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크리에이티브 바키 <남산 도큐멘타: 연극의 연습 - 극장편>

 

어둠을 삼킨 극장, 그리고 연습의 실천

<남산 도큐멘타: 연극의 연습 - 극장편>

크리에이티브 바키 + 남산예술센터

글_김민관

 

 

‘극장이라는 주어’

이번에는 연극의 연습-‘극장’ 편이다. 이는 ‘모델’(<서울연습-모델, 하우스>)에서 ‘인물’(<연극의 연습-인물 편>)로 그 주어(대상)를 옮겨가며 이제 어떤 최종 목적지로서, 그 주어가 공간이란 비인격 자체에 다다른 형국이다. 극장이 주어라면, 극장의 기억(역사)과 목소리(이야기)가 필요하게 된다. 통상 극장 전체가 아닌, 극장 안의 무대로부터 환상이 출현한다면, 극장 자체를 사유할 수 있는 대상, 또는 말할 수 있는 주어로 만들기 위해서는 극장의 안팎에 대한 사유가 필요하다. 단지 현재 흘러가는 시간이 아닌, 그것을 거슬러 올라가는, 그리고 극장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시선을 따르는, 중첩된 시간 감각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극장을 바라볼 수 있음은 물론이다. <남산 도큐멘타>는 극장이 하나의 무대를 싸는 포장에 불과하고, 그 안의 무대에서 벌어지는 환상으로 인해, 도리어 망각·은폐되는 극장을 사유하게 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우선 <남산 도큐멘타>는 극장 바깥에서 남산 산책으로, 극장으로 드나듦의 체험을 만든다. 이를 통해 남산예술센터의 물리적·신체적 접속을 가져간다.

“극장 안의 지배적인 관습이 안일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것의 구조가 관객의 위치를 언제나 확고히 불변적이고 안전한 것으로 느껴지게끔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극장성이 부정될 때 비로소 극장에 대한 질문이 가능해지고 자신의 좌표를 인식하고자 하는 몸의 사유가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경성 「연출의 글」

이른바 ‘극장에 대한 질문’을 가능케 하는 ‘몸의 사유’는 그렇게 얻어진다. 1906년 일본이 세운 통감관저 터, 현재도 기능하는 서울유스호스텔 그리고 예전 중앙정보부에 붙잡혀 온 사람들의 생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는 주자파출소 터 등 극장 주변에 건물들을 지나치며 김다흰 배우가 그에 대한 짤막한 소개를 덧붙인다. 중간 중간 크리에이티브 바키가 연습 기간 들르곤 했던, 그래서 그들의 실존이 묻어난 음식점도 지나친다. 그리고 남산예술센터 백스테이지를 거쳐 무대 위 배우를 맞는다. 관객이 대면한 건 <햄릿>(<햄리트>(1962))이란 ‘연극의 연습’이다. 이는 현재 진행형이 아닌, 타임 슬립(Time slip)으로 역사적 장면에 들어온 것에 가깝다.

 

 

‘이것은 재현들의 양상’

본격적인 관극이 시작되고 실제 극장을 드나들며 생기는 안팎의 중첩된 시각은 이제 관객이 없다고 상정하는 ‘제4의 벽’을 만드는 대신, 과거 자체를 특정 매체의 형식에 담아내 전달하는 것으로 방향을 트는데, 이는 라디오 방송의 성우 목소리로 신문 등의 사료를 통해 매개된다. 곧 극장의 역사를 중계하며 이것이 재현되고 있음을 명시하는 형태로 드러난다. 재현의 양상이 재현되고 있음의 의식을 안고 전달됨은, 무대 안에 무대를 만들며 그 무대를 매개하는, 전면을 바라보는 성우의 존재로 인해 어느 정도 가능해진다. 이러한 매개는 극장 자체를 끊임없이 환기시키면서도 오히려 그 극장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몰입하게 만든다. 배우들은 완전히 지난날의 성우를 따라한다기보다 그 특색을 살리면서 자의적으로 그것을 변주한다. 그렇지만 이런 표현의 영역은 우리가 과거의 어느 한 장면에 떨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배우들 역시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차원에서 이 현재를 가로지르는 과거의 흔적은 ‘우리’에게 진실한 과제가 된다. 사실 관객은 지난날의 다양한 극장의 궤적을 찰나적으로 마주하되 그 내용들 자체에는 크게 의미를 두지는 않아도 된다. 오히려 이 과거가 어떻게 현재와 마주하는지 그 낯선 감각들을 확인하며 극장이란 주어를 점점 더듬어 나가면 된다. 그 안에 미8군 공연단의 재즈 공연, 극중극 등 여러 스펙터클이 흘러간다.

 

 

김종필(나경민)과 유치진(신선우, 김다흰, 최요한)이 만나는 영상에서 김종필의 시선이 유치진을 그러나 전면을 향할 때, 카메라를 직접적으로 드러나게 하지 않는, 영화상의 문법을 깨뜨리는데 여기서 카메라는 다름 아닌 세 명을 번갈아 연기하는, 그래서 어떤 식으로 확정되지 않는 역사에 대한 해석·연기(演技)의 모호함(그러나 이는 역사에 대한 연기延期는 아닐까, 가령 이는 분명 어떤 예전 드라마의 양식을 차용·재현하며 기시감을 주지만, 그 양식으로부터 해석의 시선을 명확히 드러내지는 않는다)을 보여주는 유치진, 그리고 유치진을 체현하는 관객 자신을 향하고 있다. 카메라는 관객의 시선이자 신체가 되는 것이다. 영상에서의 김종필의 시선에 붙들린 채 관객은 그 역사의 현재 진행형에 묶이게 된다. 그리고 그 영상이 나오는 스크린 천막이 올라가며 홍해를 가르듯 세 배우가 뒷모습으로 등장해 그의 대사를 받는다. 이는 마치 스크린이란 매체와 과거를, 배우의 신체 그리고 현재를 교차시키며 뒤섞는 그러한 풍광이기도 하며, 동시에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기도 하다. 여기서 현재는 관객의 시선·신체를 바통 터치한 뒷모습의 세 배우다.

 

‘우리라는 목적 없는 연대’

애초 무대에 배우들이 한 명씩 등장해 배우와 관객의 자리가 생겨나는, 첫 신인 연극 선언으로 돌아가자면 “우리의 연극은(/엔)”으로 시작되는 발언 내지 질문은 관객과 배우의 관계를 상정하며 ‘따로 또 같이’가 아닌, 발언하고 질문할 때 순간적으로 그 연극이 정의되는 순간 ‘우리’를 만들어 냄을 의미하는 데 초점이 맞춰진다. 어떤 ‘연극’이 아닌 그 연극 안에 함께 있는/있을 ‘우리’인 것이다. 곧 수많은 발언과 질문의 이어짐 속에 <남산 도큐멘타>가 어떤 연극임을 가리키기보다, 어떤 연극이어야 한다기보다, 어떤 연극을 함께 하는 우리가 전제되며 그 연극 역시 순간순간 달라지는 것이다. 앞서 재현되고 있음을 인식함은 무대 위에 또 다른 무대를 두는 라디오 방송부터 막간 극 등의 액자식 구성과 그것의 중계·중개로 인한 것이 큰데, 이 ‘우리’라는 문법은 무엇보다 직접적이며 어떤 공통의 연극을 구현해 내며 어떤 미래를 만든다. 곧 이 연극에서 과거와 현재, 극장 안과 밖의 경계의 문법은 시험되고 있고 또 주요한 주제임에 틀림없지만 관객과 배우 간의 경계를 허무는 것은 이 ‘우리’라는 문법이며, 앞서 정면을 바라보는 김종필을 통해 포박당한 관객의 경우는 그것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우리’는 점점 불편한 묶음·묶임으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가령 연출은 관객의 자리에서 배우들을 줄 세워 오디션을 갖고, 이들을 시험·실험하기 시작한다. 각각의 장면은 고문 신(scene)을 완성하기 위한 사전 사운드 채집에 가깝다. 그리고 각자 배역이 주어지고 고문 신의 오케스트레이션을 완성한다. 각종 소리에는 신음 소리가 절대적으로 강하다. 곧 연출가의 배우에게 하는 지시·명령 이후, 배우들은 연출의 손을 떠나 각자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며 스스로 그 고문 신을 연출하는데, 이는 연기라는 재현의 양식일 뿐이지만-그래서 그 강도의 세기는 더 진짜 같고 고통은 더 크게 다가오게끔 만드는데-점점 재현을 벗어나 현시로 변해간다.

곧 우리는 관객으로 그것을 대리 체험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만, 이 연극의 연습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점점 무대는, 극장은 어두워지며 드디어 무대 안의 무대라는 개념도 묘연해지며, 완전히 하나의 적막으로서 극장이 될 때, 관객은 그 어둠과 뒤섞여 극장(의 신체) 자체가 된 존재, 역사의 암흑 같은 시간의 틈을 비집고 새어나오는 신음 그 자체를 엿듣는 어떤 산증인이 된 관객으로 위치하며 그것을 거부할 수 없는 위치에 또 놓이게끔 된다.

 

 

‘어둠에는 눈이 있다, 저항할 수 없는 신체도 있다’

시험받는 배우에서 고문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는 무력한 신체, 시선으로 변하는 이런 광경은 이제 극장이 잠시 눈 감는, 그러나 다시 눈 뜨는 어떤 묘연한 시간에 휘말리는 것이기도 하다. 연습은 말 그대로 무엇보다 실제 같았고, 아직 관객에게는 보일 수 없는 가운데, 관객·미래라는 그 실제를 향해 가는 가운데 재현이 아닌 어떤 현재의 차원으로 현시되고 있었던 것이다. ‘연습’이란 무대에서 결코 유효할 수도, 가능할 수도 없는 부분은, 더 이상 들여다보는 게 가능하지 않는, 재현할 수 없는 역사의 모습으로 환치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어둠은 블랙 아웃된 기억, 그럼에도 꺼지지 않고 증폭되어 가는 신음으로 되살아나며 역사로 기입되는 기억으로, 그 무의 틈새에 기억의 잔상을 남기고 있었던 것이다. 곧 어둠이라는 극적 환영은, 이미 재현되고 있음의 전제를 벗어나, 또한 공통됨을 가정하고 정의하고 있던 시작을 벗어나, 더 이상 매개 장치 없는 어떤 실제와 부딪히는 접면에서 관객을 혼란스럽게 했고, 관객에게 고통을 짐 지우는 한편, 그 윤리적 책무 의식까지도 어둠 속에 소멸하게 놔두지 않았다. 그 고통의 짐 지우기가 또한 연습임은, 그리고 어떤 클리셰 차원을 벗어난 의도적인 강조임은 말할 나위가 없는데, 그 소리는 끝이라는 지점과 맞물려 늦추어지고 미약해지는 대신 점점 커져만 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연습으로 인해, 가능한 이 과장됨은 어쩌면 그 고통에 무력해지지 않는, 그 고통에 항거하는 타자로서 우리(의 인지적·반성적 고통)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 뒤에 고문 신 재연 이후 카메라가 극장을 더듬어간다. 일종의 극장이라는 신체·기억과 그것을 보는 시차적·유령적 시선이 자리하는 것이다. 이는 극장에 얽힌 수많은 유령 같은 존재들의 전제, 끝나고도 끝나지 않는 무대, 무대에 대한 내밀한 체험 등 여러 의미를 띠겠지만, 무엇보다 극장이라는 존재를 상정한다.)

하지만 배우들은 그 진지한 사라짐, 사라지지 않는 어둠이 지난 후에도 이윽고 다시 나타나 커튼콜을 한다. 이것은 진짜 연극의 연습이었으며, 배우들은 연습처럼 실제의 수행을 그렇게 보내고, 내일을 맞을 것이 틀림없었다. 단지 그 ‘막공’이라 불리는 시간을 제한다면. 그렇지만 ‘연극의 연습’이 계속 되는 한, 이 연습은 또 다른 연습으로서 공연에 밑거름이 될 것 역시 틀림없었다. 그렇게 연극은 완성되기보다 유예되며 중첩된 시간의 긴장과 얼룩들을 통해 연습되어지며 이어진다. 마치 남산예술센터의 역사가 그렇게 파란만장하게 이어져 오고 있는 것과 같이.

 

 

***사진제공_크리에이티브 바키

크리에이티브 바키 <연극의 연습> 공연리뷰 바로가기 >>> http://indienbob.tistory.com/754

 

 필자_김민관

 소개_공연예술 프리랜서 기자 및 자유기고가. 문화예술 분야에 전반적인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현장을 쫓아다니며 기록 중. 온라인 뉴스채널 http://artscene.co.kr 편집장