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연극 '벤치와 가로등'

2014. 3. 11. 16:37Review

 

연극 벤치와 가로등리뷰

 

글_정은호

 <벤치와 가로등><아오병잉 페스티벌>의 취지에 가장 적합한 연극이었다. 물질교환의 가치로 모든 게 설명되어버린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연극은 돈으로 대체될 수 없는 무엇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잉여로운 사람들이 모여서 자본이 쉽게 할 수 없는 유머를 만들어내는 일은 흥미롭다. 그래서일까. 유머러스한 쇼를 보기 위한 가벼운 마음가짐으로 페스티벌에 갔던 나는 이 극이 끝날 즈음 예상치 못한 감동을 받았다. 분명 연극에는 엉성한 부분이 있었고 극의 전개도 러프했다. 어설픈 연기도 흠이라면 흠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연극은 사랑스러웠다. 자잘한 흠집들은 이 연극의 눈부신 장점이 모두 흡수했다. 그 장점은 바로 우리 사회에서 무의미하다고 규정되는 것들이 사실은 무의미하지 않다는 극의 분위기에 있었다.

이 연극의 주된 내용은 다큐멘터리 <3>을 찍는 PD가 가로등 근처의 벤치에 앉아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인터뷰하는 것이다. 가로등이 비치된 벤치로는 많은 잉여로운 사람들이 찾아온다. 일자리가 잘 잡히지 않는 모델부터, 한때는 잘나가는 보이밴드의 리더였으나 현재는 백수가 된 가수, 노숙자이지만 스스로를 거리의 시인이라고 부르는 래퍼, 게임에 중독된 여자 대학생 등이 그들이다. 이 연극은 주인공이 없다. 주인공이 만약 존재한다면, 잉여로운 등장인물 전원이 바로 주인공이다. 그러니 이 극은 특정 인물과 그 인물 주위에서 발생하는 극적 관계에 대한 탐구라기보다는, 등장인물 모두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어떤 속성에 대한 관찰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엮어주는 키워드가 바로 병맛잉여.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불확실한 미래를 불안해하는 이들이 모여서 콘서트를 만든다. 어떤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저 즐기고 싶다는 이유면 충분하다. 스스로의 취업과 자금난을 걱정하는 이들이 모여 즐기는 공연은, 관객들 자신이 얼른 쓸모 있는 인간이 되어야한다는 스스로에 대한 강박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벤치와 가로등>잉여롭게 살아도 충분히 가치 있는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경쟁이 우선시되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무용한 콘서트를 기획한다는 것이 가치 없는 일이 아님을 극이 보여주는 것이다.

 

연극에는 또한 마실 음료가 무료로 제공되었다. 연극은 기본적으로 가볍게 즐길 수 있는 공연을 기획한다는 의사를 음료를 통해서 밝혀주었다. 음료는 콜라와 맥주를 나누어주었고, 나는 마치 <개그콘서트>의 한 코너를 보는 느낌으로 연극을 접할 수 있었다. ‘개그라는 장르에도 서사는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결국 웃음을 만들어내는 포인트다. <벤치와가로등>의 무기는 애초에 튼튼한 서사가 아니었다. 그들은 웃긴 캐릭터를 등장시키고, 새로운 유행어라고 말해도 무방한 감각적인 대사를 뱉는다. 이 연극은 관객들이 쓸데없이 무거워지는 것을 절대로 원치 않는다. 진지한 연극들은 이미 많으니, 그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가볍게 풀어주고 즐겁게 해주기 위한 연극을 하겠다고 생각한 걸 수도 있다. <벤치와 가로등>, 팝콘과 콜라를 먹으면서도 볼 수 있는 연극이었다.

 

 

<벤치와 가로등>이 정교하게 건설된 연극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곧 무너질 듯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서 있는 건물에 가깝다. 하지만 이 연극은 위태롭되 무너지지는 않는다. 쓰러질듯 하면서도 쓰러지지 않는 경계선에 극이 서 있다. 벤치와 가로등에 나오는 많은 배우들은 각자의 개성이 굉장히 강해서 하나로 합쳐져 연극으로 만들어지기 힘들어 보이기도 하지만, 이들을 포괄하는 것은 결국 벤치가로등이다. <벤치와 가로등>은 보통의 연극이 가지는 속성인 인물 간의 첨예한 갈등을 보여주지 않는다. 극은 병맛에 맞는 유머코드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러니 이 연극의 전략은 진중함보다는 가벼움이 가지는 편안함의 미학에 있다. 사회에서 쓸모 있다고 규정하는 그 어떤 것도 해내지 못하지만, 본인만의 개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도시의 이들이 벤치로 모여들며 시작되는 이야기. <벤치와 가로등>은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연극인 동시에 따뜻한 감동을 남기는 연극이었다.

 

필자_정은호

소개_고등학교 1학년 시절 동네 책방에서 무협을 읽다 엉뚱하게도 문학에 빠져버렸습니다. 여전히 SF를 읽고 만화와 B급 오락영화들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쓰고 싶은 글은 동시에 깊이 있는 문학 소설입니다. 어느 경계에도 얽메이지 않고 자유로운 글쓰기를 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