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단상들] 다정이라는 쓸쓸한 병 <다정도 병인양 하여>

2013. 12. 28. 09:50Feature

 

 

다정이라는 쓸쓸한 병

<다정도 병인양 하여>

제12언어 연극스튜디오 / 국립극단 소극장 판

글_최윤지

 

연극에 쏟는 집중력을 그것을 관람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향해 돌릴 필요가 있다. 물론 관람객으로서 드라마의 연결고리를 찾으려는 노력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연극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단순히 모델에 불과하다면, 특정한 인물인 척 하는 사람들이 연기를 위해 고용된 배우에 불과하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배우는 이 드라마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으며, 관객 또한 그런 사실을 알고 있다. <다정도 병인양하여>의 연출가/작가인 성기웅의 작품은 처음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소리와 스타일을 분명하게 떠올리게 한 작품이었다.

 

 

성기웅은 연극 <다정도 병인양 하여>를 통해 다정이라는 한 여자의 이야기를, 아니 많은(多) 사랑(情) 이라는 이름의 병을 앓았던 한 때를, 아니 그녀로 인해 존재했던 '그 시절의 성기웅' 이라는 지금의 나와는 다른 영역의 인간을, 텍스트를 통해 무대에 던졌다. 무대 위의 말들은 기억 혹은 기록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그 가장 바깥에는 모든 말을 문학적으로 걸러낸 텍스트가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나, 성기웅이다. 드라마와 기억의 사이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지금의 나와 문학 속 나와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자신의 존재를 바라보고자 하는 그 과정은 아주 사적이라서 위트가 느껴지는 고군분투였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쓸쓸함이 남는다.

연극은 지난해 국립극단의 ‘젊은 연출가 시리즈’로 국립극단 판에서 초연되어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흐리는 연극적 리얼리티를 무대 위에 구현했다는 평가를 얻었다. 연출가/작가가 스스로 무대에 서서, 아주 사적인 이 연애담이 사실 자신의 이야기라고 말하며 극을 시작한다. 여기에 '제12언어 연극 스튜디오'의 배우들이 '성기웅'을 포함한 그 이야기 속 인물을 연기했고, 때로는 성기웅의 곁에서 연애담을 지켜보았던 배우 스스로를 연기했다. 그렇게 이 무대의 사실은 무엇인지,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드라마와 실화의 경계를 흩트리는 것이다.

 

 

드라마는 다정의 다중연애(poly-amory)를 기반으로 한 기웅과의 연애사에서 기웅이 다정을 독차지 하고 싶어져 버리면서 갈등이 깊어진다. 그래서 기웅은 사람들에게서 그녀에 대한 힌트를 얻지만, 이상하게도 그들이 바라보는 다정의 모습이 전부 다르다. 그래서 말들이 쌓여 가면 쌓여갈수록 그녀의 캐릭터는 습자지처럼 투명해져만 갔다. 시몬 느 드 보부아르처럼 여성적으로 패기 넘치는 일면을 보여주기는커녕, 분석당하고 모멸당하며 개성을 잃고 만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는 어느 시점부터는 이 이야기가 허구인지 실화인지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다정이라는 인물을 연기한 배우 두 사람(이안나, 김희연)이 모자이크 처리된 '리얼 다정'과 인증샷을 찍어 무대 전면에 투사하는 뻔뻔함을 보여주었지만, 그녀가 실존인물인지 아닌지에 대한 것에는 관심이 가지 않았다. 도리어 연출가/작가의 이야기 속에서 만들어진 무대 위 기웅의 감정들이 와 닿았다.

 

 

다정에 대해 이야기를 더 해 보자면, <다정도 병인양 하여>라는 텍스트에서 다정의 감정은 무대 전면에 계속해서 투사되는 그래프와 글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텍스트로 인해 측정되고, 도표화되고, 분석되었다. 그녀의 자아가 기웅에 의해 개성을 잃고 말아야만 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병 이상의 징후는 볼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 왜 이 텍스트는 이런 방식으로 존재해야만 할까? 여기서 나는 연출가가 애초에 자신의 분신을 앞세워 들춰보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힌트 같은 질문을 얻게 되었다. 누군가를 바라보는 것은 곧 나를 바라보는 것과 같은가? 나는 그때 비로소 나를 찾는가? 그렇다면 사실 나는 나를 보기 위해 타인을 보는 것이 아닌가? 그녀를 향한 모든 말들이 사실은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는 아이러니가 남는다. 그리고 여기에는 쓸쓸한 정서가 동반한다. 이 연극은 그 모든 자기 연민에 대한 끝없는 변명으로 채워진 쓴 연애에 대한 기억이다. 다정도, 기웅도, X선배도, 다 기웅이다. 이 자기지시성이 연출의 희망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다정도 병인양 하여>는 연극이라는 방식으로 표출된 문학적 위안이다. 이 수많은 기억과 기록은 일상이라는 '진짜'를 비웃는 (순전히 작가 성기웅으로 인해 재해석된)'허구'이다. 그리고 그 수많은 다정의 말들은 한 연극 연출가로 인해 증거처럼 남아 급기야 '다정' 스스로 조차도 부정해 버리는 버려진 '무언가'가 되어버린다.

나/분신으로 존재하는 기억속의 나

사이의 '무언가'이며,

다정/기억속의 분신들로 존재하는 다정

사이의 '무언가'이다.

 

극 중에서 X선배(이윤재)는 다정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가 이 이야기를 연극으로 하고 싶다는 기웅의 말에 이렇게 묻는다.

그래서 다정이에 대해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기웅은 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이 말없는 순간에 빛나는 '무언가' 를 느꼈다. 그것은 아마도 이 무대를 진짜로 만들어준 '무언가'가 담긴 침묵인 듯하다. 사실 <다정도 병인양 하여>는 다정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지도 모른다. 다정을 향한 무언가가 어떻게 연출을 허구와 진실의 경계로 몰아넣었는지, 그것을 탐구하고자하는 행위에 대해 자학에 가까운 고민이 보인다.

참으로 안쓰럽지 아니할 수 없는 쓸쓸한 자기 위안이다. 그래서 재밌다. 사실 poly-amory나, 땅고 같은 은유나 용어는 그 쓸쓸함을 휘감는 휘황찬란한 꾸밈일 뿐인지도 모른다. 다정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성기웅을 연기하는 배우 이화룡이 이곳에 서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사랑을 추억하는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기억에서 사랑을 수식하는 모든 화려한 말들을 거둬내고 남은 '어떤 정서', 그 쓸쓸한 병을 앓았던 시기는 어떠한가. 그곳에서 발견하는 '나'는 누구인가. 모든 외로움을, 그에 대한 책임을, 어쩌면 우리가 아닌 당신이라는 말 한마디로 응축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진제공_극단 제12언어 연극스튜디오+코르코르디움

  필자_최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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