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극단문, <먼지와 우주> - 잉여를 즐기는 병맛들

2014. 3. 6. 23:58Review

 

극단 문, <먼지와 우주> 리뷰

잉여를 즐기는 병맛들

 

글_김연재 

아니, 이 아름다운 동화가 왜 아오병잉에서 공연을 하는 거지? 심지어 병맛 아트로 분류해놓았는데, 병맛이 무슨 맛인지 더욱 모호해진다. 우리 모두 느낌적인 느낌으로 병맛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이건 약간 다른 병맛인 것 같다. 물론 병맛에 대한 정의는 각자 다를 테고 출처도 분명치 않다. 필자가 이해한 바로는 병맛이란, 모자란 그대로를 즐기는 것이다. 병신에서 유래한 병맛은 병신미가 드러날 때 붙여주는 단어인 듯한데, 병신는 어디서 발현하는가, 병신과 병신미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꽤나 난감하다.

병신은 모자라는 사람이고, 모자라면 부끄러워하거나 채우려고 노력해야 하는데, 병맛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먼지와 우주>는 모자란 게 없어 보이는데, 어떤 병맛이 있을까?

 

얼굴 없는 인형극

 

소소한 이야기를 15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들려주고 보여준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관객들은 무대 한가운데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다. ‘우와!’ ‘히야!’ ‘이런 강렬한 감탄사들은 없지만 사람들은 부드럽게 웃어주고 눈꼬리가 선해진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한 걸까?

서울연극센터 로비에 검은 천막과 가림막으로 간신히 극장이라는 공간을 만들어놓았다. 무대 단상은 사용하지 않고, 객석 앞에 청동으로 만든 것 같은 반구(半球)만 놓여있다. 밑이 둥근 냄비()를 엎어놓은 것인데, 조명을 받은 냄비는 달 같기도 하다. 공연 제목을 상기하면 우주 안에 외롭게 떠있는 어떤 행성인 것 같기도 하다. 무대 중앙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반구만 쳐다보고 있으니 온 우주에 달만 있는 것 같다.

잠시 후, 두 연기자가 등장한다. 일상복을 입고 등장해서 잠시 관객들을 흐뭇하게 쳐다본다. 한 연기자의 주머니에서 얼굴 없는 노란 인형이 조심스레 등장하고, 다른 연기자의 주머니에서도 처음 등장했던 것보다 몸집이 조금 더 큰 빨간 인형이 등장한다. , , 입은 없고 머리 형상과 팔, 다리만 있는 인형이다. , , 입이 없는 인형들은 가면을 쓰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먼지 같지만 우주를 담고 있는 말

어느 행성에 떨어져 있는 듯한 두 인형은 조곤조곤 나직이 이야기한다. 어둠과 조용한 무대의 조합은 관객들의 잠을 불러일으킨다! ‘관객들이 졸면 어쩌지!’ 하고 주변을 둘러봤는데 지겨워하는 사람이 전혀 없다. 졸 수가 없다. 왜냐하면 너무 사소하고도 커다란 말들만 하기 때문이다.

인형들이 하는 말은 대부분 우리가 평소에 툭툭 내뱉는 말로 이뤄져 있다. ‘심심해’ ‘힘들어’ ‘왜 해야하는 거지?’ 말을 많이 하는 것도 아닌데도, 말 한마디가 바윗덩어리처럼 크고 무겁게 다가온다. 배우들이 말을 읊조리는 방법은 말을 사소하지 않게 만들고 있다. 오히려 굉장히 중요한 말이라는 듯이 여러 번 곱씹다가 발화해서 관객이 집중하게 만든다. ‘이라는 것은 많이 할수록 오히려 의미는 날아가고 행위만 남을 수가 있다. 예를 들자면 내가 이러쿵저러쿵해서 너를 진심으로 좋아해, 얼마만큼 좋아하냐면 …….’ 이렇게 고백하기보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널 좋아해라고 단 한마디만 하면 된다. 전자가 고백을 하는 행위가 강조된다면, 후자는 고백하는 사람의 감정이 강조된다. ‘얘 진지하구나!’

그동안 우리는 수백 번을 내뱉으면서도 왜 심심한지, 왜 힘든지, 왜 하고 있는 건지 생각해본 적이 없다. 진지하게 앉아서 나는 왜 심심할까?’ ‘심심이란 무엇일까’ ‘나는 어떨 때 심심함을 느끼는가’ ‘내가 심심한 건 정말 내가 심심한 것일까?’ ‘나와 심심함의 관계는 긍정인가 부정인가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져본 적이 있는가. 공백을 메우기 위한 습관적인 말일 뿐이었지 깊게 생각하기에는 우린 너무 바쁘다.

가면. 흉내. 모방. ‘왜 달려야 하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달라는 노란 인형의 재촉에 빨간 인형은 이야기를 시작한다. 노란 인형은 토끼머리띠를 쓰고, 빨간 인형은 거북이등딱지를 단다(일요일 공연에는 보이지 않았다). 심심한 두 인형은 <별주부전>에서 토끼와 거북이가 그러했듯, 달리기를 한다. 원작에서 거북이는 토끼의 간을 얻으려는 목적이 있었지만, 인형들에게 목적 따위는 없다. 그냥 심심해서 달린다. 노란 인형은 토끼처럼 빨리 달린다. 반면에 빨간 인형은 거북이처럼 늦게 달린다. 남들이 봤을 때 느릴 뿐, 거북이는 최선을 다해 최고 속도로 달리는 중이다. 빨리 달리는 토끼는 빨리 달려서 힘들고, 거북이도 나름대로 빨리 달려서 힘들다. 달리기가 끝나고 두 인형이 외치는 소리. “힘들어

힘들면 안 하면 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심심하지 않기 때문에 뛴다. 뛰고 억지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심심함을 없애고 그 빈자리에 무언가를 채워넣기 위해서 우리는 바쁘게 무언가를 한다. 왜 무언가를 해야하는 지는 모른다. 그냥 심심함을 없애려고 한다. 근데 그냥 심심하면 안되나? 안된다. 심심한 사람은 잉여이고 병신이기 때문에 병신 또는 잉여가 되지 않기 위해 심심하지 않아야 한다. ‘난 몰라. 심심한 게 뭐야?’하고 달린다, 힘들다, 피곤하다. 하지만 피곤하지 않는 강철 체력이 되기 위해 오늘도 러닝머신 위에서 달려야 한다.

인형들이 가면을 쓰고 토끼와 거북이로 변장해서 <별주부전> 흉내를 냈다. 직접 뛰어봤더니, 그때 거북이랑 토끼가 되게 힘들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머리로 추측하는 게 아니라 육체로 직접 모방하고 경험했더니 깨달은 건 힘들다’. 이내 우리는 왜 이야기를 해야만 할까라는 물음을 갖고 인형들은 이야기를 그만둔다. 그러므로 우리는 멈추지 못하지만 두 인형은 달리기를 그만둔다.

 

우리는 어디서 왔을까?

인형들이 등장한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처럼, 갑자기 인형들 몸에서 먼지와 실이 발견된다. ‘발견을 시작으로 먼지와 실이 어디서 왔는지 왜 생겼는지를 물어보는 듯하지만 인간 존재를 겨냥한 질문이다. 머리가 아프기 시작하려는 찰나 더 이상한 질문들을 던진다. ‘우주이라는 거대한 단어를 거론한다. “인간이 우주에 오면 신을 안 믿겠지?” 게다가 본인들이 산소와 이산화탄소라고 말하며 네가 희박하면 나도 희박해라는 말을 통해 관계를 보여준다. ‘희박이라는 비일상적인 단어를 연달아 반복한다. 우리에게 희박한 것은 무엇일까.

공연은 끝까지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걸까?” 이런 비생산적인 물음만 나열한다. 질문만 15분 동안 던져놓고는 극을 끝내버린다. 마지막 장면은 인형들이 먼지와 우주가 되어 부유하면서 끝난다. 그렇다. 이 인형극은 안드로메다로 가는 공연이었다.

뚜렷한 서사도 없이 인형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어떻게 시간을 때우는지 보여주는 공연이다. 직장도 가지 않고, 취업준비도 하지 않고, 이야기도 끝까지 맺지 못하는 한심한 인형들의 첫 번째 병신미. 재미있는 것만 찾고, 편한 상태만 유지하려고 한다. 두 번째,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스스로 질문이 생기더라도 답하지 못한다. 계속 질문밖에 못한다. 세 번째, 자신들이 모자라다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저 이 순간을 유희할 뿐이다. 병맛스러운 인형들을 보면서도 관객들은 따뜻한 표정으로 공연을 보았다. 인형들은 한심해 보이기 보다는 귀엽게 보였다. 귀엽게 노는 모습을 보면서, 효율이나 경쟁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다. 인형들이 했던 질문들은 관객들도 익숙하게 했던 질문들이고, 사소한 질문을 고민으로 받아들이는 인형들을 보면서 관객들도 서슴없이 질문을 되새겨보게 만든다. 비생산적인 행위이라는 강박에서 벗어나서 귀여운 인형들이 했던 것처럼 관객도 소소한 고민을 시작하게 만드는 인형극이었다. 우리는 바빠서 여유롭게 비생산적인 질문을 할 수 없었지만 인형들 덕분에 잠시 잉여가 아닌 여유를 갖고 내 고민을 꺼내보게 만드는 15분의 마법. 이 마법 때문에 동굴 같은 어두운 극장으로 몰려오는 것이 아닐까?

 

필자_김연재

소개_연극은 좋아합니다. 

 

작_정진새

연출/인형_임은주

제작_장윤정

출연_인형들

시놉시스: 큰 인형에서 작은 인형에 이르기까지. "왜 뛰어야 하는지 참" "난 한 번도 뛴 적 없어" "이야기해줄까?" "재밌어?" "나는 우주에 오면 신을 안믿겠지?" "괜찮다니까" "괜히 씁쓸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