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연극 '까쉬딴까'

2014. 3. 11. 16:48Review

 

연극 '까쉬딴까' 리뷰

 

글_정은호


이것은 동물극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극이다. <까쉬딴까>를 모두 보았을 때 든 나의 생각은 모두 이 한 문장으로 압축될 수 있다. 여우를 닮은 개 까쉬딴까가 다시 주인에게 돌아가는 여정을 다룬 연극 <까쉬딴까>는 동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이 연극은 동물을 통해 인간에 대해 말하고 있다.

동물을 통해 사람의 습성에 대해 유추하는 것은 꾀나 흔한 일이다. 몸이라는 욕망덩어리를 가지는 속성은 동물이나 인간이나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당연한 아포리즘에 근거해서도 그렇다. 그래서인지 동물들의 생존본능이나 번식욕구, 육식동물과 초식동물들의 먹이사슬들이 사람들의 관계에도 종종 적용되곤 한다. <까쉬딴까>는 이런 동물의 생로병사를 통해 인간에 대해 얘기한다.





군악대의 행렬 속에서 까쉬딴까는 주인을 잃는다. 낯선 도시를 방황하던 굶주린 까쉬딴까는 새 주인을 만난다. 그는 동물 서커스의 단장이었고, 까쉬딴까는 묘기를 부리는 동물들과 함께 생활을 하게 된다. 익숙한 고향에서 벗어나 다른 동물들을 처음 접하는 까쉬딴까의 모습은, 마치 새로운 사회에서 타인들에게 적응하느라 고생을 하고 있는 인간을 보여주는 듯하다. 집단의 룰에 끼어들지 못하는 인간은 그들의 가치에 어울리지 못해 소외되기 마련이다. 까쉬딴까 또한 처음에는 동물들 틈에서 적응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까쉬딴까는 새로운 집단에 익숙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서커스를 배우고 새 삶에 정착하기 시작한다. 까쉬딴까의 인생 2막이 펼쳐진 것이다.

까쉬딴까는 새로운 환경에 익숙해졌지만, 그래도 예전의 주인을 잊지는 못한다. 주인집 아들과 함께 뛰어놀던 그 시절. 고향의 냄새. 목수였던 주인의 집이 주던 안락함들을 까쉬딴까는 온 몸으로 기억한다. 가끔씩 까쉬딴까는 밤마다 주인을 생각하며 슬피 운다. 과거의 흔적들에 미련을 남기고 그것을 그리워하는 것은 결국 인간도 마찬가지다. 주인을 생각하며 우는 까쉬딴까를 보면서 나도 과거를 생각했다. 과거에 내가 살았던 집. 내가 그리워하던 이들. 나 또한 인생을 살아가며 어딘가로 유배된 채 고향을 잃어버린 인간이었다.

연극에는 개거위고양이돼지까지 총 네 마리의 동물이 나오는데이를 모두 배우들이 직접 연기했다모든 배우들이 동물의 상징적인 습성을 멋진 연기로 선보인다고양이는 세수를 할 때 말 그대로 고양이 세수를 하고거위는 물을 쪼아 먹고돼지는 통을 뒤집어 머리에 쓰고 게걸스럽게 식사를 하는 식이다관객의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신선한 광경이었고 볼거리’ 자체만으로도 즐거움을 주는 연기였다천연덕스러운 배우들의 연기는 그들의 외양과 동물의 속성이 어느 정도 일치하게 되면서 빛을 발했다모든 관객들이 진심으로 소리 내어 웃었고 그것은 이 연극 서사를 매끄럽게 흐르게 하는 윤활유가 되어주었다.





또한 놀랍게도, 연극 <까쉬딴까>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진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은 바로 죽음의 정서다. 동물들이 주인공인 이 연극에서 죽음이라는 주제가 펼쳐질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조금 놀랐고, 이내 쉽게 수긍했다. 태어난다면 반드시 죽는다. 신체적 속성이 주된 동물들에게 죽음이란 낯선 것이자 익숙한 것이다. 극 중 거위가 죽는 장면은 그런 의미에서 신비롭다. 주인의 품을 떠나가는 거위 이반은 사람의 죽음이 그러하듯 느닷없이 찾아온다. 죽음이란 예측불가능하다. 마차를 끌고 가는 말의 뒷발굽에 치인 이반은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이반의 생은 그렇게 갑작스레 끝나고 만다. 새 주인은 마치 친우가 죽은 듯 오열한다. 서커스에 내보낼 동물이 줄어들었다는 아쉬움의 눈물은 아니다. 같이 시간을 공유한 생명체가 사라진다는 상실감이 그를 울게 만들고 있었다. 까쉬딴까의 주인은 극에서 항상 이렇게 대사를 뱉는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고, 그래서 모두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이 대사가 가지는 의미는 무척이나 의미심장하다. 까쉬딴까가 고향을 떠나 다른 세계를 접하며 죽음을 경험했듯 우리 모두는 우리 스스로의 죽음 또한 경험할 수밖에 없다고 연극은 얘기하고 있었다. 고향-그것이 물리적인 것이든, 심리적인 것이든-을 떠나 외유(外遊)하고 있는 우리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허나 그 여정이 끝나면, 혹은 그 도중에 우리는 죽게 된다. 이 세상에서 소멸한다. 극 중 등장하는 서커스라는 유희는 그런 의미에서, 죽음에 대한 불안을 잊기 위해 만들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연극의 마지막은 서커스가 장식한다. 이 또한 무척이나 즐거운 볼거리. ‘볼거리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는 연극이 바로 <까쉬딴까>였다. 고양이는 마술을 하고, 돼지는 농구를 하며, 거위로부터 춤을 전수받은 까쉬딴까는 열심히 춤을 춘다. 새 주인은 피에로 분장을 하고 관객들을 즐거운 축제의 현장으로 이끈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까쉬딴까는 열심히 묘기를 부리고, 성황리에 서커스를 끝마친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이 애타게 그리워하던 주인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자신을 항상 타박하고 못되게 굴었으나, 언제나 친 가족 같았던 주인과, 아늑하고 배고플 일도 없는 환경을 만들어준 새 주인 중에 누가 더 나았는지 단정하기는 힘들다. 어찌되었든 까쉬딴까는 주인을 택했고, 주인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수많은 인파를 지나 주인을 만난다. 주인을 만나고 집에 가는 길, ‘이 모든 것이 꿈 같았다고 까쉬딴까는 독백한다. 그리고 연극은 끝이 난다. 연극 <까쉬딴까>는 한 동물의 여정을 통해 인간의 삶을 보여주었다. 또한 과거를 애타게 그리워하는 까쉬딴까의 눈물과, 거위 이반의 죽음에 슬퍼하는 새 주인의 모습은 많은 관객들의 정서를 건드렸을 것이다. 본질적으로 인간 또한 그러하기 때문이다.





까쉬딴까는 세 가지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다. 인간들의 연극, 동물들의 연극, 인간들이 연기하는 동물들의 연극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세 번째의 관점으로 이 연극을 보았다. 이 연극은 동물극처럼 보이지만 인간극이다. 인간이 연기하는, 인간과 다를 바 없는 동물들의 이야기다. <까쉬딴까>는 인간에 대한 동물의 이야기였고, 동물에 대한 인간의 이야기였다.


필자_정은호

소개_고등학교 1학년 시절 동네 책방에서 무협을 읽다 엉뚱하게도 문학에 빠져버렸습니다. 여전히 SF를 읽고 만화와 B급 오락영화들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쓰고 싶은 글은 동시에 깊이 있는 문학 소설입니다. 어느 경계에도 얽메이지 않고 자유로운 글쓰기를 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