갇힌 성인 배우들보다 학생들의 연기가 훨씬 뛰어날 때도 많거니와, 그게 아니라 해도) 그 유일한 요소에 대해 한없이 관대해지게 만드는 불가사의한 힘이 학생 공연에는 있는 것 같습니다. 조금 서툴러도, 미숙해도,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젊음’은 이미 우리 가슴을 울리고도 남기 때문입니다. 가령 <기발한 자살(살자) 여행>이라는 뮤지컬에서는 함께 죽기 위해 백두산까지 떠났던 이들이 돌발적인 사건들을 만나 죽음을 유예하다가 결국 “끝까지 가리라, 삶의 여행”이라 노래하며 찬란하게 각자의 길로 되돌아갑니다. 또 연극 <왜 두 번 심청이는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가>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한 수많은 심청이들이 끝내 무대를 물들이며 색색깔의 치마폭을 뒤집어쓰고, 이때 무대 뒤에서는 홀연 심수봉의 ‘백만송이 장미’가 흘러나옵니다. “먼 옛날 어느 별에서, 내가 세상에 나올 때...” 청춘이 아니었다면, 그토록 절절한 갈채를 바치지 못했을 여행. 청춘이 아니었다면, 마음을 울리지 못했을 노래.

며칠 전에는 젊은 피아니스트 김선욱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연주회에 다녀왔습니다. 무려 2년 동안 8번에 걸쳐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32곡 전곡을 연주하겠다는 거대한 프로젝트의 첫걸음이었죠. 청년 피아니스트는 뜨거운 박수를 받으며 무대로 걸어 나옵니다. 그리고 피아노 앞에 앉자마자, 그러니까 박수가 채 사그라지기도 전에, 조명이 채 꺼지기도 전에, 심호흡 한 번 없이 소나타 1번을 연주하기 시작합니다. 대담함이란 말로도 자신감이란 말로도 부족합니다. 투명하고 경쾌하게, 때로는 한없이 구슬프게, 의뭉스럽게, 건반을 지나가는 그 손의 거침없음이라 할까요. 어쨌든 가슴을 울리는 그 어떤 힘에 압도되어, 저는 그저 젊은 그의 손길을 의지해 음악에 저를 던지고 말았습니다. 청춘의 만개함이 관객들로 하여금 그 순간 그의 예술을 오롯이 신뢰하도록 만들어주었던 거지요. 청춘이 아니었다면, 함부로 몸을 맡겨 따라가지 않았을, 건반 위의 춤추는 손가락들.

한편 청춘(靑春)의 ‘푸름(blue)’이 ‘우울(gloomy)’로 화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커다란 꽃송이의 형태 그대로 낙하하여 금세 누렇게 바래버리는 목련꽃처럼, 생을 견디지 못한 수많은 젊음들이 못다 핀 채 떨어져 지곤 하지요. 그런 후에는 너무 빨리 잊혀지기도 하고요. 그렇게 어떤 이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어떤 이는 병으로 요절했으며, 어떤 이는 굶어서 죽었다라는 무자비한 오해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이에게는 예술보다 삶이 절실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와 같은 삶의 절박함이 그를 예술로 인도해주기도 하며, 어떤 이는 그 예술로부터 다시 버림을 받기도 하고, 누군가는 그래도 그 짧은 봄날, 푸르게 행복합니다. 청춘이 아니라면, 감히 얼굴을 마주해 대면하지 못했을, 절망.

얼마 전 대학 은사님을 뵈었는데, 어느 날 음대 학생 한 명이 수업 후에 찾아와 물었다고 합니다. 자신은 피아노가 전공인데, 기존의 음악을 따라서 연주하는 것이 전부인 (이제까지의, 그리고 앞으로의) 삶에 대해 덧없음이 밀려오니 어찌 하면 좋겠느냐고. 이에 대한 선생님의 답변은 지극히 현실적이었습니다. “90퍼센트의 사람들이 모두 학생과 같다. 그러니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계속 그 길을 가든지 아니면 미련 없이 다른 길을 모색하여라.” 그리고 그 학생은 만족하여 돌아섰다 들었습니다. 저는 그의 만족감에 대해 애잔함이 밀려왔고요. 무릇 수긍이라는 것은 마음 편한 처사이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지 않겠습니까. 선생님 역시 돌아서는 학생에게 이렇게 덧붙이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젊고 행복하다는 증거이다.” 그렇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청춘의 증거이지요. 예컨대 김광석이 목을 맸다는 소식에 울음을 터뜨릴 수 있는 것은 청춘이 함께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청춘이 아직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청춘이 살아 같이 울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도리어 언젠가 모든 고민이 사라지는 것이야말로 청춘이 다한 증거가 되겠지요. 우울과 절망이 수그러드는 것은 봄이 떠난 것입니다. 수긍과 체념만이 남는 것은 봄이 떠난 것입니다. 젊은 예술가의 담대함도, 파릇파릇함도, 함께 사라지고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꽃핌도 꽃짐도 모두 지나가버리기 전에, 우리는 여기 봄에 남아있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소설가가 인정했듯 청춘은 “생각보다 오래갈” 테니, 절망 속에서든 설레는 기쁨 속에서든, “살아있으라, 누구든 살아있으라(기형도, 비가2 中에서)”고 말입니다.

 

2012년 4월

독립예술웹진 인디언밥 편집위원

지혜로운 늑대의 전사

 

사진 = iamjungmin, baumbaumgarten

글_지혜로운 늑대의 전사

인디언 사회 초년생. 공연 보는 미학도. 야구보다 가슴뛰는 연극을 고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