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만화와 과학, 그 어딘가에서의 폭발 - <사이언스코믹>

2013. 7. 10. 10:31Review



만화와 과학, 그 어딘가에서의 폭발

<사이언스코믹> 리뷰

 

_ 성지은




20136월 대한민국 서울에 하나의 신기한 만화책이 나타났다. 그 이름하야 <사이언스코믹> 또는 줄여서 <사코>. 영어로는 Science Comic이 되겠다. (홈페이지는 http://www.scomic.net) 이를 만든 사람들, 즉 강철영, 심대섭, 이승환은 자신들의 책을 사코북이라고 부른다. 다시 한 번, 영어로는 Science Comic Book이다. 왠지 멋있고 재미있는 단어는 다 들어가 있다. 과학, 만화, 그리고 책. 그렇지만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던 조합이다. 과학과 만화라니. 만화의 과학인가 과학의 만화인가? 과연 이 책의 정체는 무엇인가?!

 


▲ 사코북을  만든 사람들


1. 과학

 

거창하게도 과학, 싸이언스다. 이정헌이 <사코>의 한 글에서 설명하고 있듯이, ‘과학이란 “‘신뢰할 만한 지식이라는 의미를 함축하여 학문이라는 말과 유사하다.” 과학이라고 해서 보통 생각하듯 물리, 생물과 같은 자연과학만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오히려 그 말이 탄생한 서구에서는 ‘(분과)학문이라는 의미로 통용된다. 생각해보자. 자연과학도 과학이지만 사회과학도 과학이다. 쏘셜 싸이언스! 물론 이 때 사이언스는 좀 더 정확한 의미를 담고 있다. (역시) 이정헌이 밝히고 있듯이, 학문은 독자적인 과학적 방법론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모든 학문은 자신만의 규칙과 기본적인 공식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자연과학은 연역 또는 귀납이라는 연구 규칙을 가지고 있고, 그 중에서 물리학은 F=ma라는 절대적이며 가장 기본이 되는 공식을 가지고 있다. (에프는엠에이라는 마법의 주문은 아인슈타인 이후 쓸모없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렇지만 난 이과생이 아니기 때문에 그 진위는 알 수 없다. 다만 여기에서 기억해야 하는 것은 어떤 것도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절대적인 사실이다.) 아무런 규칙도 없어 보이는 인문학마저 엄연한 법칙을 가지고 있는 학문이다. 그 가장 단순한 규칙은 삼단논법이다. “아버지는 대머리이다. 대머리는 짠돌이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짠돌이이다.”의 세 문장으로 이루어진 이 논증은 자기 자신 안에 모든 완벽함을 갖고 있다. ‘아버지는 대머리이다그리고 대머리는 짠돌이이다라는 두 명제는 그들로부터 가능한 세계를 정해놓고 불가능한 세계와 구분짓는다.


▲ <과학만화에 임하는 자세>


그렇다면, 만화는 어떠한가? 만화도 학문인가? <사코>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만화의 과학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사코의 또 다른 이름은 만화의 과학이다.) 오늘날 만화는 하나의 독자적인 예술장르로서 인정받는다. 대학교에는 만화과 또는 애니메이션과가 설치되고, ‘만화 작법과 같은 전문 학술 서적들이 발간된다. 그렇지만 그 이름을 자세히 뜯어보면 만화과이지 만화학과는 아니다. 피아노학과가 아닌 피아노과, 조소학과가 아닌 조소과인 것처럼 말이다. 다시 말해 예술이 하나의 학문으로 인정받고 있는지 의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코>는 야심차게 만화의 과학을 이야기한다. 심지어 자신들의 작업이 바로 그것이라 이야기한다. 어찌 그러한가? (다시 한 번) 이정헌이 지적하듯이, “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한 만화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학문으로서 갖고 있는 방법론, 즉 규칙이란 “‘비 주관적인 방식의 만화 제작 기법이라는 형식을 우위에 둔 일종의 형식주의이다. 내용보다는 형식을 제일의 규칙으로 세우고 이를 따라 만들어진 <사코>, 그러므로 과학이다.

 


▲ <뭐가 잘못됐을까>



1.1 형식

이들이 만화를 만들고 있는 방식은 여러 가지이다. (자세한 것은 <사코>에 있는 심대섭의 글 만화적 사유의 즐거움을 참조하자.) 이 중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바로 강철영, 심대섭, 이승환 세 명의 작가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비주관적인 방식이다.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네 컷 만화를 그릴 때 A가 첫 번째 칸을 그리면 B가 이어서 두 번째 칸을, C가 세 번째 칸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A가 네 번째 칸을 그려서 마무리한다. ABC가 그린 그림을 조금 손 볼 수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각자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 이런 방식으로 완성된 만화는 어느 한 사람의 주관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A, B, C 세 명의 공정한 기여를 통해 만들어진 비주관적인 것이다.

이 비주관적인 방식은 곧 이들의 형식이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의 형식을 그 무엇보다도, 즉 만화의 내용이나 옆 사람의 눈치, 독자의 반응에 대한 걱정보다도 우위에 둔다. 극도의 형식주의를 보이는 예술인 것이다. 심대섭은 말한다. “거의 모든 현대 예술 장르들이 자연스럽게 결과물 중심에서 벗어나 형식, 과정, 개념에 관심을 기울여온 반면 만화는 무관심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들은 만화의 형식적 실험을 감행하고자 했다. 그럼으로써 만화의 현대 예술적 성취를 기대했다.

일반적으로 예술이라 하면 객관성이 떨어지는, 작가의 주관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한 예술의 한 장르인 만화가 주관성이 아닌 비주관성을 고집하고 지향한다는 것은 대단히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만화는 학문, 즉 과학의 영역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 <믿음>

 


2. 만화

하지만 구구절절하고 지루한 이론들보다도 중요한 사실이 있다. 이들의 작업은 바로 만화라는 점이다. 만화(漫畵)흩어진(질펀한) 그림’, 즉 그 어떤 이미지나 내용도 담을 수 있는 그림이다. 네 컷 또는 여러 권으로 된 만화 속에서 우리는 하늘을 날거나, 억만장자가 되거나, 다시 태어나거나, 동물로 변한다. 만화를 보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짜증내기도 한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무엇이든 가능하다. 규칙 따윈 없다.

그렇다면, 규칙이 없는 만화에서 엄격한 규칙을 만든다는 것은 어떤 결과를 낳는가?

 


▲ <Stranger>



2.1 내용

<사코>의 내용은 한 마디로 중구난방이다. 멀쩡히 있던 사람이 갑자기 머리가 깨지기도 하고, 개구리는 지나가는 고릴라에게 고백을 한다. 죽었던 사람은 사실 살아있었고, 아무 이유 없이 무언가에 집착하기도 한다. (당연하게도) 스토리의 개연성은 찾기가 어렵다.

굳이 내용상의 특징이나 공통점을 찾자면, 이들의 만화는 ‘~하고 싶다로 가득 차 있다. “어른인 척 하지 말아야지” “제발 뽀삐가 살아있기를” “유명해지고 싶다” “나도 거기 가고 싶어” “저랑 결혼해줘요컷마다 담겨 있는 소망들은 우연하고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이야기를 만든다. 마치 내가 어젯밤 오줌을 누다가 바다로 가서 스키를 타는 꿈을 꾸었다는 식이다. “너 꿈 꿨어?”라는 핀잔을 들을 만한, 꿈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인 것이다.

거칠고 종잡을 수 없는 스토리텔링을 설명하는 가장 쉬운 방식은 이것이 작가의 비이성적인 무의식으로부터 탄생했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작가가 이성을 최대한 배제한 채 감성과 감만으로 작품을 밀어붙였기 때문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창의적인) 작품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코>가 비주관적 방식을 고집함을 기억해보자. <사코>는 만화를 그리는 형식에 있어서 주관을 배제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신조가 가장 비객관적인 내용을 낳게 된 것이다.

다른 사람이 그린 장면으로부터 연결고리를 이끌어내 자신의 장면으로 만드는 방식은 나의 주관뿐만 아니라 객관까지 훼손시킨다. 내가 원하는 장면, 즉 나의 주관은 앞 컷의 개입으로 인해 제한받을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 내가 무의식적으로 따르게 되는 개연성과 필연성, 또는 이해가능성과 같은 객관적인 부분들 역시 제한받는다. 다른 사람이 그려낼 앞 장면과 뒤 장면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가늠하고 조종할 수 있는 객관의 영역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를 젓는 선원들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사람들로 변하고, 숲은 도시로 변한다. 남을 때린 내 팔은 그에게 먹히고, 나의 사랑 고백은 낯선 것이 된다. 짧은 컷에서 보이는 소망은 다음 컷에서 무참히 짓밟히거나 어이없게 실현된다. 한 컷으로 끝나야만 하는 작가의 욕망은 그 컷이 살아 움직여 자라나 다른 컷들과 다투게 만든다. 장면과 욕망들은 서로 먹고 먹히고, 살아났다 죽는다.

 


▲ <his playlist>

 


3. (그래서) 사코북

<사코>의 비주관적 방식의 만화 제작 기법은 이렇게 비객관적인 내용을 낳았다. 예민한 독자는 이 글에서 비주관이 객관이 아님을, 그리고 비객관이 주관이 아님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주관적이지 않음의 끝에 항상 객관적임이 있는가? <사코>는 보여준다. 형식을 극단으로 밀어붙였을 때 발생하는 것은 엄밀함이나 객관성이 아니라 잉여 또는 기괴함이다. 그것은 최상의 또는 최악의 내용으로, 어느 쪽이든 생경함을 동반한다.

그래, <사코>가 비주관적인 형식과 비객관적인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사코>는 무엇인가? 사실 이미 답은 나와 있었다. <사코>과학의 만화가 아니라 만화의 과학이다. 당연하게도, 이 만화책이 과학에 대한 만화일리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 사이언스코믹이라는 이름에서 과학 만화와 같은 교양학습만화를 떠올리지는 말기를 바란다.

모든 현대 예술에서 이루어졌던 형식적 실험은 이들의 연구서를 통해 만화 장르에서의 첫 발을 내디뎠다. 이 작업을 평가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또한 평가라는 것이 불가능하기도 하다. 왜냐하면 예술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해해야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면 평가하지 않아도 된다. 평가하지 않아도 된다면 어려울 것이 없다. 어려울 것이 없으니, 이제 보기만 하면 된다. 이들의 형식적 실험, 그리고 그 결과 만들어지는 내용적 충격을 지켜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