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믿음에 대한 확실한 선긋기, 네 가족을 의심하라 <믿음의 기원 1>

2013. 12. 21. 14:32Feature

 

믿음에 대한 확실한 선긋기, 네 가족을 의심하라 

<믿음의 기원 1>

상상만발극장 / 박해성 연출

 

글_바나나킥

 

지난 여름, 서울프린지페스티벌에서 ‘베를린 알리바이’라는 연극을 본 적이 있다. 흄과 하이데거의 철학을 기반한, 재미있지만 머리 아픈 연극이었다. 그리고 올 겨울 초, 극장에서 다시 한번 흄과 마주치게 되었다. 제목부터 의미심장한 ‘믿음의 기원1’이라는 연극이다.

 

 

데이비드 흄

흄은 “우리의 마음은 하나를 관찰하는 것에서 관찰하지 못한 다른 하나에의 신념으로 옮겨간다”고 말했다. 우리는 어떤 일들은 직접 경험하기도 하지만, 직접 경험하지 못한 것들은 그동안 경험해 온 것들을 통해 인과관계를 추론한다. 하지만 그는 ‘모든 것은 인관관계에 따른다’는 것은 ‘믿음’의 영역이라고 지적한다.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세계관이나 사상은 논리가 아닌 믿음에 기반하는 셈이다. 연극은 이 철학자를 인용하며 믿음의 기원에 대해 접근해 나간다.

 

가족

17년전 여아 실종사건을 맡은 형사가 아이의 부모를 찾아온다. 그동안 실종된 딸 수진을 찾아 다니던 경호는 아내에게 딸을 찾았다고 말하지만 아내 규연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하다. 경호와 규연은 딸이 실종된 날에 대해 다른 기억을 갖고 있다. 규연은 어린 딸이 아빠를 찾는데도 외도에 빠져 딸을 돌보지 못했다며 경호를 비난하지만, 경호는 사건 취재 때문에 집에 못 들어갔노라고 아내를 ‘환자’로 몰아붙인다. 한편, 24살 수진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다. 딸을 찾았다고 기뻐하는 경호에게는 애매모호한 태도로 대하면서도, 형사에게는 어린 시절 기억이 없다고 일관한다. 기록에 근거해 사건을 추적해 나가던 형사는 서로 다른 기억을 가진 이들 사이에서 모순의 벽에 직면한다.

이 연극에는 딸의 실종으로 해체된 가족이 등장한다. ‘믿음의 기원’이라는 연작 중 첫 번째 소재로 가족을 내세운 것이다. 향후 과학과 이데올로기라는 믿음의 기원을 묻는 작품을 선보이기 이전에, 우리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가족에 대해 다뤄보겠다는 것이 연출자의 의도이다. 가족은 개인이 처음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창구라는 점에서 그 의도는 이해된다. 또, “가족이 가족이란 건 어떻게 알아요?”라는 수진의 질문은 우리를 효과적으로 혼란에 빠뜨려 놓는다. 하지만 거기까지일 뿐, 제목이 주는 질문을 소화하기에 가족이라는 소재는 우리에게 연극을 풀어낼 단서를 전해주지는 않는다.

 

 

연극이라는 믿음

무대는 원형으로 배열된 의자들이 전부다. 그곳은 관객들이 앉는 객석인 동시에, 배우들의 연기 공간이다. 별도의 무대장치가 없기 때문에 관객들은 배우의 대사에 전적으로 의지하여 이야기를 구성해 나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바로 이 대사들에 의해 이야기의 시간과 공간은 수시로 바뀐다.

관객은 무대 위 배우들의 말과 몸짓만 목도할 뿐, 단순한 사건조차도 극 중에서 벌어지는 객관적 사실에 대해 알 수 없다. 의자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무대에서 인물들은 실랑이를 벌인다. 창문 좀 열자는 경호에게, 규현은 창문이 어디 있냐고 되묻는다. 재현(再現)적으로 연출된 무대라면 관객은 누구의 말이 맞는지 쉽게 파악할 수 있지만, 아무것도 없는 무대에서는 누구의 말이 맞는지 확인할 어떤 단서도 찾을 수 없다. 이런 특성은 연극의 전체 서사를 모호하게 바꿔버린다. 공연의 마지막에 경호는 규현에게 말한다. “그 애가 지금 오는 중이야. 오고 있어. 지금. 여기로. 왔어” 그러나 관객은 정말로 24살 수진이가 그들에게 온 것인지, 그 말이 그저 경호의 망상이 만들어 낸 공허한 외침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처럼 이 연극은 아무것도 없는 무대와 등장인물간의 모순적인 대화를 통해 ‘믿음’에 대해 표현한다. 관객은 무대 위에서 제공되는 제한된 정보를 가지고 머릿속에서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구성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관객들은 ‘믿음’의 행위를 하게 된다. 경호 역을 맡은 배우를 경호라고 믿어야 하고, 경호와 수진의 대화를 통해 대화하는 장소가 경찰서 앞이라 여겨야 하고, 또 바뀐 대화를 통해 시점이 현재에서 과거로 변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연극은 서사를 청각적 표현으로 펼쳐나가고 시각적 표현을 최대한 자제하여 ‘믿음으로서의 연극성’을 한층 강조한다.

 

 

형사

사실 연극 내내 서로 맞지 않는 세 가족들의 진술에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아마 대부분의 관객들은 형사 재만에게 감정이입해 이 연극을 관람했을 것이다. 형사라는 그의 직업에서 알 수 있듯이 재만은 논리적 분석을 통해 객관적 사실을 도출해 내려는 인물이다. 전화를 건 사람이 딸아이를 유괴했다고 격양되어 있는 규연에게도 차분히 통화내용을 파악해내려 하고, 유괴 당일에 대한 경호의 증언도 기록과 비교하고, 어린 시절 기억이 없다는 24살 수진에게도 무엇이든 기억 나는게 있을 것 아니냐며 조사를 해 나간다. 그러나 이런 재만의 노력은 유괴 사건 때에도, 17년이 지난 현재에도 실패하기만 한다.

상식적으로 재만의 수사방법엔 틀린 점이 없다. 아이를 잃은 슬픔에 제정신이 아닌 어머니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을 수도 없고, 아무리 사건 당사자의 말이라 하더라도 기록과 비교는 해보아야 객관성이 확보될 수 있으며, 조그만 단서라도 확보해야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사건 당사자들의 증언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종합하면 하나의 객관적 실체를 얻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왜 형사는 번번이 수사에 실패한 것인가.

 

 

다시 흄으로

재만은 사건의 제3자로 해당 사건을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의 진술을 토대로 객관적 사건의 실체를 추론해 내려 한다. 하지만 흄에 따르면 ‘모든 것은 인과관계는 따른다’는 것은 믿음의 영역이다. 애초에 재만의 추리 역시 논리라고만은 할 수 없는 셈이다.

이 연극은 기본적으로 데이비드 흄에 의지해 믿음의 영역이 어떻게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파헤친다. 특히 빈 무대를 사용함으로써 주제를 연극이라는 형식에 잘 녹여냈다. 그러나 가족이라는 소재에 있어서는 효과적으로 말하고자 하는바가 잘 드러나지는 않았다. 가족은 우리 삶에서 가장 일상적인 부분이란 점에서 전달하는 바를 나타내기 좋은 소재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아이가 유괴 당한 한 가정’이라는 특수성이 강해 보편적인 공감은 어려웠다. 앞으로 연작의 다음 작품들이 다룰 과학과 이데올로기, 종교라는 소재는 이 연극이 추구하는 바가 잘 드러날 것으로 예상된다.

한 시간 가량의 그리 길지 않은 러닝타임의 연극임에도 불구하고, 이 연극은 내용 파악에 상당한 시간과 집중력을 요한다. 우리가 추론을 통해 사건과 사건의 간격을 메우듯, 이 연극은 시공간의 ‘점프’를 메우면서 봐야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연극은 애매하고 모호하다. 마치 우리의 믿음처럼. 그런데 이 작품은 믿음이 현실에 미치는 영향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의도적인 믿음을 통한 긍정적 기능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그보다는 믿음이 어떻게 우리 삶에서 작용하고 있는지에 초점을 두고있다. “믿을 만해서 믿는다면, 그건 믿음이 아니예요”라는 말은 의도적 믿음에 대한 경계선으로 이 연극안에서 확실히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사진제공_상상만발극장

 필자_바나나킥

 소개_글쓰기가 즐거운 창천동 토끼굴 청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