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외롭고 불편한 청춘이 말한다 : <안녕 크리스마스> <동정남의 순결마법> <잔반처리>외

2014. 3. 11. 16:58Review

 

외롭고 불편한 청춘이 말한다 :

<안녕 크리스마스>, <동정남의 순결마법>, <잔반처리>


 글_이솔


아오병잉 페스티벌에 참가한 영상 작업들을 감상한 곳은 대학로 서울연극센터의 무대를 분할하여 만든 작은 영사실이었다줄지어 늘어선 피아노를 옆에 끼고, 등 뒤로는 드리워진 검은 가림막을 통해 다음 공연을 준비하는 소음이 들려오는 장소에서 재기발랄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다. 조금 어둡고 비좁지만 활기가 느껴지는 임시의 그 공간을 채운 공기는 거기서 만날 수 있는 젊은 작품들의 질감과도 닮아 있었다.

 


고승아의 <안녕 크리스마스>는 초단편 애니메이션이다특별한 색채를 사용하지 않고 흰 배경에 말랑한 질감의 검은 선들로 간결한 형태들을 그려냈다. ‘는 문자 한 통 받을 일 없이 방구석에서 서러운 휴일을 보내고 있다. 톰 웨이츠의 구슬픈 캐롤송을 배경음으로, 프레임 사이로 춤추듯 흔들리는 간결한 선들 속에서 유달리 의 서럽고 외로운 표정만이 리얼한 필치로 부각된다. 그런 주인공에게 성냥팔이 소녀가 피워올린 꿈처럼 예수와 산타클로스가 찾아오고세 사람(?)은 친구들끼리 어울려 즐길 수 있는 다양하고 소박한 놀이를 하며 유쾌한 한때를 보낸다이로부터 얻은 충족감과 함께 ''는 성공적으로 크리스마스라는 따뜻한 축일의 일부가 된다어쩌면 에게 일어난 이 모든 일들은 정말로 한겨울 밤의 꿈에 불과할 지도 모르고, 내일 아침에 일어나 만난 방구석은 여전히 썰렁할지 모르지만, 오늘만은 행복감에 젖어 잠에 들 수 있다.

 

 

김재관의 <동정남의 순결마법> '남자가 25세까지 동정이면 마법을 쓸 수 있다'는 내용의 유명한 인터넷 개그를 모티프로 삼은 단편영화이다연애만 빼면 성실한 삶을 살아온 4년차 고시생인 주인공은 25세 생일에 자신이 마법을 쓸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그러나 그 능력은 담배에 불붙일 때나 쓸 수 있는 수준의 것으로, 그저 자신의 인생을 회한 속에서 돌이켜보게 만들 뿐이다. 주인공은 한 눈 팔지 않고 살아온 자신의 25년을 되짚어보며(25세에 군대를 다녀온 4년차 고시생이라니 정말이지 그 어떤 낭비도 없는 삶이 아닌가다른 사람들 또한 남몰래 이런 마법적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품는다그러나 수소문해본 결과 주변의 친구들은 약간의 탈선을 위한그리고 연애를 위한 여백을 삶에 기입하며 살아가고 있었다불필요한 삶의 잉여라고만 생각해 왔던 것이 자신의 정체성을 흔드는 순간이다. 고통 속에서 이 좌절과 '마법사'로서의 정체성을 아는 고시생 선배에게 털어놓은 주인공은 선배에게 이끌려 은밀한 골목으로 들어간 뒤 굉장한 것을 본다선배는 훨씬 마력이 뛰어난 마법사로 아주 아름답고 엄청난그리고 매우 쓸모없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영화에서 잉여적인 것은 관객과 주인공의 예측을 배반하는 형태로 드러난다. 마법이라고 하면 마땅히 판타지 장르에서 볼 수 있는 신비하고 위력적인 능력일진대 주인공이 살아가는 세계에서는 한없이 잉여적인 능력으로 전락해 있다. 주인공과 선배가 마법을 사용하는 순간 역시 의도된 듯한 우스운 CG처리로 묘사된다. 한편 연애와 사소한 삶의 즐거움들은 목적의식이 뚜렷한 주인공에게 부러 챙길 필요 없는 삶의 잉여 같은 것이었지만 사실은 고시생의 성적표가 아닌, 청춘의 시기를 지나치고 있는 한 인간의 성적표를 매기는 데에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가산점 요인인 것으로 드러난다. 엔드 크레딧에서는 이은철의 그럼 니가 나랑이 구성지게 흘러나온다. ‘넌 참 착한데 진짜 매력 있는데 성격도 좋은데 왜 애인이 없을까/넌 참 재밌는데 센스도 대박인데 나 같으면 너랑 사귈 텐데/그럼 니가 나랑 사귀던지/아닐 거면 그런 말은 말아줘’. 아무 하자도 없는데, 좋은 조건도 갖추었는데, 왜 안 생기는 것일까. 이는 누구도 영원히 풀 수 없는 방정식이겠지만, 어느 정도는 그가 좋은 남자사람친구, 좋은 남자선배가 되는 일에만 충실할 뿐 여지를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연애의 여지라는 것은 결국 잉여의 감정이 만들어내는 틈새다. 연애지상주의자처럼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연애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기를 쓰고 잉여가 되지 않으려는 청춘은 분명 어딘가 좀 인생을 잘못 살고 있는 것이다.

 

 

김한울은 두 가지 영상을 선보인다. <송곳에게>는 일상에서 겪는 불편한 감정을 어떻게 해소하는지에 관한 프로젝트의 일부이다작가 자신이 등장하여 송곳을 들고 두꺼운 스폰지 형상을 한 완충재를 연신 찌른다이 완충재는 상당히 깊기 때문에 송곳을 바닥에 닿게 하려면 거의 팔꿈치까지를 찔러넣어야 한다날카로운 기구의 이미지, 그리고 온 힘을 다해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고통스런 표정과 몸짓의 조합은 관객에게 새로운 형태의 '불편함'을 제시한다이 행위는 스트레스를 해소한다기보다는 자해에 가까운 시지프스적인 노동을 스스로 떠안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갈 곳 없는 분노와 짜증을 쏟아 부을 장소는 목표지점 없는 송곳의 과녁들이다. 이 무해한 폭력의 현장은 그 상처마다 영원히 해소되지 않는 청춘의 답답함과 두려움을 머금고 있는 듯하다

 


김한울의 또 다른 영상인 <잔반처리>는 학교 식당에서 식사를 한 뒤 그 잔반을 이용해 예술 작품을 창조하는 과정을 부감 샷으로 촬영한 작품이다. ‘잔반이라는, 으레 국그릇에 한데 섞여 버려지곤 하는 이 아름답지 않은 재료들은 팔레트이자 캔버스인 쟁반과 그릇을 넘겨받은 손에 의해 회화적인 작품으로 변신했다가 한 번 다시 부서진 뒤 새로운 조형물로 재탄생한다이 모든 과정이 고속으로 재생된 후 예술가는 조형물을 들고 테이블에서 일어서고, 카메라는 이제 소란한 식당으로 내려앉아 이 '작품'이 처분되는 길을 따라간다석탑처럼 고아하게 포개진 쟁반과 그릇들 위로 푸른 식재료가 아름답게 솟아 있는 이 작품은 컨베이어 벨트로 만들어진 퇴식구를 따라 이동한 뒤 식당 직원의 손에 의해 버려진다이 작품 속에서 관객들은 생활의 잉여들이 가장 아름답게 조립되고 부서지는 것을 본다.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워질 수 있는 것이야말로 잉여의 숨은 능력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 작품은 곧 버려질 자신의 운명을 배신하지 않고도 순간의 경이를 창조하는 쓰레기의 능력을 조용히 묘사한다.

 


필자_이솔

 소개_영화보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