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5. 4. 03:01ㆍFeature
창작에 대하여
글_지혜로운 늑대의 전사
얼마 전 예술의전당에서 공연된 작품 중 하나가 루마니아 연출가 실비우 퓨카레테(Silviu Purcarete)의 2009년 작 <파우스트>와 심각하게 흡사하다는 이야기가 여기까지 전해졌다. 물론 전해진 것들은 실체 없는 풍문들에 불과하다. 몇몇 관객들이 <파우스트> 영상을 돌려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거나, 극장 관계자들이 알면서도 쉬쉬하고 있다는 것, 한 수업에서는 뭐 그리 따질 만한 공연이 아니라, ‘흉내를 내려 했으나 잘 못한 정도’로 갈무리가 되었다는 등. 그리고 현재까지는 이 사건이 어떤 방식으로든 제대로 공론화되지 못했다고도 나는 들었다. 아니, 어째서?
연극인들 사이에서 이미 공공연히 알려졌지만 혹시라도 그냥 덮고 넘어가려는 데에는 수많은 배후 사정들이 깔려있을 줄 안다. 그것은 정치적인 상관관계일 수도 있고 극장의 체면일 수도 있고 사태의 심각성을 간과한 무심함일 수도 있으며, 어쩌면 연극 일반에 대한 관객의 신뢰를 지키려는 나름의 심사숙고일 수도 있다. 그리고 분명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두 작품 다 보지 못했고, 그 유사성의 정도나 표절의 여부에 대해 판단을 내릴 자격이 없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나는 저 모든 관계망과 은폐의 고민들로부터도 한 걸음 비껴 서 있다. 해서 감히 이 속 편한 위치를 힘입어 몇 가지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예술에 있어 국가 간의 경계나 장르 간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동시대성”이 거의 시차 없이 공유되는 지금, 둘러보건대 우리를 순진하게 기절시킬 “새로운 것”은 좀처럼 찾기 힘들다. 작품들은 점점 더 개념적인 것을 중시하게 되었고, 크게 봤을 때 몇몇 유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기본적인 작업의 틀이나 형식, 매체의 사용방식 등도 매우 엇비슷해졌다. 일례로 무대 위에서 카메라가 사용되는 경우를 들어보면,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들이야 빤하다. 객석에서 포착하기 힘든 섬세한 감정선을 클로즈업하거나, 보이는 것의 이면에 있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거나, 이미지를 왜곡시키거나, 다른 이야기 혹은 다른 세계를 끌어오거나… 그래서 누군가 케이티 미첼(Katie Mitchell)의 공연을 처음 보고 뛰는 가슴을 주체 못할 때, 혹자는 심드렁하게 대꾸할 수 있다. 카메라 사용? 옛날에 누구누구가 다 했지, 뻔한 걸 뭐.
그런데 아니, 그렇지 않다.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것들만이 눈앞을 채우는 시대가 분명 왔지만, 모든 것은 여전히 완벽하게 새로워질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언제나 이 오해를 풀고 싶었는데) 개념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개념을 잡느냐가 아니라 그 개념을 어떻게 푸느냐이고, 카메라를 쓰든 무대 사면을 둘러 객석을 배치하든 텍스트 하나 손에 들고 퍼포먼스를 하든, 그 형식적인 장치들을 매순간 어떻게, 무엇을 위하여 다듬어가느냐가 형식을 취함 자체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예술가의 고민과 형식이 하나일 때, 그래서 정말 오롯이 자기 것일 때, 그 작은 진정성이 유일무이한 새로움의 - 창작의 가치를 발하고, 단언컨대 반드시 그것은 관객에게 가 닿는다.
그리고 혹여 관객에게 그것이 닿는 데 일말의 어려움이 있다면, 나를 비롯한 이론가나 평론가가 그것을 도울 것이고, 도와야 한다. 젊은 예술가들이 자기만의 것을 풀어가고 있을 때, 그게 어떤 것인지 알아보고, 짚어주고, 그의 위치와 그의 의미를 알게 해 주고 또 갖게 해 주고, 시간이 흐르면서 혹 그 좌표가 이동한다면 그 궤적까지 함께 따라가주는 것. 그리고 이에 더해서 너무나 당연히, 무엇이 표절이고 무엇이 창작인지, 단호하게 지적하는 것. 우리의 역할이 이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예술에서 창작 개념이 존중되지 못하면 도대체 무엇이 남는가? 정말 만에 하나 표절이 아니라면, 그 작품이 왜 어떤 측면에서 창작인지 말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변호하는 것도 단죄하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은폐와 무심이 얼마나 살인적인 결과를 낳는지 아직도 더 값을 치러 배워야겠는가?
나는 “진짜 창작” (이게 진짜라는 말을 붙일 개념인가!) 을 하고 있는 예술가들이 몇몇 양심 없는 범법자들과 등가에 놓이는 것을 원치 않는다. 우리나라 공연들 대부분이 그렇다더라, 이것도 뭐 감각적으로야 신선하긴 한데 또 어디서 보고 온 비슷비슷한 것들을 흉내 내고 있나 보지, 하는 류의 무심함 속에서 그들의 진정성이 무화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무엇보다 나는 젊은 창작자들이 이 같은 사태를 심각하게 겪어내지 않음으로써 경각심을 갖지 않는 것,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는 것, 자기 예술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을 정말로 원치 않는다. 그리하여 비판을 위해서가 아니라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고민 끝에 이 글을 썼다. 혹 누군가 훨씬 더 제대로 된 공론화를 준비하고 있었다면 더할 나위 없이 다행인 일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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