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실험을 통해 진화하는 안은미의 빅보이들<김혜경 김기범 정완영>

2013. 2. 3. 22:21Review

 

실험을 통해 진화하는 안은미의 빅보이들

신진 안무가들에게 박수를!

<김혜경 김기범 정완영>

 

글_정진삼

 

 

1.

2013년, 공연예술의 실험은 6한1온의 강추위를 뚫고 - 봄의 축제보다도 먼저 - 두산아트랩에서 시작을 알린다. 두산아트센터의 상주단체 안은미 컴퍼니의 신진 안무가들의 연출무대. 입장료가 따로 없는 이 공연은 이익창출이 아니라 이익배분의 장이되길 바라는 선배예술가의 바람이 담겨있다. 어쩌면 이들은 선택된 자라는 점에서 무서운 아이들이며, 운좋은 아이들이다. ( ‘아이’ 라는 표현이 무례일지도 모르나 ‘빅보이’ 의 의미로 받아주시길)

로비에서부터 화려한 복장으로 관객맞이를 하는 스승의 존재감이 두드러진다. 관객석이 다 찰 무렵, 무대로 나온 안은미의 멘트가 이어진다. 그 말의 멋짐도 그러하거니와 후배들을 아끼는 마음씨가 진솔하여 그 멘트를 그대로 싣고자 한다.  

“안무자라는 이름으로 처음 무대를 서는 자리구요. 두산아트랩이라는 프로그램은 사실 1월달에 공연이 없잖아요. 그 비성수기를 이용해서 젊은 신진안무가나 작가들의 (연출가의) 실험실을 연 거에요. 무료공연이에요. 완성된 작품을 할수 있게 기회를 줄수 있는 장이지요. 저희가 거기 껴서 절호의 찬스를 갖게 된 거죠.(웃음) 한가지 부탁드릴 것은 처음하는 거라 (이들이) 떨릴 거에요. 돈도 많이 들이고 노력도 많이 들였는데 결과라는 게 자기 마음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도 있겠죠. 여러분들이 중간중간 쳐주는 박수가 힘이 될 거에요. 근데 너무 가엾다고 치지는 마세요. 우린 괜히 치는 거 그런 거 안 좋아해요 좋으면 치세요.(웃음)”

 

2.

첫 번째 무대는 “끊임없는 자기성찰의 게임을 즐기는 무용가” 로 소개된 김혜경의 무대다. 무대 한 가운데 수십인분에 가까운 (쌀)밥상이 차려졌다. 그 위에 머리를 산발한 무용수가 등장한다. 검은색 옷과 하얀 밥이 퍽 대비된다. (그리하여 빨간색 매트, 하얀색 밥, 검은 옷의 매칭으로 연상되는 것은 음... 충무김밥?)

 

 

무대에 선 사람은 처음엔 밥알들을 발로 밟기도 하고, 손으로 짓이기기도 하며 자신의 중력으로 가뿐히 뭉게버린다. 밥풀의 관점에서 보면 이들은 안무자의 머리와 옷에 엉겨붙어 떨어질 생각을 않는다. 그런데 이러한 움직임이 당최 안무라기 보단, 아이가 벌이는 밥장난 같다. 이쯤되면 관객들은 "먹을 것 갖고 장난치면 되겠는가?" 하는 어른의 말씀이 환청처럼 떠오른다. 허나 놀이라 하기엔 점점 고통이 가중되는 양상이다. 하는이도 그러하지만 보는이도 인내심이 필요하다. 저 끈끈이 주걱같은 밥지옥에서 무용수는 무엇을 (전)하고 있는 것일까.  

안무의 의도는 인간의 뱃속에 들어가지 못한 밥알의 슬픈 운명 그리고 덩어리가 아니라 알갱이로써 소용없는 끈끈함을 전하는 것이란다. 그리고 그러한 끈끈한 점성은 번식력으로 변한다는 것. 이러한 끈질김의 속성은 결핍된 존재를 떠올리게 한다. 게다가 인간에게 달라붙은 밥풀덩어리는 번뇌, 사념, 욕망등의 추상적 이미지들을 현시하기도 한다. 원자화된 밥풀들과 거대한 신체가 사투를 벌이는 모습은 분명 기이한 이미지로써 관객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아름다운 여성 또는 매끈한 몸이 점점 추해지는 과정 또한 목격할 수 있다. 다시, 밥풀의 관점에선 그 알갱이의 형태가 일그러지며 점점 떡이 되어 가는 것이다. 이처럼 이 작품은 벗어나려 함으로써 오히려 잡아먹히는 안무가의 동작이 춤의 전부였다고도 할 수 있겠다. 여기에 매치된 왈츠 음악은 절정구간 없이 거듭된 반복으로 관객에게 답답함을 가중시켰다. 이로써 관객과 무용수, 그리고 주요 오브제인 밥풀은 모두 함께 떡의 세계로 몰락하는 지난한  과정을 함께 겪어내야만 했다.

 

 

이 작품은 춤성이 강했다기 보다는 개념이 중심에 놓인 퍼포먼스였다. 이를테면, 최후의 순간에는 롤처럼 말리는 밥풀은 일종의 미술작품처럼 느껴졌다. (그러고 보면 인간의 입에 들어가는 것 중 물 다음으로 많은 것이 밥은 아닌가) 둘둘 말린 것은 인간이 되지 못한 존재, 비체(아브젝트)를 떠올리게 한다. 완전성을 추구하는 인간에게서 떨어져 나간 잉여의 흔적들. 우리가 의도적으로 떨쳐내려 했던 우리 자신의 일부 말이다.  

도발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춤을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가 빗나가고, 관객들은 스스로 공포스런 이미지의 일부가 된 안무가를 멍하게 바라보게 되었다. 반전 없는 반복이 살짝 아쉽기도 했지만, 밥풀이라는 친숙한 오브제가 그로테스크하게 변해가는 과정은 압권이었다. 말 그대로 밥-풀(full)은 밥/풀(pool)이 되어 밥풀(fool)로써 생을 마감했다.

 

3.

두 번째 무대는 ‘성실함으로 무장된 기이한 효율성’ 이라 명명된 김기범의 무대다. 오토바이 잔해들이 널부러져 있어 마치 사고 현장을 연상시킨다. 여기에 몸에 착 달라붙는 금색 핫팬츠 차림의 오빠(김기범)가 등장한다. 근육질의 육체를 과시하듯 아예 상의는 걸치지도 않았다. 이쯤되면 관객들은 첫번째 에피소드의 충격으로 멍해진 정신을 추스르고, 눈을 '번쩍' 뜨기 시작한다.

 

 

관객의 반짝거리는 눈길을 의식했는지, 무대에서 근육남의 품세도 잔뜩 힘이 들어갔다. 온갖 허세 동작으로 나사를 조이고, 땀을 닦고, 부품을 찾는 동작이 이어진다. 객석에선 폭소가 터졌다. 그럴수록 남자는 멋지거나 혹은 오글거리는 포즈를 선보인다.

알고보니 이 작품은 공구를 들고 오토바이를 조립해나가는 것이 전부. 춤의 핵심은 기계를 '리폼' 하는 인간의 '폼' 이다. 그의 과장된 남성성이 부담스러워질 무렵, 발 깁스에 목발을 짚은 또 한명의 오빠(정영민)가 등장한다. 입에 작업등을 물고 등장한 빨간 핫팬츠 차림의 남자는 두개의 목발을 지지대 삼아 웨이브를 추며 무대를 누빈다. 멋지다 못해 우습고, 심지어 애처롭다. 사고 잔해와 피해자의 등장으로 교통사고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하는가 싶었는데, 이게 웬걸. 허당 오빠들의 자뻑만 계속된다. 준비된 카세트 데크에서 오빠를 찾는 걸그룹의 노래가 흘러나오자 수선스런 몸짓은 한층 더 강력해진다.

마지막으로 간이 샤워를 마친 근육남은 폼 (안)나는 바이크수트를 걸치고, 조립한 오토바이를 ‘기어코’ 움직이려 한다. 대강 청테이프로 고정시킨 오토바이가 굉음을 낼 때, 관객들은 시동이 걸렸다는 기쁨보다는 불량의 덩치가 객석으로 급-돌진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끼게 된다. 인간의 허위는 결국 누군가를 해친다는 교훈을 실감하려는 찰나, 엉망의 오토바이가 무대를 빠져나간다. 그제야 뒤늦게 터져나오는 안도의 박수.

 

 

생각해보면 오토바이에 대한 사고는 대개 정비불량과 법규위반에서 기인된 것이리라. 준비 보다는 도취에 빠져 흐느적거리는 이들의 몸짓을 통해 관객들은 무법과 대충을 미덕으로 착각하는 수컷들의 심리를 이해하게 된다.

한편으로 이 작품은 사고의 비극적 최후와 악순환을 예견하고 있다. 연출가가 설정한 장면 전개는 마치 한편의 공익광고와도 비슷한데, 교통사고가 발생한 시점에서부터 시간은 거꾸로 흐르며 그 원인에 대해 하나씩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하니 목발을 짚은 오빠가 보여주는 뒤로가는 웨이브는 ‘뒤로감기’ 하는 인물의 동작처럼 느껴지고, 그리하여 최후에 맞닥뜨리는 말은 이 모든 사건의 출발이 되었던 한마디로 귀결된다. “오빠믿어”

도저히 신뢰할수 없는 오빠와 오빠의 오토바이의 실상에 대한 은유적 르포르타주. 안무가의 살아있는 경험에서 비롯된지라, 그 진행과 장면의 디테일함이 돋보였다. 믿을게, 오빠.

 

4.

세 번째 무대는 어수룩하지만 자기만의 지독한 향기를 뿜어내는 무용가(라고 소개된) 정완영의 <꽃좀비>. 시작되기 전 무대를 추스르면서 진행자들은 앞줄의 관객들에게 눈알폭탄을 나눠준다. 쓰임새가 뻔하다. 좀비가 타겟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실상 꽃- 이라는 단어는 그 대상의 외적인 아름다움을 강조할 때 쓰는 접두어가 아닌가. 꽃미남, 꽃중년, 꽃거지... 그러나 당최 꽃좀비는 무엇일까. 꽃은 또 그렇다치고... 좀비라. 문학과 영화, 그리고 대중적인 춤 분야에서 활약한 좀비는 이제 유행의 산물이 아니라 보편적 사물이 되어버린 듯 하다. 좀비들은 공포나 심령등의 초현실이 아닌, 현대 도시인의 ‘겉모습’ 을 설명하는 현실태로 자리잡은 것이다. 

오프닝 영상은 이러한 ‘인간의 좀비화’ 를 자연스럽게 스케치 한다. 다양한 좀비 인터뷰 영상이 지나가는데, 주로 이주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불안정한 학생 등 소외 계층 좀비에 대한 사연이다. 작은 모니터 화면에 담긴 영상은 어둡게 처리된 극장의 기괴한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영상이 끝나고 좀비로 분한 메인 무용수가 등장한다. 솔직히 고하면 좀비 ‘댄스’ 라는 게 대단히 흥미롭지는 않다. 음악도 크랜베리즈의 ‘좀비’ 에, 무대뒤로 투사된 영상도 좀비 영화라니. 이쯤되면 관객들도 슬슬 차고 넘치는 좀비-판의 무대에 염증을 느낄 터. 이젠 아예 무대 좌우에서 하나둘씩 좀비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50명에 달하는 좀비들이 무대를 꽉 메웠다. 그러고 보니 어딘가 모자라 보이는 좀비들은 늘 ‘과잉’ 의 상태를 추구했었다. 떼로 나타나 몰려다니고, 피를 질질 흘리고, 뭔가에 꽂히면 달려들어 물어뜯고... 좀비의 미학은 절제와 균형없는 과잉의 미학이었던 셈이다.

이들은 사이키 조명의 힘을 빌어 존재감을 획득했는데, 그 과정이 너무 노골적이어서 관객들로부터 깨알같은 웃음을 샀다. 이들은 좀비 춤에 심취했다가 비로소 제 임무를 알았다는 듯 관객들에게 다가가는데, 관객들 또한 눈알 폭탄의 용도를 기억하고는 무대를 향해 폭탄을 내던지기 시작했다. (매우 정직하게도 좀비들은 폭탄을 맞으면 다소곳이 죽어준다)  

 

 

마지막에 살아남은 좀비 한 마리. 메인 무용수였던 좀비는 신들린 듯 동시다발적으로 날아오는 눈알폭탄을 모조리 피했다. 흐느적 댄스과 각기 댄스를 섞은 그의 회피 동작은 객석으로 하여금 경탄과 탄식을 동시에 자아내게 했다.

허나 반전은 지금부터.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춤을 추던 좀비는 양 옆에서 등장한 두 명의 복면자들에게서 협공을 당하게 된다. 홀로남은 좀비의 몸을 칼로 잘라내는 퍼포먼스가 이어지는데, 이토록 방정맞고 얍삽한 칼춤은 본 적이 없다. 칼을 들고 낄낄대는 복면자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폭력을 즐기는 인간의 악한 본성을 연상시켰다. 이로써 인간은 좀비보다 훨씬 더 공포스런 존재가 된다. 어쩌면 좀비의 관점에선 인간이 더없이 교활한 존재일 것이다. 

관객들은 이제 고통받는 약자의 위치로 전락한 좀비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낸다. “울게 하소서” 음악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구원 받을 수 없는 저주받은 존재 좀비는 아름다운 최후를 맞았다. 꽃좀비여, 안녕.

 

 

5.

세 작품은 나름대로 흥미로운 전개과정을 가지고 있었다. 전체적으로는 장르융합이 가해진 댄스씨어터였고, 오브제와 몸이 만나 벌어지는 다원적 퍼포먼스였다. 오브제와 훌륭한 결합을 이뤄내는 안은미의 작품이 연상되었는데, 선택과 쓰임새는 훨씬 더 (막)나아갔다고 할수 있으리라. 이들은 공통적으로 위협과 공포라는 정서를 관객들과 공유했다. 그것은 실제로 무섭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코믹하기도 했고, 동시에 자신의 삶의 어두운 면을 밝혀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들은 괴로움과 고통이 수반되는 미래에 대한 예견이며, 추의 감각을 통해 미의식을 새롭게 정리한 작업이기도 하다. 이들의 공개된 내면은 젊은 관객들과 충분히 소통할 만 했다.

두산 아트랩의 취지는 무작정 강박적인 실험의식을 내보이며, 무난한 비평을 정도껏 성취하기 보다는 예술가의 개성이 관객들과 어떻게 만나는지, 그 즐거움이 공유될 수 있는 것인지를 실험해보는 장일 것이다. 당연하게도 취향의 확장을 꾀하는 자리이며, 세상에 없던 문제의식이 첫 모습을 드러내는 자리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기성의 실속 혹은 선배의 안정감과 스승의 완성도를 부러워하거나 흉내 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행히도 이들은 사회에 대한 거창한 메시지보다는 자기의 경험과 문제의식으로부터 작품을 발전시켰다. 작품이 예술가 개인의 필요와 요구에 응답하기 위해 만들어진다는 예술 원리를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 한편으로는 이렇게 발휘되는 예술의 상호주관성이 관객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즐겁게 하는 것이라는 명제 또한 명심하고 있었다. 빅보이의 ‘무서움’ 은 무거움이 아니라 가뿐함에서 나온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진화는 그 모체가 되는 생물보다 더 복잡한 형태를 띠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이들이 진화하여 훗날 스승보다 복잡해질 거라 생각하니, 참으로 아찔하고 두근두근 하다. 누구의 제자로 기억될지 혹은 스승을 넘어설지 아직은 모르겠지만, 모쪼록 관객들에게 영영 기억되길 바라며. 신진안무가들에게 힘찬 박수를 보낸다! 짝짝 짝짝짝.

 

***사진제공 : 두산아트센터

 

실험적이고 잠재력 있는 창작작품 발굴을 위한 Doosan Art LAB은 쇼케이스, 독회, 워크샵 등 다양한 형식으로 창작자의 새로운 시도를 지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