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오병잉 페스티벌 학술대회

2014. 2. 18. 13:34Feature

 

아시아-오프-병맛-잉여 페스티벌의 시작과 끝

"학술대회 : <무엇에 쓰는 병맛인고>"의 발제문

 

글_성지은

학술대회 <무엇에 쓰는 '병맛'인고>, 패녈: 양효실, 성지은, 차지량

 

2013년 가을 어느 날 오잉 콜렉티브들은 까까오똑 단체채팅방에서 노가리를 까다가 독립예술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대충, 작금의 소위 독립예술중 완벽성이 떨어지는 작품들에 대한 한탄이었다. 거기에는 그 형식이 더 이상 젊지 않은우리들의 눈에는 별로 새로울 것이 없어 보이는데도, 새롭다고 환영받는 상황에 대한 우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와중에 그 작품들이 예술적 완성도도 떨어진다는 사실은 더욱 심각해보였다. 우리는 지금 한국 사회에는 젊은 사람들(또는 독립예술에 관심을 가지는 늙은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독립예술보다 더 좋은예술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오프-병맛-잉여 예술에 대한 오잉 콜렉티브의 관심은 이렇게 해서 시작된 것 같다. 오잉은 기존에 다루어지고 있는 독립예술, 주목받는 예술작품들 중에서 어떤 특정한 성격을 지닌 작품들을 더 주시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 성격은 곧 쉽게 정리할 수 있었다. 쓸모없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어이없는 고퀄을 가질 것. 이것은 우리 세 명 각각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감성들과 어우러져 다음과 같은 키워드로 발전하게 되었다. 오프예술, 병맛예술, 그리고 잉여예술. 실제 작품과 벌어지고 있는 현상, 그리고 우리의 생각과 바람들이 뒤섞여 있던 바로 그 때, 우리 중 한 명이 축제를 제안했다. “봄에는 페스티벌 봄이, 여름에는 서울변방연극제가, 여름-가을에는 서울프린지페스티벌이 있으니, 우리가 겨울을 대표하는 페스티벌을 만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축제를 만들어본 적도 없고 그저 적극적인 관객이자 인터넷 상의 소비자였던 오잉은, 말도 안 되게 축제를 만들기 시작하게 된다. 그것이 아시아-오프-병맛-잉여 페스티벌의 시작이다.

축제가 이 세 가지 키워드로부터 시작된 만큼, 축제의 성격을 정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오잉은 축제가 보여주는 작품뿐만 아니라, 축제 자체도 오프이고 병맛이고 잉여이었으면 했다. 그리고 열심만 넘치는 패기가 아닌, 과도한 완성이나 여유로운 허술함이었으면 했다. 이렇게 테두리를 정해놓고 작품 또는 작가를 섭외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정한 조건은 느슨한 것이었기 때문에, 작품이나 작가가 이 조건에 딱 들어맞을 필요는 없었다. 아오병잉 페스티벌은 오병잉 감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이벤트’, 그러니까 마치 외계비행물체와도 같이 어느 한 날 한 시에 번쩍 하고 나타나 사람들의 혼을 빼놓고 사라진 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반짝거리는, 그런 것이기를 바랬다.

처음에는 연극 위주로 작품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연극이라는 장르 안에서 병맛이거나 잉여성이 부각되는 작품을 찾는 것은 어려웠다. 우연한 기회로 애니메이션이나 순수미술 등 시각예술의 분야에까지 발을 디디게 되었는데, 이 분야는 오병잉의 노다지와도 같았다. 특히나 시각예술이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여 온라인문화와 접목되는 부분에서는 오병잉의 감성이 폭발하고 있었다. 우리는 약 3달여의 섭외 및 조정 기간을 거쳐 총 6팀의 공연예술 작품과 7명의 시각예술 작품을 섭외할 수 있었다.

 

 

아오병잉 페스티벌이 선보이는 작품들은 각각 오프, 병맛, 잉여 예술로 구분되고, 그 중 몇몇은 여러 가지 카테고리에 속하기도 한다. ‘병맛이라고 할 때 많은 사람들은 웹툰 이말년이나 조석의 마음의 소리를 떠올릴 것이다. 이러한 병맛은 어떠한 작품을 접했을 때 상상한 것보다 과도한 또는 전혀 맞지 않는 내용이 전개되었을 때 발생한다. 하지만 오잉은 과도한 형식적 엄밀함이 주는 아이러니의 감성까지 병맛으로 분류한다. 여기에서 <아오병잉>의 오프-병맛-잉여는 사회문화적 개념인 병맛’, ‘잉여와 겹쳐지지만 구분된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시각문화가 병맛개념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사례라면, ‘잉여는 좀 더 사회학적, 이론적 틀에 포함된다. 보통 생각하는 잉여개념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들은 최태섭의 잉여 사회, 독립잡지 월간 잉여, ‘88만원 세대’, ‘오타쿠등이다. 이것들은 잉여의 원래 의미를 충실하게 따른다. 그러니까, 안정적인 사회 체계 내로 들어가지 못한, 남는 노동력인 것이다. 이 남는 노동력은 돈과 물질이 필요 없는 인터넷 가상 세계 속에서 자신의 남는 여분, 잉여를 소비하고, 무언가를 만든다. 그것이 이를테면 자신의 처지를 자조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병맛 개그이다.

 

아오병잉 프로그램북

 

오잉은 이러한 사회문화적 병맛, 잉여 개념보다는 좀 더 예술과 관계된 시각에서 이러한 코드를 (다시) 읽어낸다. 우선, 병맛 예술. 여기에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병맛 감성을 가지고 있는 작품, 아예 그런 감성을 의도한 작품들과 극단적인 치밀함을 자신의 규정으로 내세워서 관객이 봤을 때 어이없어지는 작품들이 있다. 예를 들어, 최근 개봉한 영화 <플랜맨>의 주인공처럼 모든 것을 엄격히 지키는 사람이 있을 때 그 말도 안 되는 엄격함은 실소를 불러 일으킨다.

두번째, 잉여 예술. 병맛의 과도한 형식적 완결성은 잉여성과 직결된다. 왜냐하면, 과도하게 따지는 것도 시간이 있고 여유가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예를 들어, 설치미술을 하는 우금화 작가는 직접 실을 떠서 긴 원통형 파이프를 만들었는데, 거기에 쓰인 실의 길이가 몇 킬로미터에 달한다. 물론 작가가 잉여성을 보여주고자 한 것은 아니지만, 관객이 이 작품을 만든 과정을 알게 되었을 때는 그 어처구니없이 긴 길이와 시간과 노력에 감탄하면서 어이를 잃어버리게 된다.

세번째, 오프 예술 역시 잉여성으로부터 유추할 수 있다. 오프 예술이란 비전문가가 행하는 예술, 예술 같지 않은 예술, 예술이 아닌데 예술인 것을 말한다. -예술가들은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지 간에) 형식적 완결성을 추구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이 비전문가들이 힘든 예술을 하게 만드는 일종의 추동력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이 실제로 형식적 완결성을 얻느냐 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우선의 형식적 완결성은 이들의 열정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문가가 만드는 적합한 완결성과 비전문가가 만드는 과도한 완결성은 다르다. 애초부터 이 둘의 작품은 평가되는 잣대가 다르다. 예를 들어, 아주 훌륭한 영화제작자가 만든 나루토 실사판 영화는 아무리 잘 만들어도 욕을 먹을 수 있지만, 오타쿠 미국인 성인 남자가 만든 나루토 실사판 유튜브 동영상은 , 정말 만화랑 똑같다!”라는 칭찬을 받는다.

오프, 병맛, 잉여예술들이 이렇게 서로 얽혀있는 만큼, 이번 페스티벌에서 선보이는 작품들 대다수가 여러 범주에 속한다. 많은 작품들은 병맛스러움을 보여준다. 개를 주인공으로 하여 실소가 터지는 상황을 보여주는 100년이 넘은 병맛 텍스트 <까쉬딴까>(문올가 연출),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만들어놓고 그곳에서 벌어지는 말도 안 되는 해프닝들을 보여주는 <저한테 왜 그러세요>(소사이어티), 인형들이 계속 가면을 쓰면서 역할을 바꾸다가 결국 먼지와 우주가 되어버린다는 <먼지와 우주>(극단 문), 그리고 코브라 쓸개나 몇십년 된 노트북 등 쓰잘데기없는 것을 수집하는 수집가의 이야기(남지우의 <지우스 클로젯>) 등 각종 병맛스러움이 도처에 깔려 있다.

 

렉처퍼포먼스 <지우스 클로젯>

 

병맛-아트로 분류되는 작품들 중에는 잉여성을 바탕에 깔고 있는 작품들이 있다. 24년 동안 순결하면 손가락에서 불이 나오는 마법을 쓸 수 있게 된다는 병신스러운 설정의 <동정남의 순결마법>(김재관)에서 병맛의 절정을 보여주는 것은 아주 높은 수준의 CG효과이다. 이는 미술전공자가 아닌 작가의 남아도는 시간과 노동력 덕분에 탄생할 수 있었다. 잉여성을 부각시키기 때문에 잉여-아트로 분류된 작품들 역시 병맛스러움을 놓치지 않고 있다. 양희원 작가는 자신의 잉여스러움을 작품으로 승화시키고자, 자기의 취미생활인 액션영화, 액션게임 등을 영상작품 <하드락 솔로몬>으로 승화시켰다. 안지숙 작가는 자기 영상의 장르를 스스로 ‘off병르라 이름 붙였다. 영상을 전공하긴 했지만 작가의 영상들은 모두 재미를 위해서 혼자 만들고 혼자 보던 것들이다.

이렇게 잉여성은 다시 오프-예술과 연결된다. 안지숙 작가의 작업이나 남지우의 퍼포먼스에서 볼 수 있듯이 비종사자가 어떤 일에 열의와 시간을 들일 때, 훌륭한 잉여-오프 예술이 나타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운동선수가 운동을 하루종일 열심히 할 때 그에게 잉여롭다고 하지 않는 반면, 대학 휴학생이 컴퓨터 게임을 하루종일 열심히 할 때 잉여롭다고 하지 않는가. 남지우의 렉처퍼포먼스 <지우스 클로젯>과 이지현의 관객참여 서비스’ <어린아이의 처방전> 등 아오병잉의 오프-아트들은 오병잉씬의 첨예한 경계들을 넘나들며 자신만의 예술 영역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어린아이의 처방전>, 1인 관객을 위한 퍼포먼스.

 

 

아오병잉 페스티벌을 감히 선-평가해보자면, 이는 2014년 한국 사회의 시대적 요청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오병잉 감성은 21세기에 혜성처럼 등장한 새로운 것은 아니다. 세상 만사가 이미 존재해 있었고 다만 주목받는 시기가 다를 뿐인 것처럼, 오병잉 감성 역시 아마도 인류가 태어난 이후 계속해서 존재해왔을 것이다. 이는 농담들, 패러디들, 풍자들, 개드립들, 헛소리들, 외침들을 통해 이어져 왔다. 시각예술계에서는 멀리는 16세기 프랑스의 우화인 <가르강튀아>의 풍자가 그러하고, 1910년대 유럽의 다다이스트들이 행했던 음향시나 퍼포먼스들이 그렇고, 1960년대 구보타 시게코가 자신의 질을 이용해 그린 버자이너 페인팅이 그러하며, 20141월 문화역서울에서 열린 <4회 공장미술제>에서 선보인 많은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 그러하다. 하지만 고래의 선례들에도 불구하고 오병잉 감성이 제대로 이론화, 개념화되고 논의되며 발견된 것은 아마도 최근 몇 년일 것이고, 이는 특유의 의미를 지닌다. 이런 흐름 속에서 아시아-오프-병맛-잉여 페스티벌은 시대적 요청에 대한 응답으로서, ‘지금이 아니면 망한다,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진정 늦은 것이다라는 신념으로, 치고 빠지는 전략을 수행한다.

아오병잉 페스티벌의 끝은 어떠할까? 시대적 요청이라는 거창한 시작에 맞게 전대미문의 성공이라는 창대한 끝을 맞이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은 사후적으로 평가될 것이지만, 한 가지 문장을 인용하며 사후를 내다보고 싶다. “잉여-잉여-아트의 난점은, 열심히 하는 순간 망하기 때문에 열심히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그런데 그게 또 의식적이면, 잉여로움이 파괴됨.” (미술평론가 임근준 a.k.a. 이정우의 2월 트위터 중) 오잉은 분명히 잉여들이었고, 잉여로움을 사랑했고 자랑스러워했으며, 잉여성의 가치를 높게 사기 때문에 아오병잉을 시작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잉여 페스티벌을 시작한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잉여가 아니게 되었다.

여기에서 오잉은 오병잉 전략의 결과물인 쓸데없이-고퀄이 갖는 위험천만한 운명을 감지할 수 있었다. 온갖 오프력, 잉여력을 쏟아부어 만든 쓸데없이-고퀄인 작품들은 일반적인 사회 자본주의 경제체계 내에서 보면 병맛스러운요상한 것들이다. 이들의 눈에 이것들은 무용하고, 그래서 웃음이 나온다. 하지만 예술계로 넘어오면 상황은 달라진다. 어떤 수준의 것 이상으로 고퀄리티를 보여주는 작품을 만났을 때 예술계는 그것의 쓸모와는 상관없이 감탄을 내뱉고 주목하게 된다.

하나의 작품이 두 가지 세계에서 다르게 평가받는 아이러니한 상황. 잉여로움이 자치하면 반-잉여로움이 되어버리는 역설적인 상황. 그 양극단을 뛰어넘고 흘러 들어갔다 뒤집는 것은 바로 오병잉스러운 예술이다. 우리를 구원하고 이끌어줄 것은 어쩌면 내 눈 앞에서 벌어지는 연극 한 장면, 영상 한 컷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 학술대회가 끝난 후에도 계속해서 벌어지는 오병잉의 축제에 동참할 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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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아오병잉 페스티벌 중에 있었던 학술대회의 발제문입니다.

** 아오병잉 페스티벌 개별작품 리뷰는 2월 말부터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