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관객의 시선이 머무는 자리, 박민희 <각자의 시선>

2014. 3. 6. 03:05Review

 

관객의 시선이 머무는 자리

박민희 <각자의 시선>

2014 MAP @문래예술공장 박스시어터

 

글_정진삼

 

가곡에 대하여

 

A  가곡은 전주와 간주에 반주를 더하는

B  다섯장 형식의 전통 성악곡이라 한다

A  열여섯박 열박의 긴 장단형을 가지며

B  엄격한 노래틀을 준수하면서 부른다

A  노래의 형식미가 무엇보다 중요하며

B  조선시대 선비들의 애호를 받았더라

C  우리가 알고있는 서양가곡 리드lied

D  그러한 가곡들과 현격하게 다르다

A  자연의 아름다움과 남녀의 순수사랑

B  이들이 노랫말의 가곡들의 내용이라

C  오늘날 속가(俗歌)의 일종 판소리가

D  창작공연으로 독자성을 구축했으나

E  여전히 정가(正歌)에 속하는 가곡은

F  형식의 폐쇄성과 태생적 한계 탓에 

G  현대화에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구나

E  가곡의 매력은 음악성과 문학성 합일

F  허나 그러한 가치는 대중이 알아주고

G  소통할때야 비로소 빛을 발하게되리

 

 

작품에 들어가기 앞서

본 작품은 여창가객 박민희와 바람곶의 동인이기도 한 거문고주자 박우재, 현대무용가 장홍석이 함께한 무대이다. 전통 가곡이 갖고 있는 정적인 한계를 탈피하기 위해 춤적인 요소를 더하고, ‘반주’ 정도로 여겨진 거문고의 위치를 가창과 동일선상에 두었다. 가곡이 취한 내용물은 한시조가 아니라 셰익스피어의 소네트이다. 18번 “여름날에 너를 비유할까(Shall I compare thee to a summer's day?)” 를 가곡에 대입하되, 이를 개별 솔로에 가까운 춤과 노래, 연주로 풀어냈다. 각자의 시선과 언어로 접근하여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냈으니 다원적 퍼포먼스라고도 할 수 있겠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 작품은 가객 박민희를 예술감독으로 하여 기획된 전통 가곡의 현대화 프로젝트의 일환임을 알 수 있다. (당사자인 박민희는 현대화라는 단어 대신 번역이라는 단어를 쓴다. 아마 그녀는 전통이 스스로 발전하지도, 후퇴하지도 않는 가치-순환적 속성을 가진 예술임을 알고 있을 터)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18번 “Shall I compare thee..."

 

이전까지 기존의 ‘가곡’ 을 재해석하는 방식으로 <가곡실격><쓸쓸쓸><사랑거즛말이>를 선보였던 박민희는 이번엔 소네트를 해체하는 방식을 취한다. 물론, 이를 분석하고 풀어내는 관점은 본인의 전공인 ‘가곡’ 과 그에 대한 문제의식에 입각해있다. 일견 결과물이 주객전도(主客顚倒)와 본말전도(本末顚倒)처럼 보여 질 수도 있겠다. 허나 그녀가 가진 생각은 보다 본질적인 예술관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는바, 현대화나 계승이라는 강박의식을 벗어나 시와 음악을 도구로 하는 예술 본연의 가치, 삶의 아름다움과 즐거움, 그리고 정서적 교감과 소통을 추구하고자 하는 목적의식이 그러하다. 고로 이러한 실험은 어찌보면 ‘가곡’ 그 존재 자체를 목적으로 숭앙하는 전통예술에 대한 사소한 반기일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전통가곡에 대한 수명을 연장시키기 위한 당돌한 도전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목적론적) '전통' 이수자이면서, 자신을 대상화하여 불러야하는 '여성' 가객이라는 모순적 역할을 거두고, 스스로 ‘책임’ 번역가 라는 책무를 자임한다. 하여 엄(격)한 전통을 실격시켜 자유로움을 추구하고, 현대적 음향을 들여와 음악의 색깔을 다양하게 하며, 관념적이고 얌전한 ‘사랑’ 노래에서 내밀함과 세련됨을 더하고자 하였다. 어차피 ‘가곡’ 이라는 게 전수 받았으되, 쓸 데가 없는 기구한 운명에 처해있는 장르다. 스스로 그 ‘쓸모있음’ 을 발견해 나가는 것이 현대-전통예술가의 사명이라 할 수 있을 터. 그런즉슨, 이번 공연은 단순히 여창가객의 음악회이기 보단, 포스트-전통에 대한 예술가의 실험적 무대였다.

  

 

작품에 대하여

문래예술공장의 박스시어터는 사각의 프로시니엄 박스를 대각선으로 자른 삼각형의 무대로 변화되었다. 한쪽 꼭지점에는 박민희가 높은 의자에 앉아있고, 다른 한쪽 꼭지점에는 거문고 주자인 박우재가 자리를 틀고 있다. 남은 깊은 꼭지점이 무용수의 춤 공간이다. 진퇴의 동선이 부각되게끔 길게 뻗어있고 뒷면은 영상 사용을 의도한 하얀 벽면이 솟아올라있다. ‘각자의 시선’ 을 의식하고자, 세 명의 출연자는 서로를 볼 수 있게 열려있다.

이들이 갖춰 입은 의상도 독특하다. 꽃무늬가 들어간 면티와 단색의 면바지를 입은 남성들의 옷차림도 특이했지만, 헐렁한 하얀 면티위에 긴 치마 원피스를 받쳐입은 짧은 머리의 여가수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자유분방한 모습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단정함을 강조하고 있었다.

공연의 시작은 거문고 연주로부터 출발한다. 단선율의 거문고가 당찬 서막을 알리고 나면, 그제야 남자 무용수가 춤사위를 보탠다. 곧이어 뒤를 잇는 것은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읊는 외국인의 음성. 기묘한 삼중주를 말없이 응시하는 박민희의 (무)표정에 긴장의 빛이 깃든다. 프로그램에서도 밝히듯, 거문고를 연주한 박우재는 소네트 18번을 읊는 존 길구드의 목소리에 주목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오프닝 장면의 거문고 연주는 일종의 셰익스피어의 시낭송을 위한 반주였던 것인데, 어쩌면 길구드의 내레이션은 박민희의 가곡이 불리워지기 전의 남창(男唱)이기도 했던 셈이다.

  

 

거문고의 뜯는 소리와 함께 활 긋는 소리가 동시에 장내에 울려 퍼진다. 처연하고 음울한 소리에 맞추어 같은 동작을 천천히 반복하는 무용수. 거문고 주자가 그러하듯 무용수의 움직임 또한 ‘시詩’ 라는 매개장르에 의하여 창작되었다고 한다. 춤꾼 장홍석은 4․4․4․2행이라는 반복적인 구조에서 동작의 힌트를 취했다. 반복되는 틀 속에 자신의 움직임을 투영하고, 이를 변주시키는 행동구역(Ba Boom)을 첨가한 것이다. 실상 - 공연에서 동적인 요소를 취한 장르가 무용과 영상 밖에 없기도 했지만 - 그 특이한 신체성이 꽤나 눈길을 끌었다. 이를테면 남자 무용수의 움직임은 - 일본의 부토와도 같이 - 현대적인 속성과 전통적인 속성을 한 몸에 취한 낯설고도 이국적인 몸짓을 보여주었다. ‘가곡’ 장르의 내재된 결을 그대로 되살려, 느릿하게 몸의 일그러짐과 풀어짐을 표현함으로써 절제하는 몸, 인내하는 몸으로서 ‘가곡성’ 을 드러냈던 것이다.

가곡의 선율은 급하게 빨라지지 않으며 대체로 완만한 곡선으로 연결된다. 빠른 부분이 등장하더라도 종결부는 다시 느리게 끝을 맺는다. 이와 같은 가곡의 특성을 살려 무용수는 간혹 빨라지는 부분을 의도적으로 부각시켰다. 이를테면 처음에는 전면으로 전진하는 동작이 느리다가, 두어번 반복될 때 재빨리 진퇴하는 식이다. 공중으로 도약하는 장면 또한 빠르기가 켜켜이 쌓이다 나중에서야 터져나왔다. 가곡을 잘 아는 관객이라면 이러한 미세한 결 맞춤과 의도섞인 변화에 대해 흥미를 느낄 수 있었을 터였다.

거문고와 소네트 그리고 춤까지, 느림과 낮음의 미학을 한바탕 선보이고 나서야, 정중동(靜中動)의 끝판왕 박민희의 가곡이 출현한다. 전작에서 다소 파격적인 연기를 선보였던 그녀는 이번 작품에선 다소곳이 않아 자신의 자리를 한 번도 떠나지 않는다. 고상하고 정대한 노래인 정가의 진수를 보여주기 위해서일까. 초반에는 거문고 반주가 아닌, 울림을 머금은 정의 두드림에 맞춰 진행되었다. 종소리가 연상되는 소리울림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는데, 감정을 절제하여 부르는 가객의 목소리와 잘 어우러졌다. 후반에 덧붙여진 거문고 선율은 소리가객의 흐느낌을 과하지 않게 다독여주었다.

 

 

본래 전통 가곡은 엄격한 형식과 균제미를 통해 가사에 담긴 진실함을 전하는 노래다. 허나 ‘지금, 여기’ 에서 가곡이 다시 불려질 때, 특히나 여창의 고음발성과 가곡 전개방식은 꿈꾸는 듯한 느낌과 극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잔잔하게 일렁거리는 가성의 진행은 마치 거문고와 대금의 이중주처럼 여겨지는데 종국에는 벅찬 사랑의 감정이 차오르고 마는 것이다. 한편으로 가객이 우짖는 가사의 내용이 ‘서정’ 에 기반하고 있기에, 그 완만한 선율 진행과는 다르게 감정의 진폭은 미묘하게 변화하게 된다. 이렇듯 감정을 절제했으나, 결국에 호소되고야 마는 상황이 여창가곡의 묘한 매력이라 할 수 있으리.

아쉬운 점은 의도한 시의 가사가 관객들에게 온전히 전달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프로그램에 영어로 된 원문과 번역된 가곡체가 구분되어 있지만, 관객들은 박민희가 부르고 있는 내용이 사랑하는 그대와 지난 여름날의 절묘한 은유였음을 쉬이 깨닫지 못했다. 물론 가곡이 갖고 있는 음악의 특질상, 내용전달이 아니라 정서전달 혹은 형식‘미’ 전달에 있기에 불가피하게 견뎌야 하는 지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영어의 나레이션을 즉각적으로 해석하지 못했던 관객들(필자를 포함하여!)이 또 한 번의 우리말 가사전달에서 그 의미를 온전히 수용해내지 못한다면, 이는 결과적으로 관객을 소외시키게 되는 상황임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고음의 가곡이 끝날 무렵, 저음의 낭송이 이어진다. 높은음의 박민희와 낮은음의 셰익스피어가 교묘한 앙상블을 만들어낸다. 마침 스크린을 통해 셰익스피어의 소네트의 앞 글자를 딴 알파벳들이 춤추기 시작한다. sH, T, R, A, B, N, Wh... 단어가 아니라 앞머리 음가를 상징하는 발음, 두운(頭韻)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역시나 암호풀이 같은 공연의 인상이 거듭된다. 시간의 흐름. 공간의 구성. 인물의 배치. 따로 또 같이 제공되는 미로의 수수께끼.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로 엮어진 형식의 비밀을 풀고, 복잡한 구조를 이해하고, 해체된 전통의 뿌리를 되찾으면, 우리 관객들은 가객이 말하고자 하는 가곡의 본질을 깨달을 수 있을까. 그저 내 눈앞에서 펼쳐지는 아찔한 아름다움을, 해석되지 않는 몽상적 구조를, 그 아련한 정중동의 미학을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여러 생각들이 교차되며 눈앞에 펼쳐진 세 사람의 협업은 끝을 고했다.

 

작품을 나오며

이 작품은 이를 즐기는 관객보다는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관객에게 유리한 공연이다. 연주자의 해석과 그 해석에 대한 의미부여가 함께 갈 때, 그 실험의 의미와 의의의 확장성이 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해석을 위한 사전 장치들은 미리 알차게 '준비'되어야 할 것 인즉슨, 예술가와의 대화, 혹은 프로그램 내용의 확충, 그리고 그녀의 이전 작업들을 세세하게 설명해주는 친절한 큐레이팅으로써 갈음할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예술가가 주력한 ‘구조’ 라는 테마도 관객이 알아채지 못하면 반쪽의 성공에 그치고 말 것이다. 본 공연은 그런 준비 부재가 아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음악이 가진 힘을 관례적 특권으로 무마하지 않고, 동시대 관객들과 함께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실로 가상하다. 박민희가 전하는 ‘무대에서 쓰는 입체적인 시’ 라는 생각은 어쩌면 ‘가곡’ 만이 아니라, 드라마텍스트와 악보에 목매다는 현대의 공연예술가들이 환기하고, 반추해야 하는 개념이리라. 자신의 존재감을 포장하지 않고, 동료들과 협력으로 조화로운 결과물을 이끌어내기 위해 애쓴 점도 대단하다 하겠다. (닥치는 대로 포섭하고, 폭식하며 크기를 키우는 창작 판소리와는 그런 점에서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작품을 통해 수행된 ‘번역’ 은 완벽한 소통에는 도달하지 못했으나, 이렇게 전통을 다시 쓰고, 새로 들려주는 행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느끼게 했다. 그러고보니 그녀는 일개 가객이 아니라, 우리에게 사랑 노래를 통해 서로 다른 세계‘들’을 이어주고 맺어주는 예술 전령사였던 것이다. 커튼콜 장면에서 거문고 주자와 무용수와 함께 그녀가 행한 요상한(?) 몸 인사와 쑥스러움이 담긴 미소가 기억난다. 짧은 찰나, 경직됨이 완화된 여유로운 순간을 통해 이를 목격한 우리는 또 다시 박민희의 일탈적-소통행위를 기대해 볼 수 있겠다. 그리하여 관객들의 시선이 머무는 자리는 그녀에게 주어진 ‘옛날’ 이 아니라, 앞으로 도래할 ‘훗날’ 이 되겠다.

   

 

ps. 이번 작품은 다원예술과 무용, 그리고 전통예술 분야라는 - 다소 이질적일수도 있는 - 결합을 실행해온 문래예술공장의 'MAP' 프로그램의 결과라는 점이 눈에 띈다. 올해의 경우, 프로젝트 이리의 창작 판소리<달려라 아비>, 잠비나이의 신곡발표회, 그리고 판소리꾼 김봉영의 심학규 모노드라마와 이번 작품이 그러했다. 그렇다면 포스트-전통 퍼포먼스에 대한 구체적인 실험의 결과물들이 가장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는 씬scene이 바로 1,2월에 선보이는 유망예술가들의 문래 발표회는 아닐까. 기대를 섞어 고하자면, 문래예술공장의 유망예술가 발표의 자리가 ‘MAP’ 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다원예술계의 새로운 지도를 만들어내는, 그리하여 다양한 공연예술적 가치들을 재배치 해내는 기회의 장이 되길 희망해본다.

 

**사진제공_문래예술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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